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04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14. 객관적인 증거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8.03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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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너희는 정령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네?”
윤혁의 냉소적인 반말에 여성형 신상들이 발끈하며 몸을 떨었다. 원래 순례객은 마땅히 여신에게 경외감을 드러내며 그 권속들에게 존경심을 표출해야 하거늘. 하지만 윤혁은 긴장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존엄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라면 모를까, 만들어진 것들을 상대로는 존엄성을 인정해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기계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배운 교훈이 있지.’
이상을 일으키는 기계는 일단 두들겨 패는 것이 정답이다. 그 원리는 아마 저런 물건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리라. 컴퓨터는 고장 나면 초기화하는 게 옳고 인간을 내려다보는 우상들은 더 큰 권위로 찍어 누르는 게 옳다.
“너희도 내게서 이상한 기색이 느껴지지?”
여성 형체들과 수호 석상들이 윤혁의 패기에 긴장했다.
“너희에게 권위를 준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그자의 상관, 그리고 그 위의 상관까지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종적으로 한 사람이 나오겠지. 그런데 말이야, 유독 그 인간이 나하고 귀찮게 자주 얽히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너희도 나를 함부로 처분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 맞지?”
윤혁에게는 인류연합 지도자와 일부 겹치는 유전적 정보가 있다. 썩 내세우기에 기쁜 사실은 아니었으나 이 상황에서는 강력한 비수였다. 다만 궁금한 점은 하나 있었다. 똑같이 그 사실을 감지했을 때 정령들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거늘 카뮈네라의 신들의 권속들은 왜 대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일까? 정말로 거신 상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다 같이 유구무언이 되어 있었다.
‘정령하고 만들어진 신들이 각기 다른 시스템에 속해있어서 그럴까?’
전에 본 정령은 인간을 섬긴다기보다는 인간을 견제하고 입장에 가까워 보였다. 애초에 인류와의 경쟁을 목적으로 만든 종족 혹은 훈련을 위한 종족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카뮈네라의 신들은? 아마도 신앙심이라는 일종의 조건 반사 훈련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인류를 인류연합에 복속시키기 위해 만든 게 아닐까? 정답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윤혁이 추측하는 바는 이러하였다.
다만 그 만들어진 목적이나 운영 원리가 무엇이건 간에, 계속 관찰해본 결과 저 신상들은 윤혁 자신을 전혀 공격하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어쩌면 발걸음조차 막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 귀찮은 사람이 프리패스라는 것을 줬는데 말이야.”
목에 걸린 반지가 반짝 빛을 발하였다.
“인류가 세운 제국 내 어느 곳이든 들락거릴 수 있다던데.”
과연 그 빛이 단순 특수효과는 아니었는지 희미한 빛줄기가 닿자마자 수호자들이 가로막던 빛의 방벽이 갈라지면서 틈새가 열렸다. 공간이 열리는 연출로 보아 아공간 기술의 일종 같아 보였다.
“그게 여기도 적용되는지 궁금하네?”
예상했던 대로 그를 막으려던 수호 석상들은 꼼짝도 못 하고 옆으로 비켜났다.
“비켜.”
어안이 벙벙한 빛의 거인과 수호 석상들을 뒤로 한 채 윤혁은 느긋하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간 쌓였던 수모가 아주 조금은 풀렸다. 안에 들어가니 여러 색깔의 아공간들이 퍼즐처럼 짜인 듯한 풍경이 환히 펼쳐졌다. 그 연결된 패턴은 개미집을 연상시켰다. 각양 색상의 실을 이용해 짜낸 정교한 천과도 비슷해 보였다. 아공간끼리 연결되는 관절마다 관문이 있었고 거대한 수호자들이 각기 그 관문을 지키고 있었다. 각 통로의 양옆에는 수많은 거체들이 즐비해 대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아예 아공간을 오려 붙여서 신전 안쪽에 별천지를 지어놨네.’
윤혁은 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아무런 수고도 없이 관문들을 손쉽게 통과해버렸다. 스테판이 전에 아이코사헤드런의 미로를 지나기 위해 생사를 넘나들었던 것을 생각하자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편리한 기술이 있으면 활용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는 과감히 다음 단계로 진입했다.
“부탁할게, 비빅. 혹시 이곳 시스템에 접속해서 해킹할 수 있겠어?”
{지금의 제 사양으로는 무리입니다.}
윤혁은 잠시 고민하던 중 비빅이 대답했다.
{접속에 사용했던 그 반지를 빌려주시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혹한 윤혁은 다시 한번 신중하게 고민해보았다.
‘무리하게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정말로 가능하겠어?”
{시도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딱 한 번만 부탁해볼게. 죄다 흔들어놓을 필요는 없어. 그냥 어떤 시스템과 맞닿아있는지 작은 단서의 파편을 찾아주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승낙받은 비빅은 윤혁에게서 반지를 받아 입에 물었다. 잠시 후, 비빅의 기본 모드인 대형견의 형상이 변형되더니 기이하게 생긴 생명체의 형상이 되었다. 변형된 비빅의 몸체에서 수많은 빛의 가락들이 뿜어져 나와 주변 공간을 사정없이 찌르면서 침식하였다.
‘와, 이거 생각보다 일이 더 크게 전개되는걸.’
반지의 힘을 빌린 비빅의 해킹 모듈은 잘 짜인 네사르 성지의 내부 프로그램 소스 코드를 무참히 침공하였다. 해킹 침공은 이내 네사르 성지를 넘어 다른 공간으로까지 전파되었다. 열네 명의 대권능들의 성지가 네트워크를 통해 차례차례 연달아 해킹되었다. 이에 대권능들의 성지들을 주축으로 유지되었던 카뮈네라의 시스템에도 커다란 여파가 가해졌다. 윤혁은 이 사소한 행동이 어떤 나비효과를 낳을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
결과적으로 해킹 사건은 잠깐의 우발극으로 마무리되었다. 잠시 허를 찔리긴 했으나 상대측도 허술하지는 않았다. 침식을 눈치챈 카뮈네라의 시스템과 서버들이 곧바로 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비빅이 퍼뜨린 인공지능 바이러스들은 즉각 소거되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이 해프닝으로 인한 소소한 여파가 발생했다.
공중섬의 관할 구역에 놓인 지하 던전도 그 나비효과의 영향을 받았다. 때마침 스테판과 리온이 거닐던 중 대규모의 던전 예측 이변이 발생한 것은 바로 그 여파 때문이었다.
“이것 참 이상한 일이오. 한 번도 이런 오류가 없었건만.”
무사히 폭풍에서 벗어난 스테판은 일련의 사태를 보고 심히 당황하였다. 지금까지 카뮈네라에서 신들의 강림이나 거인의 폭주에 대한 예언은 한 차례도 틀린 일이 없었다. 외부에서 어떤 존재가 간섭하여 시스템 전체를 뒤흔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리온 당신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짐작이 가시오?”
“아니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몇 가지 의심 가는 정황은 있었다. 한창 잘 운영되는 세계 시스템에 이변을 초래할 만큼 강력한 능력이라면? 별도의 외부 개입이 없다는 가정하에 판단해보면 지금 들어온 외부인 중에서 그런 힘을 지닌 자는 하나뿐.
“모르긴 해도 누군가가 방해를 한 건 분명해 보이네요.”
나중에 말썽꾸러기 동료를 추궁해봐야겠다.
“당신도 외부의 존재가 간섭했다고 예상하시오?”
“예언이라는 것이 늘 그렇죠. 뭐. 예언이 항상 잘 맞아떨어지다 돌연 빗나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처음부터 완벽하게 짜진 각본이 있었는데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튀는 바람에 그 각본이 어그러지는 경우죠.”
그렇다.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된 그대로만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질서정연하게만 사건이 흘러간다면 누구든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시스템 전체를 관리하는 통제자의 입장이 되면 이 점을 활용해 얼마든지 예언을 빙자한 사기극을 벌일 수 있다. 마치 공중섬의 신들과 그들을 다스리는 시스템처럼. 그러나 통제의 틀에서 벗어난 힘이 단 한 방울만 튀면 철저히 계획된 질서는 한순간에 어그러지고 만다. 지금의 공중섬처럼 혼란에 휘말리게 된다.
“하여간 제대로 난리가 났네요.”
과연 예견했던 것과 다른 류의 마물과 거인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그것도 예상 순서와 다르게 튀어나오는 바람에 일대는 온통 혼란에 빠졌다. 허겁지겁 토속신이 하나 더 파견되었으나 거인 무리의 힘에 능수능란하게 대응하지는 못했다. 처음 예상했던 세력보다 강한 세력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전력 계산이 어긋난 것이다. 결국, 공중섬에서는 기존에 계획한 시간표를 깨트리고 더 강력한 신들을 허겁지겁 여러 명 파견했다.
인간들과 신들이 힘을 합친 끝에 가까스로 거인과 마물 세력을 봉인할 수 있었지만 피해는 막대했다. 민간인 사상자는 없었지만, 신들의 유명세는 심각하게 깎였다. 상성 예측에 실패한 적이 없던 덕에 지금껏 항상 압도적인 면만 보여주었건만 이번에는 허겁지겁 동분서주하는 허술함을 보였다. 게다가 추가 파병된 신들은 동면하던 중에 예상보다 일찍 깨어난 바람에 기력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자연히 크게 고전하면서 가까스로 이기는 망신살을 뻗쳤다.
“이제 사람들이 공중섬의 신들의 능력을 심각하게 의심하겠군요.”
“어차피 밝혀졌어야 할 거짓이었소.”
한 가지 의문이 리온의 머리를 스쳐 갔다.
“저 신들이란 건 대체 정체가 뭘까요? 인간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형태를 띤 무언가일까요? 그 어느 쪽도 아니면……, 지금 저처럼 인간이 다른 모듈이나 몸체를 빌린 것일까요?”
“그건 공중섬에 직접 쳐들어가 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요. 아이코사헤드런과는 달리 저곳은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곳이오.”
당장은 저 가짜 신들과 그 경배자들이 허둥대는 몰골을 보면서 그들의 불완전성과 한계를 간접적으로 눈치채는 일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리온은 이 정도 선에서 만족했다. 어차피 스테판의 학습을 돕기 위한 준비는 온전히 마련되었으니 주민들의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
“스테판 씨, 완벽한 예언을 해내는 존재가 있다면 그를 믿으시겠습니까?”
“완벽한 예언?”
“예, 만일 이 우주에서 오차 없이 미래를 완벽하게 예언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 있다면, 오로지 시간과 공간과 차원을 모두 초월한 궁극의 절대자, 곧 ‘유일신’뿐일 것입니다. 제 말이 논리적으로도 충분히 이해되시겠죠.”
스테판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벽한 예언을 위해서는 미래에 간섭을 일으킬 모든 변수를 완전히 통제해야만 한다. 하지만 시간 그 자체까지 포함하여 만물을 철저히 지배하기라도 하지 않는 한, 모든 변수를 완벽히 조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마치 제한된 세계 내에서나마 절대 주권에 근접한 권세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카뮈네라의 신들이 그 방증이었다. 외부 변수가 추가로 들어오자마자 그들의 예언과 계획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있다면 오직 하나뿐일 것입니다.”
“그렇소. 설령 가장 강한 존재라 해도 그와 비등하거나 버금가는 존재가 있다면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지도, 미래를 완전히 주관하지도 못할 것이오. 경쟁자와 겨루는 과정에서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빚어질 테니까.”
“네, 사실 저희가 믿는 유일신에게도 적대자들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탄 또는 마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신께 적대한다고는 해도 그분의 뜻을 훼손시키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그들도 일개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감히 그분께 비길 수 없는 하찮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모시는 신은 게임판 안에 갇힌 경기자가 아닌, 게임판을 소유한 관리자입니다.”
중요한 지적이었다. 만약 유일신과 동등한 레벨의 다른 유일신들이 존재한다면, 이를테면 평행세계 같은 것이 존재해 그곳마다 각각 주신이 존재한다면, 그들끼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칫 서로의 계획을 어그러뜨릴 위험도 있다. 이런 경우 신은 미래의 주관자라는 자격에 부합하지 못하게 된다. 예언을 예외나 오차 없이 성취할 수 있는 신이려면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단 하나의 궁극적 존재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아는 신은 모든 예언을 성취했단 말이오?”
“지금 제가 펼칠 책 속에 해답과 증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이 유일자께서 직접 인류에게 선물해주신 그분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당신도 곧 그 사실을 직시하게 될 겁니다.”
리온은 얇게 압축된 책 한 권을 펼쳐 보였다.
*
그 후로도 윤혁은 여러 성지를 공략했다. 그는 일부러 대권능의 성지에 해당하는 곳만 골라서 빠르고 짧게 치고 빠지는 전략을 취했다. 그가 성지에 침투해있는 동안에는 루디아가 근방 고을에 남아 선교를 하며 후방을 봐주었다.
종종 윤혁이 제집처럼 성지를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과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골치 아픈 일도 자주 생겼다. 어떤 때에는 대권능의 현신이 직접 강림했다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떠받드는 사람들도 나타났고 덕분에 해명하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물론 그와 반대로 신성모독자라는 욕과 저주의 말을 들으며 쫓겨난 일도 있었다.
“너무 위험한 게 아닐까?”
옆에서 함께 지켜보던 루디아는 왠지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라는 설명은 들었고 친구의 의도가 순수함을 알았기에 만류하지는 않았지만, 윤혁이 혹시라도 다칠까 봐 걱정되는 부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이 최대한의 단서를 얻을 기회인걸.”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과연 사람들이 거짓 신들을 버릴까?”
그 부분은 윤혁도 썩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나도 가능성이 희박한 건 알아. 그래도 이번 여행만으로 끝낼 건 아니잖아. 앞으로 우리가 방문할 다른 세계들도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마당인데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될 단서는 많이 쌓아둘수록 좋아.”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었다.
이후로도 침입은 거듭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혁은 많은 것을 관찰했다. 대권능들의 성지는 제각기 독특한 내부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특히 아공간들이 연결된 배치의 디자인은 매우 독특했는데 무언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빅은 반지의 힘을 빌려서 해킹으로 그런 류의 자료를 수집하였다. 매번 잠깐의 침투만 허용되었지만, 티끌만 한 데이터라도 축적하다 보니 큰 그림이 맞춰지며 갈피가 서서히 잡혀갔다.
“이제 조금만 더 얻으면 종합 자료가 도출되겠는걸.”
윤혁은 차츰 직감했다. 각 성지가 독립적인 구조물이 아닌,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아울러 그 유기적인 네트워크가 비단 성지와 신전뿐만 아니라 저 너머에 존재하는 상위 시스템과 맞닿아있다는 점도.
‘하늘도시 제어 시스템과 연결이라도 되어있는 걸까?’
여기서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원리를 밝힌다면 주민들이 통제를 당하는 방식도 대강 눈치챌 수 있을 텐데. 더 나아가 하늘도시들의 주민들을 속박하는 정신 간섭이 무엇인지도, 그것을 파훼할 방법에 대해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이 들자 고조되었다.
하지만 비빅이 모을 수 있는 해킹 데이터의 질과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각 성지에서 얻은 자료를 단순히 합산하는 것만으로는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웠다. 단서가 잡힐 듯 말 듯 한 애매한 상황이 지속되자 윤혁은 몹시 애가 탔다.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다행히 해킹의 성과와는 별도로 직접적 관찰로 깨닫게 된 바도 있었다. 윤혁은 여러 대권능 성지들에서 대권능의 권속과 군대의 모습을 구경하며 자연스레 어떤 패턴을 알게 되었다. 그 권속과 군대는 신전마다 모양과 구성이 다양했지만, 이상하리만큼 비슷한 보편적 공통점을 내포하였다. 지역마다 전승되는 신화 패턴에도, 각 신화의 중요한 상징 개념에도, 그 보편적 특성이 반복적으로 반영되었다. 비단 대권능들뿐만이 아니었다. 카뮈네라에서 신들이 인간들이 소통하는 각종 예배 방식의 형태에는 모종의 공통분모들이 있었다.
‘마치 표절이라도 한 것 같단 말이지.’
그러한 공통분모들에는 여러 요소가 포함되었으나 윤혁은 그중에서 고대 지구권의 신화들에서 발견되는 요소를 하나 찾아내었다. 어머니 신에 의해 잉태된 아들 신, 그리고 아들 신의 죽음과 부활. 놀랍게도 이 패턴이 카뮈네라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되었다. 어머니 신을 특정 여성 대권능으로, 아들 신을 특정 남성 대권능으로 치환한다면 정확히 똑같았다.
‘어머니와 아들 패턴이라.’
호루스와 이시스, 큐피드와 비너스, 담무스와 세미라미스, 바알과 아세라. 이들은 지구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아들-어머니 신화의 패턴이다. 왜 유독 이런 식의 신화가 많은 것인가? 혹자는 가톨릭교의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동시에 숭배하는 방식도 여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이를 빌미로 더 나아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이야기도 기존 설화를 모방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혁이 이해하는 관점은 달랐다.
‘당연히 비슷할 수밖에 없으려나.’
원시 복음(창 3:15). 뱀에게 선포된 심판.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 당사자인 뱀은 에덴동산에서 이 예언을 똑똑히 들었다. 그는 이것이 메시아에 관한 예언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메시아가 강림하여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된다면 뱀의 제국은 파멸. 그렇기에 사악한 옛 뱀은 사람들이 훗날 내려올 메시아를 믿지 못 하게 하고자 미리 선수를 쳤으리라.
어쩌면 그는 비슷한 가짜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냄으로써 복음을 조롱하고 오명으로 점철하고자 했으리라. 유독 집착적으로 ‘여인’과 ‘여인의 씨’라는 서사를 비틀어서 모든 신화 속에 집어넣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메시아가 실제로 내려와서 사역을 이루고 승천한 이후로도 이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겠지. 그랬으니 성모를 신격화함으로써 원시 복음의 본질을 호도했으리라.
‘여기까지 와서 이런 것들을 보자니 너무 역겹네.’
이에 윤혁은 가증스러움과 역겨움을 깊이 느끼며 혀를 찼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서둘러 카뮈네라의 가짜 신들에 대한 데이터를 더 확보해 확실한 물증을 얻어야 했다. 가짜 신들의 민낯을 만방 곡곡에 드러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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