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17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18. 인터미션 II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9.04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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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어서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히, 정직하게 고백하는 동시에 지혜롭게 처신하여 동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아울러 그는 이전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일련의 고백을 듣고 윤혁과 리온과 루디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작스러운 동역자 합류도 어쩔 줄 모르겠는데 마음과 뜻의 공유라니, 감당하기 벅찬 은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락해주시겠소?”
그는 조심스럽게 허락과 동의를 구하며 속으로 애를 태웠다.
“이건……, 저희도 기쁜 나머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해요. 주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우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하게도 스테판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비록 이제 막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새내기라고는 하나 스테판의 남다른 용기와 풍부한 모험 경험과 연륜은 일행에게 큰 신뢰와 위로가 되었다.
‘이제는 역전의 시작이야.’
수많은 폭풍우와 역풍을 겪고 감당한 끝에 마침내 한 줄기의 순풍을 잡은 듯한 기분이었다. 새 친구가 그들의 기대 이상의 멋진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보이리라는 희망 섞인 직감이 들었다.
*
동료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친구들을 잠시 뒤에 둔 채 윤혁은 몰래 폐쇄된 방에 들어갔다. 진과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텔레파시 신호에 응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불꽃 형질의 사람 모양이 다시 나타났다. 지난번 지구에서 보았던 것처럼 ‘태양의 영감’을 이용해서 실체화시킨 분신이었다.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연 윤혁.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죠.”
“아, 그리고 그 전에 먼저 질문드릴 게 있습니다. 카뮈네라의 가짜 신들을 한꺼번에 상대했던 그 불명의 존재……, 진 당신이 파견한 것 맞습니까?”
진의 불꽃 분신체는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그는 상대방의 가슴 부위를 콕콕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다소 무례함과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장난스러운 태도. 그러나 초인 특유의 드높은 격 때문인지 불쾌감보다는 위압감을 주었다.
“마침 이야기 잘 나왔군요.”
윤혁은 살짝 굳은 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그것 말입니다, 내가 당신을 구해주려고 벌인 일이었다는 사실은 알려나 모르겠습니다. 미련하게 사고나 치는 무모한 당신을 말입니다.”
“그게…….”
아마도 해킹 문제를 지적하는 듯했다. 말문이 막혔다.
“당신이 어리석게도 초인들의 시선을 잔뜩 끌 행동을 벌여준 통에 뒷수습하느라 바빴죠. 뭐, 제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요. 무분별하게 정의감만 갖고 덤비는 게 마음에 드는 면도 있지만, 뒤처리하는 사람도 좀 생각해줬으면 하군요.”
전적이 있는 윤혁으로선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잘 해결되었으니 표정 푸세요. 뭐, 어떤 의미에서는 크게 시선을 끌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지금은 겨우 시작 단계니까 몸을 사리는 게 좋겠죠?”
아이러니하게도 윤혁은 진의 말을 듣고 크게 반성했다. 확실히 저번에는 너무 정의감에 취해 앞서 나갔다. 하나님께 먼저 지혜를 구했어야 했는데 자신이 과했다. 결과적으로는 잘 풀렸다고는 해도 과정에 부끄러움이 있었다면 무슨 변명이 가능하겠는가.
“알겠습니다.”
이제 본론을 거론할 차례가 되었다.
“그나저나 진 당신은 스테판 씨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레귤러요? 아무래도 인류연합에 송부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제 예상이 맞다면 의심 가는 위험인물이 하나 얽혀있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덜컹 하는 심정이 가슴 위에 내려앉았다.
‘역시인가.’
윤혁은 긴장감을 감춘 채 태연스러운 자세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조심스레 거래를, 아니 부탁을 시도해보았다. 이대로 물러나자니 너무 아쉬웠다.
‘떼를 쓰기보다는 상대의 의중과 비위를 고려해야 해.’
물론 겸손함은 기본. 지금은 앞뒤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저희 여행이 끝날 동안만이라도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스테판 씨를 형이나 연합 측에 넘기는 것을 유보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제가 무릎 꿇고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동료가 위험에 빠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이미 진이 알아차린 부분이야 어찌할 도리가 없겠지만 최소한 일이 더 확대되기 전에 시간이라도 벌고 싶었다. 만약 이대로라면 스테판은 인류연합이나 초인들의 손에 체포되어 어떤 험난한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다. 그가 무슨 범죄를 범한 것도 아닌 데 본질이 특이하다는 이유로 수모를 당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음……, 당장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요. 뭐, 저로서도 제가 직접 분석하는 편이 좋긴 하죠. 괜히 다른 놈들이 냄새를 맡으면 저만 귀찮아지니까요.”
“정말입니까?”
의외의 순조로움에 표정이 밝아지려는 차에.
“하지만 맨입에는 어렵겠죠?”
역시 그런가? 윤혁은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것이 이치겠지.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차분히 답했다.
“주님의 뜻과 어긋나는 일만 아니라면……, 따르겠습니다.”
“호오.”
진은 바보 같을 정도로 신실하고 우직한 눈앞의 청년을 몹시 신기한 천연기념물 감상하는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속으로 웃었다. 역시 이래서 데리고 노는 맛이 있다니까. 바보 같은 삼촌.
“대가가 무엇입니까?”
“별건 아닙니다. 딱히 신념을 타협하실 필요도 없고요. 강윤혁 씨 당신이 아버지께 선물 받은 그 반지, 이번 여행을 마치는 동시에 그것을 잠시 받겠습니다.”
윤혁은 의아해했다.
“형의 선물을요? 저야 괜찮긴 한데, 왜죠?”
“제게는 생각보다 탐이 나는 막강한 잠재력의 물건이라서요. 아버지의 소유물과 지식은 기본적으로 저희의 것과는 급이 다르니까요. 물론 완전히 뺏지는 않겠습니다. 소유권이 당신에게 귀속되어 있으니 뺏으려 해도 소용없겠죠. 그저 대여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진은 그것으로 뭘 할 작정일까? 알 길이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윤혁은 얼떨결에 승낙했다. 어차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반지의 능력이 대단함은 알았으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내재된 덕에 아깝거나 미련이 가지는 않았다. 탐심을 깊이 알지 못하는 윤혁으로서는 의외로 이런 교활한 막후의 세상 물정을 영민하게 파악하는 일이 어려웠다.
윤혁은 이제 마지막으로 의문점을 파헤쳐보았다.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요.”
막상 꺼내려니 다소 꺼림칙한 기분이 스쳐 갔다.
“혹시 무덤 속의 영웅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습니까?”
“음, 카뮈네라라는 그 식민지의 ‘공동묘지’ 말입니까?”
미리 준비된 듯한 즉답. 역시 진은 전후 사정을 알고 있었구나. 윤혁은 대답을 기다리며 긴장했다. 진은 속으로 그 ‘ALERT 표시’를 상기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치부이긴 하지만, 어차피 진의 성격상 미련을 가질 일도 없으니 딱히 대답 못 해줄 이유도 없었다.
“정말 인간이었던 영웅들이 괴물화되기라도 한 건가요?”
“보통은 그것과 다른 원리를 사용합니다. 사람의 뇌 자체를 분자 단위로 그대로 본떠서 새 하드웨어에 탑재할 생체형 복제 인격을 제작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바이오닉 퍼스날리티(Bionic personality)’죠.”
“그럼 그 파생물들은 사람 그 자체는 아니라는 뜻인가요?”
“대부분은 그러나 일부 ‘죽음 직전에 이른 인간 개체’는 생체 보수로 재활용하기도 합니다. 내버려 두면 죽을 운명이라 소생시킬 겸 활용하는 셈이죠. 아시다시피 오늘날에는 사람의 인체를 새로운 생체 기계로 보수하는 기술은 딱히 새로운 것도 아니죠.”
역시나 실상은 가관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다녀온 그 하늘도시의 영웅들과 영웅 파생물들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기능과는 조금 다른 특이한 기능을 획득했습니다.”
아직도 놀랄 일은 더 남았다.
“그 기능이 뭡니까?”
“자율생식. 괴수화한 인간, 그리고 인간의 뇌를 복제해 만든 바이오닉 퍼스날리티, 이 두 부류와 거기서 나온 변형 분신에 생식 기능과 인공진화 기능을 부여한 거죠. 꽤 위험한 발상입니다. 인류연합 법에도 직접 저촉될 수 있고요.”
다시금 소름 끼치는 기분이 엄습했다.
“설마!”
“네, 과거 인류가 남긴 ‘실패작’들과 유사한 사례죠.”
여기서 진이 말하는 실패작이란 생체실험으로 만들어진 인공인간의 실패작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윤혁도 잘 아는 바이오닉 솔져들이 그 결과물의 예시였다. 그들은 그나마 좋은 결말을 맞이하여 멋지게 승화된 사례지만, 그렇지 못한 음지 밑의 희생양들이 실상은 훨씬 수가 많다고 했었다.
“그 악질 범죄의 잔여물은 대부분 폐기되었지만, 인류연합도 그 실험의 데이터만은 버리지는 않고 백업해두었죠. 모방 범죄를 막기 위해 되도록 묻어둔 채 다시 활용하지 않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건만……, 어디나 언제나 그렇듯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어기는 사람이라고?’
연합이나 그 수장이 직접 주도한 일은 아니란 뜻인가?
“혹시 누가 그런 짓을 벌였는지 말씀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흐음.”
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주의도 줄 겸 간단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여행하면서 경계해야 할 것이 많을 겁니다. 그중에서도 외부의 개입을 경계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특별히 위험한 요주인물이 둘 있습니다. 철인왕, 그러니까 제 형제이자 당신 조카가 되겠군요.”
이 나이에 건장한 조카라니, 몹시 어색한 표현이었다.
“농담할 계제가 아닙니다.”
진이 사뭇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중 장남과 막내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장남은 타고난 정치가인데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권한을 받아 하늘도시 곳곳을 누비며 활보하고 있습니다. 그와 척지거나 눈에 밟히는 사태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듣는 내내 불길한 감이 스쳤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막내는요?”
“그쪽은……, 큰 권한이나 권력은 없지만, 대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녀석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놈이죠. 저도 아버지를 견제하는 역할을 일부 맡고는 있다지만, 그 녀석은 아예 대놓고 사고 치는 것이 본 역할입니다.”
“사, 사고요?”
언뜻 듣기에도 섬뜩한 감이 드는 설명이었다.
“이번에 본 생체 실험 결과물들과 연루된 자가 그인가요?”
“거의 확실합니다. 아마 그가 벌이는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당신네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인륜을 초월하는 정신 나간 짓들일 것입니다.”
진은 혹시라도 윤혁 일행이 여행 도중 이상한 것과 마주한다면 십중팔구는 그자의 소행이거나 그자의 영향력이 닿은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다면서 보장까지 했다. 윤혁은 불안감을 삼켰다. 부디 그런 자와 연루되거나 맞상대하는 날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며 속으로 기도했다. 무책임한 회피라 할지라도 그런 꺼림칙함과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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