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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2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0. 다양한 성(性) (3)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9.18 | 회차평점 0 0

 

 

 

*

 

 

 

 

   “편견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맹목적인 미화(美化)이다.”

   어디선가 들은 이 격언의 무게감을 일행은 이곳에 와서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명백한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태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는 것만큼 곤란한 것이 또 있을까. 한 번 질서의 파괴를 허락해주면 그 뒤로는 더 많은 훼손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명확한 기준을 무시한 채 예외를 용납해주면 기준 자체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무질서와 고통뿐이다. 알즈바툴 대륙은 그 실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청각 자료였다.

   더는 선교지의 오염된 문화를 관용을 빙자한 무관심함으로 내버려 둬서는 곤란하다는 판단에 이르자 넷은 잠시 다른 신학적 전략을 내려놓고 이 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복음을 제쳐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문제를 올바르게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이 지역에서는 복음과 직결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선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성별을 어떻게 창조하고 목적을 세워두셨는지 성경이 증언하는 바를 다시금 점검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장에 적힌 이 한 문장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기에 원론적으로는 어려운 논의 거리가 없었다. 성(性)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닌,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완벽한 질서를 기반으로 지으신 고귀한 발명품. 그분은 결코 ‘남녀’ 축 이외에 다른 성별을 지으신 바가 없었다. 또한 창세기의 문장에 기록된 ‘남자’와 ‘그의 아내’는 복수형이 아닌 단수형, 그분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명하셨다. 그리고 ‘아내’와의 결합만을 성관계로 인정하심으로 말미암아 정식 결혼 안에서의 관계만을 올바른 것으로 인정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그 모든 질서를 훼파했다.

   “지구는 이미 오래전에 그분의 질서를 거부했지.”

   윤혁의 말대로 인류 역사상 성의 질서를 깨트리려는 시도는 항상 있었고 이는 근현대에 이르러 극대화되었다. 이미 21세기 당시부터 성적 오염의 작태를 정당화하는 사상은 극에 달해 있었다. 급기야는 아무도 성적 질서의 파괴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잘못을 지적하면 ‘선입견에 찌든 자’ 혹은 ‘남을 미워하고 차별하는 자’로 매도당하며 욕을 먹어야 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말았다.

   “솔직히 지구보다 더 심한 예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은 걸까? 자기 생각이 안일했음을 깨달은 리온은 한탄했다. 더 내려갈 데조차 없던 밑바닥 아래에도 토굴과 지하가 있는 법. 알즈바툴의 참담함을 보니 지구는 양호한 수준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이들이 지금 겪는 혼돈의 책임도 따지고 보면 지구에 있지 않을까?”

   범인이 따로 있음을 아는 윤혁이 되물었다. 결국은 외부 세력의 개입 때문에 이 사달이 난 셈이니 추궁하려면 그 막내 철인왕이라는 용의자와 그를 의도적으로 내버려 둔 인류연합을 탓해야 마땅하리라.

   “양쪽 세계 모두 오류에 빠져는 있는 것은 매한가지요.”

   스테판이 곧이곧대로 현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실패의 경험을 알면서도 다른 이들의 세상을 조작해 꾐에 빠트리는 쪽은 더 악하죠. 마치 마귀가 자신을 넘어뜨린 ‘교만’이라는 장애물을 인간에게 그대로 전승했던 것과 똑같단 말이죠.”

   이에 윤혁이 말을 마치자마자 루디아가 대화에 개입했다.

   “맞아. 하지만 잘못 여부를 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루디아는 핵심 논제를 잊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녀는 선교라는 큰 뜻의 방향이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그들이 온 목적은 복음 미개척지에 주님을 향한 회개의 움직임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지 단순히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성 질서를 바로잡는다 한들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차피 도덕적 관습 하나하나를 고치자면 끝이 없는 법. 죄악의 뿌리 그 자체인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이 먼저이자 핵심이었다.

   그러나 전략을 토론하다 보니 같은 비전을 품은 동료들끼리도 미묘하게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윤혁이나 루디아의 경우 알즈바툴의 성 문화가 비정상적임을 분명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 먼저 전해야 할 교훈은 ‘원죄(原罪)’의 회개임을 강조했다. 개별적인 자범죄를 낱낱이 잡아주며 도덕적 윤리 관념을 떠 먹여주는 일은 여유로운 때에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지금 같은 급박한 특수 상황에서는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래, 성적 타락은 분명 막대한 죄야. 하지만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조차도 모르는 영적 초보이기 때문에 성 윤리를 아무리 말한다 한들 지금은 깨달을 수 없어. 우선 성경을 통해서 세계관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아야 해. 그다음에야 잘못된 문화를 고칠 수 있어.”

   지금 당장 ‘변형 성별’로 인한 오염 상을 지적하는 것은 허공의 메아리일 수 있으리라. 게다가 주민들은 주범이 아닌, 사악한 음모에 휘말린 불쌍한 피해자들이기에 무턱대고 정죄만을 쏟아부으면 반발만 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적인 죄만이 유일한 죄는 아니지 않은가? 모든 죄는 동일하게 심판의 대상이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하게 함에 있어서는 똑같다. 동시에 예수의 은혜로 씻음 받지 못할 죄도 없다. 이것이 이들의 논거였다.

   “우리도 똑같은 죄의 본성을 가진 마당에 무작정 그들만 도덕적, 영적으로 열등한 죄인으로 정죄할 수는 없지. 고쳐준다고 해도 일단 예수님을 알린 다음에 판단해야 해.”

   하지만 이에 비해 리온은 훨씬 더 강경한 입장이었다. 기본적으로는 그도 복음의 우선됨을 인정했으나 성적 왜곡이라는 죄악상이 지닌 ‘특별하면서도 특이한 파괴력’에 대해서 그는 간과하지 않았다.

   “글쎄. 과연 죄를 온전히 죄라고 인식하지 않고도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너희의 의견도 일리는 있지만……, 저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태에 대한 죄의식조차도 전혀 없어. 자연스러운 권리를 누린다고만 생각하지.”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죄를 멀리하지 않는 믿음, 회개 없는 믿음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거짓된 가식. 알즈바툴은 비정상이 비정상인 줄을 모르는 세계였기에 충격 요법 없이는 복음 자체도 올바르게 먹혀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도 과연 저 사람들이 온전히 회개할 수 있을까? 먼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해 직면시켜주지 않는다면 주님께 온전히 돌아오려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거야.”

   양심을 일깨워줘야 한다. 옳고 그름을 나누는 절대자 하나님의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선포해야 한다. 현지인들이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적어도 지금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철저히 인지해야 한다. 죄에 대한 인식이 동반되지 않는 회개는 거짓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논거였다.

   양쪽의 전략은 본질 면에서는 의견이 똑같았다. 단지 세세한 적용에 있어서만 미묘하게 차이를 보였을 뿐. 그러므로 다투거나 싸울 이유는 없었다. 여러 토의 끝에 일행은 나름의 타협점을 찾았다. 각자 다른 순서와 방법으로 접근해보자. 그래서 넷은 팀을 나누었다. 루디아는 윤혁의 의견에 동참해 그를 따랐고, 스테판은 자연히 리온 쪽에 동행했다.

 

 

 

 

 

*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에 대한 기준을 인간 멋대로 설정하기 시작하면 그 잣대는 끝없이 흔들려 종국에는 종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법. 알즈바툴 대륙의 성 문화의 몰골이 그와 같았다. 그들은 도무지 자신들의 문화 관습과 인식 체계가 고쳐야 할 문제점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고 증언하는 성경의 진언을 가볍게 여기며 성경 전체를 고대적 사고의 틀에 갇힌 이들이 발명해낸 하찮은 이야기 내지는 신화라고 치부했다.

   윤혁과 루디아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변증하고 논파했다. 처음 듣는 희한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복음을 깊이 있게 전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심판에 대한 메시지였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악에 대해 철저하게 보응 하시고 악인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불편한 진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의로움의 기준이 너무도 높기에 누구도 합격할 수 없다는 더 불편한 진실도 전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 죽음의 심판보다 더 두려운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도.

   필연적으로 ‘성’이라는 이슈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인간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로마서의 서론은 성적인 죄악들을 수없이 나열하여 인간의 추악한 타락의 실태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정직한 복음 전파자인 윤혁과 루디아는 망설이면서도 이를 언급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에 비춰 여러 가지 종류의 죄를 지적받자 즉시 사람들은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들은 발끈하며 즉각 반문하였다. 그들에게는 너무도 불편하고 거북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신은 왜 다양한 성을 창조하시고는 왜 한 가지 잣대만을 요구하는 거요?”

   전도자들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거늘. 순간 ‘일 더하기 일이 이인 이유’를 설명하라는 질문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넓게 품은 뒤 최대한 예의 바르게 설명해주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일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뒤 결혼제도를 선포하신 일, 그리고 아름다운 결혼과 성의 모습을 통해 비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듣는 자의 관심은 전혀 다른 데 있었으니, 그들과 전도자들의 대화는 쳇바퀴처럼 어긋났으며 평행선처럼 만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성과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보다는 자신들의 이기적 고집에 더 집중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지금 잘못했다는 거요?”

   “거참 속이 꽉 막힌 사람들이구먼.”

   “내 살다 살다 이렇게 관용 없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억울하게 정죄 받는 것은 괴로웠으나 사명은 피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즉시 전도하는 곳마다 아우성, 불만, 비웃음, 욕설, 힐난조의 비판이 이어졌다. 어느 때는 성과 관련된 토론이 과도하게 이어지는 바람에 본론인 복음 이야기는 정작 제대로 다룰 틈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윤혁은 알즈바툴의 시민들은 조상 때에 어떤 외부 간섭으로 인해 왜곡된 것임을 지적했다. 그는 원래의 성별은 남녀뿐이며 지금의 알즈바툴의 체계는 변질된 것임을 밝혔다. 새로운 성별 축이란 그저 인간 위에 유착된 비정상적 실험의 산물일 뿐이며, 정상 질서를 깨트리고 억지로 진화해보려는 악한 욕망으로 인해 애꿎은 식민지 주민들을 희생양 삼은 결과물임을 설파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럼 무슨 수로 증명할 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된 것이오.”

   “애초에 인간 자체는 이렇게 생겨 먹었단 말이오.”

   그 완고한 주장에 도무지 설득할 재간이 없었다. 진실을 이미 아는 처지에서는 답답해서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루디아는 안타까운 마음에 속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오, 주님. 저 안타까운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이 제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알도록 도와주세요.

   “룻, 미안해. 이번만큼은 나도 과학적인 설득이 불가능해. 사람들의 성별을 직접 연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까지 해답이 보이지 않는 건 처음이야.”

   윤혁은 고개를 저으면서 풀 죽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웃의 영혼을 애통해하는 심정으로 눈물을 몰래 훔쳤다. 욕설이나 반대를 감당하는 데 대한 슬픔이나 원통함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리가 발을 디딜 틈이 없다는 사실이 몹시 괴로웠다.

   그 후로도 알즈바툴의 동서남북을 두루 돌아다니며 윤혁과 루디아는 열흘간 같이 열렬히 활동했다. 그들은 성별의 괴이함과 성의 변질이 진리에 있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 실감했다. 그나마 감사한 점은 이번 이슈에서 비록 리온과 윤혁의 의견이 미묘하게 나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아닌 지혜로운 대화를 통해 접근했다는 점이었다. 과거 시대의 교회가 비슷한 이슈를 놓고 좌우로 갈라져 서로를 헐뜯던 일을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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