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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2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1. 일만이천 개의 종족 (2)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09.25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우물쭈물 방황하던 중, 하루는 운명적인 일이 찾아왔다.

 

   그때 일행은 주막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마침 그날도 인근의 일곱 도시가 만나는 교차로에서 동시다발적인 종족 충돌이 벌어졌다. 하이테로에 당도한 이래로 비슷한 일을 자주 겪고 자주 데여봤던 선교사들은 침착하게 충돌을 피해 자리 옮길 채비를 하였다.

   드론의 도움으로 정황을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았다.

   북쪽 골짜기에서는 ‘새비지’ 족과 ‘래드클리프’ 족이 숲의 주거권을 두고 서로를 헐뜯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강둑에 세워진 거대 대교(大橋)를 사이에 두고는 ‘라그랑주’ 족과 ‘센토’ 족이 투쟁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인근의 거대한 숲에 세워진 궁궐에서는 ‘아란카의 엘프’와 ‘프락수스’ 종족의 무사들이 재물과 자원을 두고 언쟁을 높이고 있었다. 여기에 콩고물을 얻어먹기 위해 제3자 종족들까지 끼어들면서 싸움은 더욱 점입가경이 되었다.

   “괜히 휘말려서 좋을 것 없어. 자리를 뜨자.”

   지혜롭게 리온은 즉시 남쪽으로 선회할 것을 제안했다. 이내 일행은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서 남쪽의 대도시 지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마냥 상황이 여의치는 못했다. 길가에서 ‘파추아’족의 도적단 이천 명과 ‘기르간’족의 도적단 천이백 명이 출몰해 서로의 영역권을 놓고 씨름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행은 어찌 대응할지 고민하였다. 스테판 같은 경험 풍부한 동료가 있기에 요령에 대해서는 염려치 않았다. 또 장비와 인형 몸체의 잠재력을 빌리면 마냥 무력으로도 밀릴 일 없었다. 하지만 섣불리 다툼에 휘말리는 일은 되도록 지양하고 싶었다. 다치는 사람이라도 나타난다면 이방인 선교사에 대한 평이 매우 악화될 것이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의 상황. 일행은 몸을 숨긴 채 두 종족의 말다툼과 몸싸움이 격해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대화로는 일이 풀릴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근에서 소란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다른 종족 무리까지 가세해 일이 커지기만 했다.

   “이대로 숨어 있다가는 들키겠어.”

   루디아가 염려스레 말했다.

   “곤란한걸.”

   평화로운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윤혁도 그저 앉아만 있었다. 휘말리는 건 절대 사양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숨어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참으로 난감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미묘한 위화감이 스쳐가는 듯한 감각이 임했다.

   “이건?”

   즉각 리온의 표정에 선명한 변화가 나타났다. 의아함, 두려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당혹감이 그의 미간과 목소리에 섞여들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윤혁은 친구의 감정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지금까지 어떤 곤경이 닥쳐도 담대하게 대응했던 리온이 어째서일까?

   “말도 안 돼. 왜 하필 그자가…….”

   미묘하게 리온의 성대가 부르르 떨렸다.

   “무슨 일이야, 리온? 괜찮아?”

   리온은 어찌나 넋이 흔들렸는지 친구가 옆에서 어깨를 잡고 흔드는 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싸우는 이종족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지와의 조우보다는 익숙한 기시감에서 기인한 감정이었다.

   “어이, 정신 차려!”

   윤혁이 좀 더 세게 다그쳐봐도 똑같았다. 그때.

   “어머, 사랑하는 여러분들, 너무도 안타까워요. 서로를 향한 편견과 미움, 울타리를 긋고 상대를 배척하는 그 마음……, 부탁드려요. 제발 여러분이 벌인 참상을 한 번만 돌아보고 결정을 달리해주셔요.”

   어떤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귀에 울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뇌리에 직접 닿는 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진하고 선명하고 강인한 파동이었다.

   “텔레파시?”

   진과 자주 소통해본 윤혁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외쳤다.

   “지금 누군가가 근처에 있소!”

   스테판은 비슷한 류의 기술을 자주 겪어봤는지 당황하지 않았다. 문제는 리온이었다. 그는 무의식 속에 숨겨왔던 두려운 기억이 다시금 스멀스멀 부활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이 목소리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오들오들 떨렸다.

   “우리 모두 평화를 통해 모두 하나가 되는 거예요. 다툼이나 시기나 편견을 모두 내다 버리고 각자를 소중한 인격으로, 위대한 존재로 바라봐주세요.”

   다시금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다툼을 벌이던 종족들도 그 신비로운 음성에 일제히 압도되어 허둥대며 당황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더니 이내 달콤하고 상냥한 목소리에 차츰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격분하던 태세가 가라앉고 서로를 맹렬하게 찌르던 적개심도 수그러들었다.

   텔레파시 음성은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고 상냥했으며 매혹스럽고 한없이 선량하게 느껴졌다. 마치 평화의 화신이 땅에 강림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 전달되는 메시지도 지나치게 근사하고 올바르고 무해했지만, 무엇보다 목소리 톤에 사람을 유혹하는 힘이 담겨있었다.

   비단 사람만 그 음성의 권세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인근에 서식하던 모든 아종족과 이종족과 인간 아류, 거리와 도시와 숲과 대교에서 난장판을 벌이던 무리, 심지어 싸움과 상관없는 일반 주민마저도 침착하게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저기서 들리던 싸움의 소음은 금세 잦아들었다. 그리고 무리가 해산하여 하나둘 제 거주지로 돌아가는 발걸음 소리가 그 빈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달콤한 연설과 사랑의 호소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싸움 당사자인 각 개인이 느끼고 있던 내적 감정이 교묘하게 종족 장벽을 넘어서 모든 당사자에게 흘러들어 공유되었다. 너무 기묘해서 마치 그들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여 하나가 된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 감정……, 묘하게 이상해. 하나님에게서 온 사랑이 아니야.”

   한참 현혹되던 일행이 루디아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감정 같아.”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새 어느덧, 길에서 싸우던 파추아 족과 기르간 족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사과한 뒤 제 갈 길을 떠난 상태였다. 숲 한가운데의 대로에는 한산한 느낌이 흘렀다. 태풍의 눈에 놓인 기분이었다. 윤혁은 망을 보기 위해 친구들에게 잠시 뒤에 머물러있도록 하고 길가로 나와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어머나, 이곳에 숨어계셨네요.”

   기척도 없이 들려온 난데없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윤혁은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번에는 텔레파시가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조금 전의 텔레파시와 똑같은 느낌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 세계의 소속이 아닌 모양이에요.”

   당혹스러웠다. 이토록 다양한 종족이 섞여 사는 이질성의 세상이거늘, 단번에 윤혁이 외부에서 왔음을 눈치채다니, 통찰력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윤혁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베일을 쓰고 있던 그 사람은 로브를 벗어던졌다.

   순간 윤혁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외양의 여인이 자신을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여성 중에서는 그녀와 동등한 수준의 미모를 본 경험이 없노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었다. 과도한 아름다움 때문에 매혹보다는 도리어 이질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길을 잃으셨나요?”

   여인이 싱긋 웃음을 지으면서 한 걸음씩 다가왔다. 윤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세이렌이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듯한 불안감까지 들었다.

   “어머!”

   그녀가 입을 가리고 소녀처럼 호호 웃었다. 왜 그러는지 정황을 파악하지 못한 윤혁. 잠시 뒤 그녀의 시선을 보고 이유를 파악했다. 그의 가슴에, 정확히는 목걸이에 걸려있는 반지가 격한 진동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불길함이 엄습하였다. 그와 동시에 윤혁의 시야에 그의 눈에만 보이는 선명한 메시지 창이 제시되었다.

   ‘반지가 직접……, 경고를 한다고?’

   그는 메시지의 내용을 뚫어지라 주목했다.

   {초특급 요주 인물 발견.}

   뭐라고? 설마 눈앞의 저 여자를 말하는 건가?

   {Superhuman Class: Uncategorizable(카테고리 분류 불가)}

   긴장감에 숨이 잠시 멎으며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윤혁은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질문을 던졌다. 아름다운 여인은 대답하는 대신 훌쩍 다가와 그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웃으며 감탄하였다.

   “어머나, 당신이 바로 ‘그’의…….”

   그녀는 말을 다 잇지도 않고 멈췄다.

   “자세히 보니 제법 닮았어요. 비상식적일 정도로 잘생긴 그 인간과는 달리 딱 인간적인 수준이라서 더 마음에 들어요. 게다가 덩치도 그보다 작으니…….”

너무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아찔한 느낌이 들어 더욱 정신 차리기 어려웠다.

   “귀엽네요, 호호.”

   겨우 정신을 붙잡은 윤혁은 여인이 조금 전 꺼낸 말을 곱씹어보았다. 누구와 닮았다고? 아니, 그전에 신경 쓸 사안은 따로 있었다. 무려 ‘카테고리 분류 불가’ 초인? 갑자기 웬 거물인가. 이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당신, 형이랑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입니까?”

   긴장한 윤혁은 신분을 숨길 생각도 못 한 채 제 정체를 노출해버렸다.

   “아는 사이라니, 섭섭하네요. 얼마나 각별한 친구 사이였던 걸요.”

   여인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비록 그쪽은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맑은 하늘색을 머금은 은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마치 별들을 머리털 한올 한올에 정교히 박아놓은 듯한 매력적인 색채였다. 금속 질의 회색 눈동자는 용광로에서 갓 정제해낸 순결한 은을 연상시켰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저는 귀여운 아이들을 정말로 사랑한답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가르침을 줄게요.”

   낯섦에도 불구하고 전혀 해로움이 없어 보이는 그녀가 아주 자연스럽게 윤혁의 손목을 붙잡았다. 비단보다도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간섭하여 윤혁과 그녀 사이를 가로막았다.

   “어머나, 반가워라.”

   리온은 재빨리 친구를 자기 뒤로 물러서게 하고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거대한 대자연 앞에 선 미약한 인간마냥 벌벌 떨고 있었다. 표정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윤혁은 왜 그리 친구가 떠는지 의아했으나 한편으로는 여인의 위압감 때문인지 조금은 공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리온의 긴장은 단순한 순간적 감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러나, 윤혁. 저 사람과 가까이 하지 마.”

   “너무해요. 저는 그저 친구의 동생을 만나서 반가운 것뿐인걸요.”

   여인은 우는 목소리로 아양을 떨었으나 그 장난스러운 태도에마저도 은은한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이해하기 힘든 역설이었다.

   “그나저나……,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리온. 여기는 어찌 오셨나 했더니 인형과의 뇌파 공명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군요. 진 라흐블뤼크가 개입했으려나? 이런 일을 할 만한 후보가 그 아이밖에 없겠네요.”

   “당신과는 할 이야기 없습니다, 사부.”

   “호호, 말버릇도 참. 좀 더 교육이 필요하겠어요.”

   그새 스테판과 루디아도 숨어 있던 장소에서 나와 윤혁과 리온을 엄호했다. 그러나 여인은 한꺼번에 네 명을 마주하면서도 움츠러들기는커녕 상대방을 압도하였다. 그 어떤 능력이나 무장의 엄호도 없이도.

   “사부라고? 설마 리온 네가 말한 그녀가 이분?”

   전에 대화했던 내용을 번뜩 떠올린 윤혁.

   “…….”

   리온은 말도 없이 묵묵히 그녀만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일행에게 반가운 어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우아하면서도 고아한 자태, 매혹스럽고 곱디고운 목소리가 일행의 눈을 현혹하였다. 육신의 눈은 그녀의 완전함과 탁월함에 흔들렸다. 그러나 영적인 눈은 본능적으로 경각심에 빠졌다.

   “반가워요. 내 이름은 티아라 Σ(sigma) 로페즈. 여기 이 귀여운 아이를 한때 맡아 키우던 은사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 세상의 평화를 보듬는 자, 평화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성녀’랍니다.”

   부드럽고도 거역하기 힘든 상냥한 권위가 그녀에게서 발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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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게임으로 치면 1레벨 수준 던전에서 놀던 중 갑자기 100레벨 보스가 튀어나온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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