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00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13. 스테판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7.25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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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혁은 스테판과의 대화가 흥미로웠다.
“대단히 생각이 깊으신 분이시군요.”
“별말씀을.”
몰입이 절로 깊어졌다. 지구를 떠나 타지에 온 뒤로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 이전 하늘도시에서도 복음에 순종적인 사람은 만났으나 아직 복음을 소개받기도 전에 올바른 가치관을 논할 만큼 올바른 이성 체계를 보여준 이는 스테판이 처음이었다. 또 단순한 언어적 소통의 진지함을 넘어 비언어적 태도에서 녹아나는 진중함도 대화하는 내내 교감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그만큼 스테판에게는 신을 찾으려는 솔직하고도 정직한 열정이 있었다.
“차라리 신들이 자기 모습의 감춤과 드러냄을 능동적으로 다스렸더라면, 혹 요구에 대한 응답이나 형벌을 변칙적으로 조절했더라면 조금이나마 신적 존재로서 고려해볼 가치가 있었을 것이오.”
스테판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카뮈네라에는 그런 류의 신은 없소. 지금 활보하는 그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결단코 신은 아니오. 최소한 운명의 주관자는 결코 못될 것이오. 그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겠지.”
아무런 단서를 주지 않았는데도 그런 깨달음까지 이르다니. 놀라웠다. 스테판의 추리를 듣다 보니 문득 윤혁은 카뮈네라의 거짓 신들과 그들을 경영하는 시스템을 좀 더 객관적으로 면밀히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직 복음을 듣지도 못한 스테판도 저렇게 이성적이고 체계적이거늘 명확한 정보도 부족한 상태로 주민들에게 막무가내식으로 몰아붙이기만 해서는 되겠는가.
“잘 들었어요.”
그때 곁에서 대화를 듣던 루디아가 감명 깊다는 투로 말했다.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정말 기뻐요.”
“나 역시도 당신들과 만남에서 단서를 찾기를 소망하오.”
“혹시 이곳의 신들이 거짓이라 생각하시는 다른 이유가 있으신지요?”
그녀의 질문에 스테판은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답했다.
“첫 번째 증거는 겉으로 드러난 경향성이오. 방금 앞서 말했던 신들의 수동적인 행태도 그 증거의 일환이오. 그런 점도 중요하겠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에게는 물리적 한계가 있소.”
그 말대로 카뮈네라의 신들은 화려해 보이긴 했으나 지배 가능한 영역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해당 지역만을 다스릴 뿐 다른 지역을 침범하거나 빼앗지 못했다. 신들끼리 경쟁을 종종 벌인다고는 해도 특정 신이 아예 없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한 그들은 전공에도 한계가 있었다. 각 신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 국한하여 다른 신들보다 특화되었고 역으로 다른 신이 주관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힘이 제한되었다.
“어머! 저희의 고향인 지구의 역사를 돌아봐도 비슷해요. 그곳에서도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여러 거짓 신들을 상상해서 만든 뒤 섬겼는데요, 대부분은 지리적으로나 속성적으로나 일정한 범위의 제한을 지니고 있었어요. 가시적인지 여부를 제외하면 이런 면에서는 비슷하네요.”
“그렇소? 신기하군.”
루디아의 반응에 스테판도 호기심을 보였다.
“아무튼, 신이라 불림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만물을 한꺼번에 주관할 능력을 지닌 궁극적인 근원이어야만 하오. 힘의 한계가 있거나 범위가 국한되어 있거나 경쟁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이 아닌 피조물일 뿐이오.”
“단지 인간보다 조금 힘이 강하다는 이유로 먹이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점한 포식자일 수는 있어도 말이죠. 어차피 신을 올바르게 정의하려면 절대자로밖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어요.”
리온도 긍정하는 어투로 살며시 거들었다.
“사실 그것들, 인간보다 뛰어나지도 못할걸.”
윤혁은 머릿속으로 괴물 같은 경지의 초인들을 떠올렸다. 카뮈네라의 신들이 어떤 원리로 지어진 발명품들이건 간에 그것들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주체는 저 위쪽의 오만한 인간들 아니겠는가. 과거부터 인류는 그래왔다. 자신보다 못한 목석을 깎아 신주처럼 모시는 어리석음. 오늘날도 기술력과 지식만 발전했을 뿐 성장이라고는 한 발자국도 못 이룬 형국이었다.
어쨌건 이렇게 서로에 동조하는 분위기에서 담화를 나누다 보니 제법 상호 유익이 생겼다. 선교사들은 카뮈네라라는 지역의 특색 및 토속신들의 특징에 관하여 정보를 많이 얻었고, 스테판에게는 신학적 고찰과 사색을 고심 없이 터놓을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덕분에 분위기는 금세 밝아졌다. 어느새 팀의 새로운 일원이 정식으로 하나 추가된 듯한 기분이었다.
“내게는 카뮈네라의 거짓 신들이 망상임을 고발할 두 가지 증거가 더 있소. 하지만 이것들까지 설명하려면 여유 시간이 필요하오. 그리고 현장에서의 시청각 교육도 필요하오.”
스테판은 셋을 신뢰하였는지 다음 대목으로 그들을 초대했다.
“잠시 나와 함께 가주어야 할 곳이 있소. 따라올 수 있겠소?”
잠시 고민이 들었다. 제한된 두 달의 시간. 그 시간을 스테판 하나와 대화하고 탐구하는 데 보낸다면 남는 여유분은 거의 없으리라. 기회비용을 전략적으로 계산해야만 했다. 여러 사람을 피상적으로 전도하느냐, 아니면 단 한 영혼만을 진지하게 돌보느냐? 여태까지는 전자 쪽에 치우친 행보를 보였었던 선교팀이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다른 방향이 마음속에 와닿았다. 그들은 노선을 바꾸어 후자를 선택해보기로 했다.
“좋습니다. 함께 가시죠.”
리온이 대표로 스테판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
네 일행은 멀리 떨어진 채 비행하는 로봇들의 엄호를 받아 가며 넓은 밀밭을 거닐었다. 새로이 선교팀에 합류한 동료, 스테판. 그는 약속대로 선교사들에게 정보를 건네주기 위해 자신 속의 기억 자취를 더듬어갔다. 매듭처럼 칭칭 엉킨 복잡다단한 생각들을 한참 정리한 뒤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증거는 첫 번째처럼 그리 논리적이거나 변증법적인 증거는 아니오. 사실 반쯤 우연에 가깝게 얻은 요행이었소. 이 근거는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나의 기억 파편의 내용에 근거한 것이오.”
기이하게도 스테판은 본인이 태어난 일시, 장소, 자라난 배경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아주 작은 단서조차도 없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기억 상실이라고 치부하기에도 애매했다. 실제로 그의 서술을 듣자 하니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이나 정체성의 기억은 없었으나 그와는 다른 종류의 기억들이 희미하게 존재했다. 그런데 그 희미한 기억들이 융합된 패턴은 질서정연하다기보다는 모자이크를 연상시켰다.
“내 뇌리에는 숱한 각기 다른 세계들에서의 경험들이 공존하고 있소. 하지만 기억들이 시간 순서대로 배열된 것은 아니오. 그보다는 여러 세계에서 얻은 경험들을 병렬적으로 겹쳐져서 하나의 모자이크를 형성한 듯한 기억 패턴이오.”
예컨대 세계 1을 겪은 기억 뒤에 세계 2를 겪은 기억, 그 뒤에 세계 3의 기억이 시간순대로 연결되는 식의 일차원적 시간표가 기억 속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세계 1에서의 체험 기억 위에 세계 2, 3, 4에서의 기억이 무작위적으로 덧씌워짐으로써 생성된 뒤죽박죽인 혼합 양상의 기억이 새겨진 상태였다.
당연히 스테판 본인으로서는 어느 세계가 먼저 겪은 사건이고 어느 세계가 나중에 겪은 사건인지 파악할 길은 없었다. 심지어 어떤 세계에서의 기억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조차도 분별하기 어려웠다.
“더 신기한 점은……, 나는 내가 직접 몸으로 체험하지 않은 정보도 기억한다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특정한 세계들에 대한 비밀스러운 내막을 직접 보지도 않고 그저 저절로 아는, 그런 식으로 말이오.”
듣는 입장에서도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 난해한 진술이었다. 친구들과는 달리 윤혁에게는 미묘하게 짚이는 바가 있긴 했다. 그는 마치 정신과 의사가 내담자를 분석하듯 한 가지 진단을 추리하여 질문하였다.
“혹시 그런 기억은 꿈하고 관련된 것은 아니었는지요?”
윤혁은 이전에 이데아를 거쳐 시뮬레이션 우주들의 네트워크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곳들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여러 하늘도시의 정보까지 얻은 바 있었다. 체험으로 얻는 기억이나 타인의 체험을 투사한 간접 기억이 아닌 세계들의 내막과 내부 사정 그 자체까지도.
혹 스테판도 자신과 비슷한 경우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진에 의하면 주민들이 시뮬레이션 우주에 접속할 때는 꿈이라는 형태를 빌린다고 했으니 스테판도 모종의 꿈의 형태로 시뮬레이션 우주들과 접촉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충분히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꿈?”
그러나 질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스테판은 갸우뚱거렸다.
“흐음, 잘 모르겠소. 의심 가는 바는 몇 가지 있으나 그런 방식과는 전혀 달랐던 것 같기도 하오. 워낙 머릿속이 불투명한지라 지금으로서는 확언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소. 미안하게 되었소”
아쉽게도 이어지는 스테판의 진술을 듣고 보니 윤혁의 배경지식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듯했다. 어쨌건 분명한 것은 스테판이 기억하는 여러 세계의 정보들 가운데에는 그가 직접 체험한 일화뿐 아니라 해당 특정 세계의 본질과 관련된 구체적인 세계관적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다만, 워낙 여러 세계의 기억이 한꺼번에 겹쳐지는 통에 세계관적 정보의 90% 이상이 오염되거나 소실되어 드문드문한 파편으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미안하긴요. 그렇다면 의심 가는 바라는 건 뭐죠?”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나는 여러 차례 다양한 세계에 인위적으로 삽입되었던 듯하오. 그렇게 매번 특정 세계에 삽입될 때마다 그 세계를 관할하는 시스템들이 저장해둔 데이터가 내게로 흘러들어왔던 것은 아닌가 싶소. 외부의 이물질이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였겠지.”
인형 몸체를 빌려 세계 속에 진입하는 체험을 해봤던 리온과 루디아는 아주 조금 단서가 잡힐 듯 말 듯 한 감을 느꼈다. 윤혁으로서는 아직 공감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대신 그는 혹 스테판이 겪은 일이 현실인지 환각인지, 시뮬레이션 우주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신중히 재확인해보았다. 인간의 감각이란 워낙 주관적이니 자기 자신도 짐짓 속기 쉽지 않겠는가. 무례하게 비칠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검증은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세계관적인 정보를 얻은 경로는 스테판 씨도 기억이 불확실하다니 더 질문해도 의미는 없겠죠. 그렇다면 여러 세계에서 얻은 일화적 기억, 그것들은 정말 직접 몸으로 겪은 일이 확실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아하, 체험들 말이오? 그건 확실하오.”
“실례지만 어떠한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시죠?”
“뭐라 설명하기 어렵구려. 어머니 뱃속의 일들을 설명해달라는 질문만큼이나 어렵소. 비록 들어오고 나간 경로는 모르나 나는 실제로 그 세계들 내부에 존재했었소. 온전한 주민도 이방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이었지만 분명히 지금 당신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그때도 사람들과 마주하며 생활했었소.”
본인이 그렇다니 달리 따질 말은 없었다. 정말로 세계들을 들락날락했다는 그의 증언을 믿어주어야 하나? 사실 당장 본인들부터 그런 체험을 했으니 마냥 부정할 근거는 없었다. 기존 주민이 아닌 자를 하늘도시에 집어넣거나 빼내는 편법이 또 존재했던 걸까? 진의 도움으로 선교팀의 침입이 가능했듯 다른 조력자에게도 불가능하리라는 법은 없다.
윤혁은 다시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엇이 당신을 세계들 사이를 건너뛰도록 만들었죠?”
“출입하는 과정과 관련된 기억은 남아있지 않소. 마치 고의로 누군가가 그 데이터를 내 머릿속에서 도려낸 것처럼 말이오. 어쩌면 출입하는 과정에서 해당 세계가 빼앗긴 자신의 데이터를 나로부터 다시 회수했을지도 모르겠소. 그 과정에서 기억이 뒤섞여버린 것일 수도 있겠지.”
듣는 이의 처지에서는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난잡하게 널린 퍼즐 파편을 맞상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이 화제로 대화하기를 포기하려던 참에 스테판은 감춰두었던 놀라운 단서를 하나 더 말해주었다. 만일 이를 듣지 못하고 지나쳤더라면 실망했을 뻔했다.
“이 역시 명확하지는 않지만, 세계에 대한 기억과는 별개로 또 다른 일련의 기억이 떠오르오. 어떤 사람과 함께 했던 추억인데, 선명치는 않소. 세계에 삽입된 순간에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소. 하지만 세계에서 빠져나오면 다시금 그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었소.”
셋은 일제히 당황했다. 윤혁의 추리 회로는 맹렬히 회전했다. 역시인가? 누군지는 몰라도 스테판을 인위적으로 이곳저곳 옮겨준 외부의 존재가 존재한다. 그가 말하는 그녀란 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니 그 전에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을까? 스테판과는 무슨 관계이길래?
‘인류연합? 초인? 제3의 존재?’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라고 하셨나요?”
듣기만 하던 루디아가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조금 모순적으로 들리네요. 지금의 스테판 씨는 특정 세계 안에 계시죠. 세계 내부로 진입할 때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면서 어떻게 지금은 그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계세요?”
예리한 포착이었다.
“완전하게 지워지지는 않을 때도 있소. 사라진다기보다는 희미해진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최근에는 아주 조금씩 기억의 윤곽이 떠오르기도 하오. 어쨌건 지금은 그 존재가 여자인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소.”
사실 그가 각 하늘도시에서 얻은 사건 정보와 세계관 정보는 워낙 엉키고 겹쳐있었기에 또렷하게 나눠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스테판이 본인 스스로 뒤엉킨 기억 매듭의 실태를 조금이나마 인식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정표 덕택이 있었다. 그 이정표란 바로 ‘그녀’에 관한 회상이었다. 비록 희미해지고 지워지고 다시 솟아나는 순환을 반복하기는 했지만 그녀와 함께해왔던 시간은 내내 반영구적으로 무의식 가운데 각인되어 있었다.
스테판은 이어서 또 하나의 희미한 단서를 고백하였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그녀와 특별한 관계였던 것 같소. 이유는 모르겠으나 깊은 유대감의 흔적이 내 가슴에 새겨져 있소. 그녀는 나와 깊은 감정을 나누었을 것이오. 친구였거나 연인이었거나 아니면.”
잠깐의 뜸 들임에 궁금증에 빠진 일행은 숨을 죽였다.
“부부였거나. 아마 후자 쪽에 가장 가까울 것이오.”
모두의 얼굴에 충격이 스쳐 갔다. 이내 스테판은 저 자신도 혼란스러웠는지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좋은 기억이라기보다는 다소 복잡한 심경이 잔뜩 얽힌 추억인 듯했다.
“아, 괜히 말했군.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선교팀도 궁금했지만 더 질문을 이을 수 없었다. 이 이상 파고들면 그를 괴롭히는 격이 될 것 같았기에. 침묵과 함께 부담스러운 분위기가 잠시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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