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0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15. 주관적인 증거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8.09 | 회차평점 0 |
Chapter 15. 주관적인 증거
두 팀은 다시 교차점 부근의 도시에서 재회하였다. 리온과 스테판이 동행한 지 약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그들은 각자 거쳐 간 도시와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관해 보고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례에 대해서도 공유하였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해명이나 들어볼까?”
“저기 그러니까…….”
곧이어 곤혹의 시간이 찾아왔다. 대충 넘어가겠거니 하는 기대는 역시나 금물. 윤혁은 카뮈네라에서 자신이 독단적으로 벌였던 일들에 대해 낱낱이 리더 앞에 고해하여야 했다. 이교도 성지에 침투하여 그 내부에 연결된 아공간에 대놓고 쳐들어가서 신들의 권속과 수호자와 군대를 농락하고, 그 이면에 있는 네트워크에 접속해 정보를 빼낸 일까지 전부.
“하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너도 참 조심성이 없구나.”
“미안해.”
분명 그들은 지구를 떠나오기 전에 몇 가지를 약속했었다. 되도록 교파분열주의를 주입하지 말 것, 문화 간섭을 자제할 것, 오로지 순수한 복음 전파만을 목표로 삼을 것, 세속 세력과 가급적이면 충돌을 벌이지 않을 것. 윤혁의 단독 행동은 어찌 보면 마지막 약속을 어긴 것으로 여길 만했다.
‘하기야 워낙 잘못된 문화와 거짓된 세뇌가 판을 치는 세계이니 도의적인 입장에서 간섭하는 것이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지만.’
리온도 친구의 동기는 이해했다. 이곳 사람들이 도통 거짓 신들의 지배에 사로잡혀 진리를 찾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니 궁여지책으로 가짜 신들의 민낯을 드러내어 주민들의 그릇된 신앙을 깨트려보려는 의도였겠지. 선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임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위험한 행동이었어. 만약 가짜 신들과 충돌이라도 벌어졌으면 어떡할 뻔했어? 나야 여행만 중지되면 그만이지만 넌 진짜 몸이니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잖아.”
“조심할게.”
윤혁은 나름 양심에 찔려서인지 얌전히 충고를 귀담아들으며 두 손이 발이 되도록 사과했다. 단순 사태 수습을 위한 변명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는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루디아는 자신 때문에 윤혁이 곤란해하는 것을 보고 안절부절못한 눈초리를 지었다. 동료의 행각을 밝힌 사람은 의외로 루디아였다. 루디아는 윤혁이 벌인 개인행동에 대해서 숨기지 않았다. 다툼이 생길까 봐 숨길까도 생각해봤으나 그녀 역시 동료끼리는 서로 감추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믿었다. 예상대로 리온은 골머리를 썩이며 한숨을 실컷 내쉬게 되었다.
혼내고 질책하는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일행은 다시 한번 두 팀으로 나뉘어서 여행을 지속하였다. 이번에는 리온과 윤혁이 한 팀을, 그리고 스테판과 루디아가 하나의 팀을 이루었다. 쿠앤크와 비빅이 선발대를 보호했고 스크류는 후발대를 수호하였다.
상대 팀과 멀리 떨어진 이후에야 리온은 성지 탐색 문제를 재거론하였다. 윤혁은 꼼짝없이 자신이 벌였던 일의 전후 사정을 남김없이 밝혀야만 했다. 의외로 리온은 혼내면서도 그 계획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그 반짝하는 기색을 본 윤혁은 논리적으로 자기 논조를 풀어나갔다.
“당장은 인류연합과 카뮈네라의 신들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면 우리로서도 양심적으로 걸릴 게 없어. 정부를 공격한 일은 아닌 셈이니까. 만약 그러다 연루됨을 밝히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세상의 실태를 알게 되었으니 더욱 투명하게 진실을 알려야지.”
“…….”
“게다가 정부가 의도적으로 주민들을 속인 행동은 엄연히 잘못이지. 아무리 국가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힌 행동까지 동조해줄 수는 없잖아. 내 출신 국가도 식민지 시절 많은 그리스도인 출신 독립군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외세 정권에 맞서서 대항했었다고.”
하여간 언변 하나는 밀리지 않는 윤혁.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서 리온도 부정하지는 못했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자꾸만 세계정부의 계획과 충돌을 빚게 되는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나도 알아. 너를 무조건 질책만 하려는 게 아니잖아.”
“알고 있어. 걱정해주는 거.”
리온은 속으로 잠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그 뒤 친구의 의견에 대해서 깊이 숙고해보며 결론을 내렸다.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나름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정식적으로 도와줄게.”
“정말로?”
의외의 반응에 윤혁도 반가워했다.
“그래, 마무리는 지어야지. 엉망으로 끝낼 수는 없잖아.”
“고마워. 너밖에 없다.”
기뻐하는 윤혁에게 리온은 연이어서 질문했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총 몇 개의 성지를 둘러봤는데?”
“11개. 아직 세 개가 더 남았어.”
“뭔가 유의미한 데이터는 얻었고?”
“퍼즐들은 대강 맞춰지고 있지만, 해석하기는 일러. 뭔가 알아보려면 남은 곳들에서도 데이터를 추가로 얻어야 해. 그 전에 방해나 받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나저나 네 반지의 힘을 또 남용한 것은 아니겠지?”
예리한 질문에 다시금 윤혁은 대답을 머뭇거리며 쭈뼛거렸다. 해명하기 다소 곤란하고 모호했다. 반지의 힘을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비빅이 해킹을 시행할 때 접속 코드를 빌리긴 했으니까 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눈감아 줄게. 앞으로는 주의해줘.”
“……알겠어.”
“우선 세 성지부터 빠르게 수색하자. 나도 들여보내 줘.”
리온의 결정은 충동이나 혈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픈 것들이 있었다. 윤혁이 언급한 ‘어머니-아들 신 신화’ 패턴뿐만 아니라 지구 신화의 다른 패턴들도 숨어있으리라는 예감도 들었다.
윤혁도 내심 기대감을 품었다. 종교학에 박학다식한 리온이라면 저보다 더 많은 단서를 금세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비빅은 인공지능이라서 괜찮았지만 너는 인형의 몸이라지만 인간의 정신이 접속되어 있잖아. 그대로 통과할 수 있을까?”
“네 반지 속 코드의 복제본이 이 몸체에도 심겨 있잖아.”
“그야 그렇지만…….”
“실패하더라도 한 번 시도해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의외로 리온은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둘은 신속한 의견 합치를 보았고 결정을 내리기 무섭게 재빠르게 작전 수행을 개시하였다.
나흘간 여러 도시에서 전도 순례를 거친 윤혁과 리온은 대권능 중 하나인 ‘야타트하’라는 남신의 성지에 쳐들어갔다. 반지에 새겨진 코드 덕분에 출입 자체는 자동문 지나가는 듯 손쉬웠다. 전에 경험해보았던 윤혁에게는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리온은 아공간을 거니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다행히 인형에 내재된 특수 기능 덕에 손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매번 대권능의 성지에 들어올 때마다 개성이 돋보이는 공간 구조들을 보아왔지만, 야타트하 성지는 특별히 더 제작자의 창의력과 예술성이 두드러지는 곳이었다. 관문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중력의 발생 패턴이 미묘하게 달라지면서 프랙털 형상의 기하구조로 배열된 새 공간이 나타났다. 상하좌우가 시시각각 뒤집혔고 안팎의 경계도 허물어졌으며 작은 공간 안에 큰 공간이 들어있었고 거울상처럼 반복되는 공간도 나타났다.
성지 내부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야타트하의 권속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졌다. 속으로 윤혁은 저것들의 본질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반면 리온은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측면에 주목했다. 그는 성지 곳곳에 녹아있는 신화적인 요소들을 찾아서 일일이 머릿속에 메모하였다. 또한 전문가답게 거짓 신화의 내부 구조를 낱낱이 분석하였다.
“인간의 창의성이 발전하긴 했네. 구식 패턴에서 많이 벗어났어.”
나름 그는 칭찬과 비아냥거림을 반반 섞어서 평가했다.
“뭔가 좀 감 잡히는 게 있어?”
“조금은. 복잡하게 꼬여있긴 하는데, 네 말대로 이곳에도 지구 신화의 특징들이 제법 녹아있어. 이런 것들이 하늘도시 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인류연합과의 연결고리는 거의 확실해졌어.”
분석하는 그 모습은 고고학 전문가다워 보였다.
“그렇겠지? 내 생각에 저 권속 유닛들은 인공생명체 아니면 이종족 같아 보여. 도대체 어떻게 설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연적으로 현지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확실히 아니야. 신수처럼 인위적으로 조성되었거나 특수한 유형의 기계이거나, 혹은 확률실체화 기술 따위로 만든 것들이겠지.”
윤혁으로서는 저것들을 직접 잡아다가 해부해보지 못하는 현실이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다행히 꿩 대신 닭이라고, 대체할 만한 방안이 있었다. 강력한 지원군 겸 보수가 곁에 있었으니까.
“비빅, 지난번에 잘 해왔던 것처럼 조심히 내부 시스템에 침투해줘.”
{라져.}
“가급적이면 시스템을 흐트러뜨리지는 말고. 데이터와 물증만 캐낼 거야.”
{걱정하지 말아라.}
로봇은 다시 프로그램 침투 모듈을 준비하였다.
*
한편 스테판과 루디아는 함께 동쪽으로 거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 믿음이 온전하지 않았음에도 스테판은 배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품고 루디아의 전도를 곁에서 보조했다. 그들은 여러 마을과 도시를 거쳐 가면서 다양한 반응을 겪었다. 어떤 곳에서는 초장부터 불쾌하다는 눈초리를 받았고 다른 곳에서는 무관심한 반응, 또 다른 곳에서는 불친절한 반응을 보았다. 가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진리로 나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인내의 연속인 여정이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는 피곤과 고난도 동반되기 마련. 모든 이가 선하고 친절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런 이는 지극히 드물었다. 보통은 친절을 베풀어주어도 이유 없이 욕을 먹었으며 아무 잘못 없이도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다. 소매치기처럼 호의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도 드물지 않게 만났다. 인격 모독적인 욕설을 듣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러한 연단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스테판은 젊은 아가씨에게서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당신은 어떻게 아무에게도 미움을 품지 않을 수가 있소? 나는 나를 하대하거나 괴롭히는 원수는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소. 아니, 그럴 필요성조차 느껴본 적이 없단 말이오. 당신이 참 대단하게 느껴지오.”
옆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루디아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유형의 인물이었다. 본디 사람이란 지극히 사소한 공격만으로도 쉽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복수심을 품게 마련이다. 자기 잣대를 기준으로 남을 비판하는 것은 본래 인간의 뿌리 깊은 본성이니까. 가끔 그 본성을 억누르는 데 성공하는 독한 위인은 있지만, 깊은 내면의 쓴 뿌리로부터까지 자유로운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스테판이 보기에 루디아는 내면에서부터 그 조건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친절한 사람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보답하는 이들은 흔하디흔하오. 그보다는 훨씬 수가 적지만, 불쌍한 사람에게 연민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드물게는 있소. 하지만 괴이하거나 무례하거나 악한 사람에게조차도 사랑을 베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렵소.”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과 친절을 인간의 능력으로 품는다는 게 가능키나 한 걸까? 그런데 막상 또 이 아가씨를 보아하니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역설적인 느낌도 들었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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