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22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0. 다양한 성(性)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9.16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계속)
다이버스트 여행 1주 차가 돼서야 일행은 무언가가 심각히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그들은 그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수소문하였다.
참고로 전에 언급만 되었던 스테판의 ‘세계관 지식 흡수’는 작동하지 않았기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는 넷이 함께 움직인 다섯 번의 세계 방문 모두를 통틀어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그를 옮겨주었다던 ‘그녀’가 쓴 밀입 방식이 아니라면 세계관 지식 흡수가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알즈바툴의 세계관 기틀을 파악하려면 원시적인 단순 노동 조사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두 팀이 발로 뛰면서 모은 정보들을 종합해본 결과, 알즈바툴 대륙의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났다. 그 비밀은 성의 기원(Origin of sex)이라는 개념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알즈바툴의 세계관에는 놀랍게도 자연적인 암수 개념 이외에도 별개의 유형의 성별이 여럿 존재했다.
바쁜 전도 일정 가운데 이런 불미스러운 내용을 파악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애초에 일일이 주민들의 성생활을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주민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방인에게 낯선 용어들이 튀어나오기 마련. 그 용어 중 적지 않은 수가 제3, 제4 성별과 관련된 생물학 용어였다. 끝내 선교팀은 불미스러운 비밀에 대해 꼬리를 잡고야 말았다.
“처음 그것을 알았을 때는 머리가 아찔했었죠.”
먼 훗날, 이 지역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며 네 친구는 하나같이 이렇게 답변했다. 이는 결코 ‘다양성’이나 ‘관용’, 혹은 ‘열린 사고’ 따위의 허울 좋은 용어로 변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알즈바툴이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실태를 발견하자마자 창조 질서에 충실했던 선교사들은 옛 구약시대 믿음의 조상들처럼 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뿌리는 심정이 되어 탄식했다.
“참아.”
“우리 눈으로 이런 악을 뻔히 보고도 진정할 수 있을까?”
“나도 이해해. 하지만 때가 일러.”
윤혁이 가까스로 리온을 다독였다. 그도 심정은 이해했다. 어찌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제멋대로 결혼과 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가. 그것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창조하신 발명품인 성을. 과거에는 그저 행위로만 그 질서를 모욕했다면 이제는 생명공학의 힘이 첨가되어 참담해도 몇천 배는 더 참담한 현실이 빚어졌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잘 들어줘. 이들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알아야 할 게 있어.”
고백하기에 적기라고 판단된 윤혁은 리온에 더해 스테판과 루디아까지 함께 불러 모아 주의사항을 전했다. 진이 언급했던 자, 막내 철인왕이라고 불렸던 그자,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 온갖 형태로 교만하고 죄악 된 프로젝트들을 시행하는 사악한 천재. 그에 대해 경고한 뒤 장차 종종 그의 걸작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나도 왜 그자가 이런 장난들을 치는지, 그리고 형이 왜 이를 묵인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게 지금 당장 우리가 맞닥트려야 할 현실이야. 어쩌면 적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위협적이고 강력할 거야.”
순탄치 않을 줄은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선교의 길. 하지만 불편감이나 용기의 부족과는 별개로 ‘사람들을 꾸짖고 올바르게 책망하라’라는 성령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그들을 독촉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고난과 역경의 길로 접어들 기미가 보였다.
*
한 민족이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일은 드물게나마 있다. 그런데 한 대륙에 열 개의 축으로 카테고리화된 수천 개 이상의 ‘성별’이 존재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생체 조작을 하지 않은 이상 말이다. 알즈바툴 대륙은 그러한 엽기적인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을 실제 생물학적 성으로까지 발현시켜 놓은 세계였다.
이러한 이상한 성별 시스템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현지인들의 연구나 관찰로는 파악된 바가 없었다. 기원을 따라 거슬러 가면 현지 달력으로 수백 년 내지는 수천 년 전의 비밀스러운 일일 테니 어찌 파악하겠는가. 원래부터 인간이 그렇게 창조된 것인지, 어쩌다 잘 진화해서 획득한 형질인지, 아니면 음모로 인해서 그렇게 변질한 것인지, 알즈바툴 사람들로서는 해답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는 개의치 않았다. 이상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랴. 아니 이상하다는 인식도 없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이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기고 다양성이라는 미명하에 받아들였다. 본인들도 약간씩 본능적인 꺼림칙함 내지는 거부감을 느끼긴 했으나 이내 양심의 모서리는 무뎌지고 현실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현상은 합리화되었다.
알즈바툴의 열 개의 성 축 중 첫 번째 축은 지구 인류에게도 있는 자연적인 성별, 곧 ‘남성(Male)과 여성(Female)’ 축이었다. 외형적인 구분으로나 외생식기의 기능으로나 남녀 축(Axis)이 가장 주가 되는 성별 축이었다. 여기에만큼은 주민들도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알즈바툴 주민들에게는 다른 생식 축이 아홉 개나 더 있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자신의 성별을 표현할 때는 남녀 축까지 총 열 개의 축에 대해 각각 어떤 좌표를 띤 성별인지를 나타내야 했다.
마치 10차원의 벡터 좌표를 표현할 때 (1, 3, 2, 4, 5, 6, 7, 8, 9, 1)의 예시처럼 열 개의 숫자를 나열해야만 하듯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개념상으론 두 개의 성이 아닌 최소 1,024개 이상의 성이 존재하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 추가 성별 축 중 일곱은 대부분 사람에게는 디폴트(Default, 값 자체가 없음) 값으로 발현되었다. 사실상 해당 축은 대부분의 이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나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다. 극소수의 사람만 일곱 개 축에 대해 디폴트 이외의 고유 성별 값을 지녔다. 그런 경우에는 성관계 문제가 매우 복잡해졌다. 해당되는 이들은 대개 성 소수자로 여겨졌다.
그런데 나머지 두 개의 성별 축은 도무지 통계학적으로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유의미한 성별을 지닌 인구가 꽤 많았던 탓이다. 알즈바툴의 성 문화를 결정적으로 어지럽힌 혼돈의 주범은 바로 이 두 축으로 이른바 ‘Α-Ω 축’과 ‘수문장-인도자’ 축이었다.
먼저 Α-Ω 축. 알즈바툴의 인간에게는 특이하게도 남자이냐 여자이냐 여부 이외에도 ‘α이냐 β이냐 Ω이냐’의 여부가 부여되었다. 다수의 주민은 이 축을 기준으로 β로 분류되었는데 이들은 일반적인 남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일부 인간은 탁월한 신체적 능력, 탁월한 뇌 효율성과 더불어 ‘외현 호르몬’이라는 특수 입자를 생성하여 상대와 소통하는 능력을 소유했으니 학계에서는 이들을 두고 α(알파)라는 성별로 지칭하였다. 또한 흥미롭게도 외현 호르몬을 체외로 방출할 수 있는 또 다른 성별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Ω(오메가)였다. 이들에게는 기존 성별에는 없던 몇 가지 추가 특징이 있었다.
놀랍게도 한 α 개체와 한 Ω 개체가 만나면 둘 사이에서는 생식 성립이 가능했다. 이는 심지어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의 결합이라 해도 생식이 이뤄진다는 뜻이었다. 깊은 진실 여부는 불투명해도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것이 사실인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들의 역사 속에서 α와 Ω 개체의 재생산 프로세스가 일어났고 후손도 빈번히 등장하여 족보에 이름을 남겼으니까.
어찌하여 그런 괴이한 일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했다. 주류의 의견은 ‘어떤 외계의 존재’가 실험을 통해 인간의 기존 생식 기관 외에 인위적인 인공 생식 기관을 이식하였고 그 뒤 특수 재생산이 가능하도록, 즉 수정된 후손 개체를 몸속에서 키워낼 수 있도록 신체 구조도 변형시켰거나 인공 양육 장치를 이식했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의견에 불과했고 그 외에도 온갖 가설이 난무했다.
여하튼 원리는 그야말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어떻게 기존 성별, 즉 남녀 축 체계 내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일, 이를테면 남성이 난자를 생성하고 여성이 정자를 생성하는 현상이 발생한단 말인가. 각종 과학적 논란이 일었으나 이 부분 역시 탁월한 생명공학 기술을 지닌 외계의 존재들이 생식선에서 만들어진 생식 세포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생체 기계를 사람들 몸속에다 심었다는 식의 의견으로 어영부영 설명되었다.
도덕적인 차원에서는 경악하긴 했으나 선교팀은 이러한 기술력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리 의심하지 않았다. 현시대의 첨단 기술력까지 갈 것도 없이 지난 세기에만 해도 이미 인간 복제를 위한 체세포 복제 기술은 있었다. 더 나아가 유전자 발현 조작을 통해 남성이나 여성의 일반 세포를 역분화시켜 줄기세포를 얻은 뒤 난자나 정자 중 임의의 것으로 분화시키는 기술력도 존재했다. 법적인 제재 때문에 제약을 많이 받았을 뿐. 특히 바이오닉 솔져의 존재와 그 실태를 두 눈으로 보았던 윤혁은 저러한 흉악무도한 일들이 실제 현실에서도 능히 가능하고도 남음을 알았다.
그러나 지식적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별개로 치가 떨리며 소름이 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약 없는 과학의 폭주가 얼마나 살 떨리는 공포를 자아낼 수 있는지 이번 기회에 그들은 피부로 체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주민들은 이러한 다축 성별은 그저 원래부터 존재했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노라고 여기며 쾌락의 문화에 몸을 맡겼다. 정작 학계의 주류 의견은 다중 성별 축의 인위적 기원을 지적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특수 성별 축도 자연의 섭리일 뿐이며 자신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기에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외쳤다. 오직 남녀 성별 축만이 자연스러운 자연 질서에 기반한 원본이므로 그것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히 일부의 양심적인 목소리는 대세에 파묻혔다.
한편 남녀 이외의 인위적 성축에서의 개체 간 생식 가능성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외현 호르몬의 존재 역시 만만찮은 신비였다. 알즈바툴의 과학자들은 소위 호르몬이라고는 불리지만 실제 분자 구조는 유기체와 전혀 다른 이 물질의 기원을 깨닫지 못했다.
정설로 알려진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외현 호르몬의 발현 강도와 질에 따라서 같은 α, Ω 내에서도 등급이 나누어진다는 점, 같은 α-Ω 축 성별 내에서는 상위 등급이 하위 등급을 외현 호르몬을 매개로 위압감으로 지배한다는 점, 다른 성별의 개체 사이에서는 외현 호르몬의 상호작용이 정욕을 유발하며 α나 Ω의 등급이 높을수록 그 매혹력이 강하다는 점, 그리고 일반적인 여성의 생리 주기마냥 외현 호르몬의 발현도 일정 생체 주기를 띤다는 점 정도였다.
양심적인 학자들 중 몇은 외현 호르몬 또한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외계인 내지는 다른 외계 존재의 악의적인 장난으로 인해 야기된 부자연스러운 인체 이식 현상임을 주장하며 이를 공개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의 학설은 금세 묵살되었고 대부분의 일반인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즐거우면 그만 아닙니까.”
“그저 태어난 그대로 삽시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특성을 부끄러이 여기지 맙시다.”
실상을 객관적으로 아는 외부인들 입장에서 보면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알즈바툴의 주민들은 이미 마음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었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답 이외의 것을 들을 기미가 없었다.
한편 그 세계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수 성별 축이 있었으니 바로 소위 ‘수문장-인도자’ 축이었다. 이 성축은 비정상적인 생식 가능성보다는 자유의지를 짓누르는 불가항력적인 성욕이 주가 되는 속성으로 선교사들이 보기에는 어떤 의미에서 α-Ω 축보다 훨씬 더 음란한 것이었다.
일명 ‘수문장(Sentinel)’이라고 불리는 부류의 인간 개체들의 체내에는 알즈바툴의 과학이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특수 에너지가 들어있었다. 그 덕에 그들은 이능력에 근접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 특수 에너지는 특성상 쉬이 불안정해졌기에 주기적인 신체접촉을 통한 안정화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수문장의 특수 에너지의 안정화는 아무나와의 스킨십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오로지 ‘인도자(Guide)’라 불리는 카운터 성별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인도자의 체내에는 수문장의 특수 에너지를 안정화하는 일종의 상동 에너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신체접촉과 애착 행위도 안정화에 도움을 주었지만, 최고의 방법은 성적인 접촉을 통한 안정화였다. 특이하게도, 피부 병변을 긁으면 긁을수록 더 가려워지듯, 한 번 수문장과 인도자가 안정화를 위해 관계를 맺으면 감정적 집착과 금단 증상이 장기적으로는 더 심해졌다. 한 번 밀월 관계가 형성된 후 주기적으로 더욱 격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폭주 위험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결국, 수문장들과 인도자들은 서로를 탐닉하는 성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렇듯 부자연스러운 성별이 버젓이 실재하는 세계였으니 온갖 성적 남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치였다. 문화적 문란함은 차치하고 가장 기본적인 상식에서마저 정체성 혼란이 범람했다.
가령 처음에 α 남성과 Ω 남성이 사랑을 나눈다고 하자. 알즈바툴의 문화는 α와 Ω의 결합이니 같은 남자인 부분은 상관없다 주장할 것이다. 어차피 버젓이 인정되는 제2의 성별 축이며 자녀 생산도 가능하니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한 번 동일 성별 간 결합이 허용되면, 나중에는 α 남성과 α 남성의 결합에 대해서도 반대할 근거가 없어진다. 마치 댐이 허물어지듯 파죽지세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혼란이 확대되게 된다.
하물며 알즈바툴은 두 개의 축도 아닌, 무려 열 개의 성별 축이 존재하는 세계였으니 그 성적 결합 패턴이 얼마나 난잡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두 명의 결합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사람의 다중 결합으로 이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아예 편견을 정복하여 신세계를 개척하겠다는 명분으로 생물학적으로도 전혀 결합할 수 없는 이들이 자의적으로 만나는 일도 벌어졌다. 외부인들의 눈에 비친 알즈바툴은 혼란스러움의 극한이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이전회
221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0. 다양한 성(性) (1) |
다음회
22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0. 다양한 성(性)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