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20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19. 히어로즈 II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9.11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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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은 자신이 소유한 시뮬레이션 우주 내부 시공간의 한복판에 앉은 채 히어로 조직을 제어하는 ‘헌터 네트워크’를 점검하였다. 현실 세계에서 히어로들을 훈련하고 조직하는 주체가 크리슈나라면, 후방에서 히어로즈라는 집단을 만들어나가는 원동력은 바로 이 헌터 네트워크에 있었다. 더 정확히는 그것의 생성자이자 경영자인 성운에게 있었다.
“첫 시작은 나쁘지 않아.”
그는 흡족해하지도, 만족하지도 않은 채로 평했다.
“슬슬 다음 단계로 올려도 되겠어.”
이제 계획대로 강한 힘을 가진 전직 솔져에 이어 새로운 배우들을 추가로 끼워 넣을 차례가 이르렀다. 우주 출신이 아닌, 일반 지구 시민 중에서 특별히 투철한 정의관과 희생정신을 가진 사람들, 그들을 통해 가진 건 무력뿐인 솔져 출신 히어로들을 각성시킬 차례다. 그는 소방관들을 비롯한 희생정신 투철한 일상 속 영웅들의 프로파일을 하나하나 살폈다.
파지지직.
그때 시뮬레이션 우주의 배경 공간이 찢어지면서 불청객들이 난입했다. 성운과 동격인 존재들인 로스트엠페러들이 찾아왔다. 개인적인 영역에 침입한 것을 보아 우호적인 목적으로 예상되지는 않았다.
“끝내 중립을 지킬 줄 알았건만 생각 외의 반응이었군.”
남부 섹터의 지배자이자 아프리카의 검은 사자인 쿠에시가 강경한 근육질의 거구를 드러냈다. 표정은 너그럽게 웃고 있었지만, 내뿜는 살기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좋은 체격의 성운마저도 순간적으로 움찔하였다.
“난 네가 맘에 들지만, 정면 승부를 원한다면 언제든 환영이야.”
사랑 고백인지 전쟁 선언인지 분간이 어려운 말을 내뱉으며 ‘교역 연합’을 통제하는 미녀, 남미의 마리아 살바도르가 출현했다. 성운을 바라보는 그 그윽한 눈빛에 성운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개인적인 친분과는 별개로 냉전 개입에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수반될 수밖에 없나 보다.
“역시 기대 이상이야, 친구.”
북미를 소유한 인디언 청년, 태양을 삼키는 늑대는 성운을 향해 적대감 없이 순수하게 칭찬의 말만을 꺼냈다. 애초에 그가 맡은 사업은 초 군집형 생체병기를 제작하는 것이었는데 생체병기란 본래 함부로 세상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것, 따라서 그는 이번 냉전에는 적극적인 참여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마당이라 동료 중 누가 경쟁에서 앞서 나가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운 변수를 곁에서 보며 즐길 뿐.
그러나 조금 더 격하게 반응하는 이도 있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겠어.”
이번에 들려온 냉담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척 보기에도 귀족적인 아우라가 물씬 느껴지는 냉미남이었다. 백금발과 적안과 흰 피부를 지닌 화려한 남자. 브리타니아 연합의 수장이 성운을 무거운 눈빛으로 지긋이 쳐다보았다.
“일라이저 씨.”
“왜 움직인 거지?”
힐난에 가까운 심문.
“이번 일이 비단 지구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알 텐데.”
“뭔가를 오해하고 있군요.”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 성운의 지적에 일라이저가 멈칫했다.
“당신들이 인간을 수호하는 입장을 저버리고 그저 권세 다툼에 몰두하고 있으니 제가 선역을 대신 맡아드리는 것뿐입니다. 민간인은 냉전 판도의 컨트롤 타워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역할이니, 어느 한 명은 그들 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득은 안 되더라도 말이죠.”
일라이저는 그 청산유수에 냉소로 반응했다.
“위선적이군. 네 그 태도도 연기일 뿐이겠지.”
이에 성운도 씩 웃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어차피 냉전 모드란 것 자체도 진짜 싸움이 아니라 민방위 훈련이잖습니까. 그러니 저도 시민의 수호자로서 가짜 영웅 놀이를 즐겨 볼 자격은 있죠. 물론…….”
성운은 점잖은 평소 성격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 와중에 부산물 경쟁에도 좀 참여할 겸 말이죠.”
여기서 그가 말한 부산물 경쟁이란 과학 기술 경쟁. 지금 성운의 노골적 선포는 로스트엠페러들이 발명하고 양산한 각종 이종족과 사병 군단을 해부해서 자신의 탈취물을 취하겠노라는 선언인 셈이었다. 엠페러들은 흥미진진해 하는 얼굴이 되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지루한 인생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쾌감이었다.
“뭘 꾸미는 거지? 진짜 속내를 말해보시지.”
일라이저가 태연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그걸 캐묻는 것은 월권입니다.”
“월권?”
“히어로즈 제도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은 제가 아니라 보스니까요.”
“주군께서? 핑계 한 번 잘도 대는군.”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카이젤의 이름이 언급되자 경쟁심으로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찬물 끼얹은 듯 한켠 가라앉았다. 원래 승냥이끼리의 싸움에서는 호랑이의 명성을 팔아 기선 제압을 하는 것이 효율 만점인 법이다.
“그나저나 지구의 히어로즈 따위를 신경 쓸 여유는 없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이번에는 쿠에시가 반문했으나 성운은 그저 웃기만 했다.
‘시선을 위쪽으로 돌려야 할 텐데 말이지.’
로스트엠페러들 같은 최상위 초인들의 진정한 자산 대부분은 지구 내부가 아닌 바깥에 있었다. 사실 인류가 은하계를 이미 정복하여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시대인만큼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천체 자체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인류연합 대표에게 있었지만, 부분적이나마 부하들에게 대여권이 허락된 재산들은 꽤 있었다. 이를테면 자원 행성과 자원 항성의 일부 영역의 권한, 제작 특허권으로 인해 보상으로 허락된 일부 이종족의 제어권, 그리고 우주에서 퍼낸 방대한 에너지와 특수 자원 같은 것들 말이다.
자연히 우리 은하와 그 너머를 정복하면서 인류가 획득한 방대한 부의 파이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눈치싸움이 엠페러들과 철인왕들을 비롯한 최상위 초인들 사이에서 펼쳐지곤 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 과열되어 왔다.
냉전과 같은 이벤트는 종종 지구 내에서의 제한적인 패권 경쟁을 넘어 우주적인 재산 경쟁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지구에서 벌어지는 냉전은 에녹 아담즈 인류연합 부대표의 조율을 거쳐 우주적 규모의 냉전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지구 내의 싸움이 그림자라면 본체는 우주에서의 경쟁.
‘즉, 이번 경쟁에서 놓쳐서 안 될, 필히 신경써야 할 부분은 그쪽이지.’
그는 이번 경쟁에 뛰어듦으로써 단순히 재미만을 보거나 제한된 무대에서의 승부욕 충족만을 누리고 끝낼 생각이 없었다. 지상에서의 시합에서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수익인 우주적 자산을 증대할 생각이었다. 히어로즈 계획은 그저 이 원대한 사업 계획을 위한 첫 단추였다.
‘여기에 그분의 신뢰까지 확고히 다지면 금상첨화.’
이번 계획에 있어서 성운이 부수입으로 기대한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이는 사실 카이젤에게도 나름 이익이 되는 요소로 휴먼 솔져 군대의 진보와 관련된 것이었다. 원리는 다음과 같았다. 지구 내에서 히어로들이 냉전에 참여하여 맹활약을 펼치면서 몬스터를 제압하면 그 전투 기록은 곧 데이터로 환산되어 휴먼 솔져 시스템의 개량에 직결로 투입된다. 원리 자체는 단순했으나 대단히 복잡다단한 연산이 투입되는 프로세스였다.
“간만에 성운이 쓸만한 아이디어를 냈군.”
그 시각, 카이젤도 제로원 본부에 앉아서 휴먼 솔져 시스템의 실시간 개선 과정을 제 눈으로 확인하였다. 과연 창의적인 전술 운용 측면에서 이전보다 눈부신 발전이 돋보였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소수의 인원인 휴먼 솔져만으로도 최근 생산 과다로 인하여 개체 수효가 폭증해버린 이종족과 기계들을 견제하여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자연히 이러한 솔져 체제 강화는 우주 패권 경쟁에서 비정규 군대인 이종족 쪽의 열세로 직결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이종족 중 일부를 사병으로 부려서 여러 자원 행성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사업을 진행 중인 엠페러들의 위세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성운으로서는 자신의 보스도 돕고 다른 부관들이 과도한 권세를 부리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데도 성공한 셈이었다.
“보스께 충성한 대가로 이익을 톡톡히 보겠군.”
이제 성운도 은밀한 잠행을 그만두고 본격적 활동을 개시할 때가 되었다. 히어로즈 계획과 더불어서 그사이에 그는 지구 밖에서 잠정 활동 중인 자기 소유의 기업 100여 개를 활성화해 가동한 참이었다. 지구에 심어놓은 Another World는 그저 얼굴마담일 뿐, 진정한 성운의 권력은 그 기업들이었다. 냉전이 안팎으로 거세지는 지금에 와서 그것들을 움직인 이유는 조만간 도래할 대우주 거주 시대를 위한 준비를 깔아둘 필요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큰 그림까지 모두 고려해서 히어로즈 플랜을 세운 성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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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군대가 더욱 강화되었군.”
유성운이 쏘아 올린 작은 공, 그것의 여파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자는 비단 카이젤만이 아니었다. 인류연합 정규 군대인 휴먼 솔져 시스템이 더욱 강력하게 진화했으니 마땅히 그에 발맞춰 균형을 맞추기 위해 비정규 군대를 진보시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위버멘쉬의 장단에 적당히 맞춰줘야겠어. 구색 정도는 취해야지.”
흑요석처럼 짙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우수가 깃든 투명한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를 보유한 장신의 남자. 그는 거대한 우주 요새 한가운데의 사령탑에 앉은 채 프로그램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고지식해 보이는 인상, 질서와 법칙의 수호자일 것 같은 이미지, 그는 2대째 위버멘쉬의 유일한 친자식이자 인류연합의 2인자인 에녹 아담즈였다.
에녹은 본격적으로 냉전의 기류 변화에 대응을 취할 채비를 하였다. 제한된 혼자만의 힘으로는 일일이 우주 내 모든 이종족 세력의 확장과 제어를 맡아 처리하는 게 힘들었기에 조율 프로그램 TUNER을 개발했건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개선으로 더욱 강해진 솔져들, 그리고 그에 발맞춰 고속으로 진화한 기계들과 더불어 세력 경쟁을 하려니 이종족들의 현재 진보 속도로는 무리인 모양새가 역력했다.
“TUNER를 2단계로, 트리니티 모드로 업그레이드시킨다.”
판단을 내린 에녹은 능숙한 뇌파 제어 솜씨로 수뇌 프로그램을 조정하였다. 그의 정신적 손짓이 자아내는 자태는 마치 천재 해커 같기도 했고, 아름다운 선율을 조정하는 오케스트라 단장 같기도 했다. 이에 반응하여 정교한 자연법칙을 연상시키듯 잘 짜인 프로그램인 TUNER가 고도의 개변을 개시했다. 현 수준에 만족하지 못한 부대표가 드디어 TUNER를 한 단계 더 나아간 ‘금기된 힘의 영역’으로까지 도약시켰다.
“먼저, 이종족의 군집적 정신, 초합체적 자아, 포괄적 정보공유 체계, 범 차원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관장할 첫 번째 축부터 시작이다.”
범 종족적 정신 제어 및 생성 프로그램, FREUD.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이종족의 다양성 분화, 생식, 유전적 우수성 개조 및 유전자 풀 보강을 지휘하고 감독할 또 하나의 축을 설정한다.”
종족 다양성 및 재생산력 강화 프로그램, DARWIN.
“마지막으로 이종족들로 하여금 은하계의 자원을 자율적으로 채취하고 배분하도록 하는 공급 지휘 시스템.”
자원 천체의 검색과 정복, 그리고 자원 자율 생성을 돕는 프로그램, MARX.
“이것까지 더하면 비로소 불경의 삼각형 완성이군.”
에녹은 FREUD, DARWIN, MARX, 이 세 축의 프로그램을 세 기둥으로 첨가함으로써 TUNER의 2단계 모드를 발동했다. 새로운 도약의 산물, 이른바 악명 높은 블라스핌 트라이앵글(Blaspheme Triangle, 불경의 삼각형). 과거 인류가 낳은 악하고 우매한 유산을 역설적으로, 풍자적으로 재활용함으로써 에녹은 이종족 조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유물론과 무신 진화론과 정신분석학……, 인류를 어리석고 비참하게 만들었던 썩은 철학을 역이용함으로써 인간 이외의 이종족들을 세뇌하고 제어한다니, 참 아이러니군. 우리도 비참한 속박의 굴레를 우리 노예에게 대물림하는 건가. 착취의 연쇄는 변함이 없군.”
탄식하는 것인지, 자축하는 것인지, 에녹은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의 작은 씨앗은 싹을 틔웠다. 에녹이 오랫동안 기획했던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실현되어 가동되자 그 여파는 실시간 동기화를 통해 은하 전역에 닿았다.
이에 반응하여 TUNER의 아바타 중 은하계를 떠돌던 다섯 기가 실체화되었다. 반-소프트웨어 상태에 가까운 존재 양태를 지녔던 그것들은 이제 하드웨어 상태로 실체화되었다. 나아가 하나씩의 머리만 지녔던 각 아바타의 정수리에서 세 개의 머리가 각각 자라났다. 그들은 지옥견 케르베로스와 같은 삼두의 괴물로 재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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