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32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3. 내기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0.03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지도 위에는 각 지역에 서식하는 여러 종족들의 정보가 빠짐없이 상세히 표기되어 있었다. 유전적인 특징에서부터 정신적인 특징까지. 심지어 역사 속에서 각 종족이 이주해온 경로, 각 종족이 세운 문화권과 행정 구역, 종족마다 두드러지는 해부학적인 세부 특징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 내기를 공정하게 진행하도록 자료 제공은 충분히 해드리죠. 투명하게 말이에요. 여러분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조사해도 되지만 그것은 힘들겠죠. 원한다면 이 제가 직접 포탈을 열어서 대륙 곳곳을 방문하게 해드릴게요.”
“포탈을 다룬다고?”
스테판의 당황 가득한 질문에 티아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게도 특별 권한이 있어요. 나름 ‘그’에게서 신용을 얻었거든요.”
윤혁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움찔하였다.
“물론 강윤혁 군이 부여받은 권한과는 조금 종류가 달라요. 내게는 서로 다른 하늘도시 사이를 우주선 없이 왕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수 이동 코드가 부여되었어요. 하늘도시들의 내부가 아니면 포탈의 출입구가 생성되지 않는 한계는 있지만요.”
이는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외우주 관리자의 일원인 진조차도 윤혁 일행을 하늘도시에서 다른 하늘도시로 옮기려면 우주선이라는 물리적 수단을 이용해야 하거늘. 그런데 티아라는 비록 본신의 몸 한정이라지만 우주선도 없이 하늘도시와 하늘도시 사이를 왕래할 수 있다. 한 개의 하늘도시 내부에서의 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문득 선교팀은 이것이 시사하는 바를 깨닫고는 피부가 섬뜩한 한기에 오그라드는 감각을 느꼈다. 그들이 어느 선교지로 향하든 성녀가 쫓아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다.
‘형은 도대체 왜 저런 여자에게 그런 권한을?’
“인류연합 대표께서 내게 이 권한을 준 이유는…….”
성녀에게 속생각을 노출당한 윤혁은 조용히 입술을 악물었다.
“바로 평화의 사자라는 제 정체성 때문이랍니다. 제가 하는 일들은 그가 식민지를 일구고 다루는 데 나름 상당한 유익이 되거든요. 오로지 저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죠! 궁극의 평화를 낳는 일 말이에요.”
자부심과 감상에 잔뜩 젖은 성녀. 이에 스테판은 말없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다보았다. 뒷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그녀가 지금 제창하는 평화란 것이 참된 평화와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라는 분별은 들었다. 다행히도 스테판의 무엄한 생각은 읽지 못하는 것인지 티아라는 스테판 쪽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공평하게 저도 과제를 하나 맡겠어요. 나는 이 대륙 전체에 서식하는 지적 생명체와 준-지적 생명체들을 온전한 항구적 평화 상태로 이끌어 보겠어요. 다툼이 끊이지 않는 이 불화의 대륙을 말이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얌전히 듣고만 있었던 루디아가 어이가 없었는지 놀라서 외쳤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고작 한 사람의 힘으로 그런 무모한 업적을 단기간에 수행한다고?
“어머나~!”
티아라가 흘깃 눈길을 주자 루디아는 주춤하였다.
“그럼 직접 내기를 해보면 되겠네요! 뚜껑을 열어보면 알 수 있겠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식은 죽 먹기라는 식의 말투. 위장된 선량함으로 베일을 썼다고는 해도 초인만의 본성은 완벽히 숨겨지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티아라에게서 느껴지는 위험성이 다른 초인들보다 더 했다.
“진리가 오직 하나라고 외치면서, 또 그 진리를 자신들만 보유했다고 확신하고 있으면서, 막상 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할 대상을 판가람하는 일에 관하여는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별할 자신조차 없으신가 보네요.”
티아라는 상대의 역린을 건드리고 도발하여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유도해내는 기막힌 재능을 소유한 자였다. 그렇다. 확실히 그 방면에서 그녀의 솜씨는 신들린 듯한 경지였다.
더욱이 그녀는 리온을 2년 가까이나 가르쳤었던 자. 따라서 그의 속내와 사고방식을 손바닥 보듯 꿰뚫는 일은 쉬웠다. 아울러 그녀는 리온의 나머지 세 동료도 잠깐의 관찰만으로 대강 성격의 유형을 파악했다. 특별히 겁도 없이 덤비는 강윤혁이라는 이름의 청년. 스스로는 부정하겠지만 의외로 그는 카이젤과 닮은 성격이었다.
‘너무 간단하네.’
그녀는 계속해서 도발을 이어나갔다. 일행 가운데 동요가 일어나는 게 그녀 눈에는 훤히 보였다. 티아라는 능수능란하게 건반을 연주하듯 넷을 농락하며 대화 주도권을 교묘히 자신에게로 끌어왔다. 어느새 선교팀은 당장에라도 그녀의 언변에 반박하고 싶은 심정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성질도 급해 보이는 친구들인데 아직 대놓고 나서지는 않네? 아마도 리온이 친구들에게 나를 경계하라고 지시한 모양이지. 귀엽기도 해라.’
좀 더 도발해보려던 차에.
“벌칙과 상급에 대해 읊어보시죠.”
의외로 침착할 줄 알았던 리온이 먼저 미끼를 물었다.
‘아니, 일부러 물려준 건가?’
티아라는 흥미진진해 하는 눈초리로 입맛을 다셨다.
‘재미있게 돌아가네요.’
한편 윤혁과 루디아와 스테판은 화들짝 놀라 리온을 쳐다보았다. 사실 그들도 티아라가 일으키는 가치관 혼란에 분개하여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기를 갈구하던 심정이었다. 그러나 리온이 거듭해서 그녀의 위험성을 경고해왔기에 애써 도발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참던 차였다. 그런데 그런 리온이 먼저 행동한다고?
윤혁이 항변하려 하자 리온이 잠시만 자신 말대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윤혁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끝내 침묵하고 말았다. 그들을 관찰하던 티아라는 기꺼이 내기 조건을 내걸었다.
“내가 내게 부과된 임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강윤혁군에게 두 번 다시는 정신간섭을 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어요. 나아가 여러분에게 텔레파시든 직접 접촉이든 협박이든 어떤 훼방도 하지 않겠어요.”
“정신간섭?”
꺼림칙한 말에 루디아는 당혹을 느끼며 반신반의했으나 윤혁은 성녀가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님을 알았기에 침착히 경계했다. 이미 그는 진에게 정신간섭을 당해본 바가 있었다. 성녀라면 충분히 비슷한 급의 기술을 보유할 수 있겠지.
게다가 그녀는 하늘도시 곳곳을 넘나들 수 있으니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다. 그녀의 위험성을 예방하는 일은 심각한 과제였고 윤혁으로서도 결코 남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정신간섭을 금하겠다는 대상이 저뿐이죠?”
“호호, 이쪽의 약점을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그래도 나름 투명하게 진실을 말해드리자면……, 두 사람의 인형은 제 쪽에서 제어할 수 없어요. 기계 율법 때문이죠.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면 모를까, 제게는 기계에 행사할 영향력이 없어요. 그리고 이레귤러 쪽은 아무래도…….”
정곡을 찔려 지목당한 스테판이 불쾌감에 미간을 약하게 일그러트렸다.
“식민지 주민에게 보편적으로 심어진 표식, 그 표식의 스위치가 이상한 모드로 발현되는 바람에 말이죠. 덕분에 제 능력 밖의 범위로 벗어났거든요. 결과적으로 이 자리에서 제가 직접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강윤혁 씨 하나뿐이에요.”
그녀는 성큼 윤혁의 바로 앞쪽까지 성큼 다가왔다. 도발적이고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윤혁의 몸은 뻣뻣하게 굳었다. 농담이 아니라 그녀는 물리적 위협을 가하지 않고도 상대를 두려움에 빠트리는 재주가 있었다.
“앞으로 오랫동안 두고두고 괴롭힐 수도 있죠. 당신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대뜸 윤혁의 목에 걸린 반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제게도 유사한 물건이 있어요. 당신의 것과 제 것을 매개체로 사용해서 특수계약을 맺는다면, 우리 둘 사이에서 텔레파시나 정신간섭이 일어나지 않도록 차단하는 보호막이 만들어질 거예요. 조건만 올바르게 성립한다면요. 아마 평생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다시 손가락을 가슴에서 떼는 그녀.
‘헉!’
잔뜩 긴장했던 윤혁은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리고 내 임무의 성공에 대해서는 보상을 따로 걸지 않을게요. 여러분을 위해서 내 나름대로 페널티를 부여하는 거예요. 어차피 착취할 것도 없겠지만요.”
한마디로 자신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분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화의 주도권과 위세를 완전히 점하는 중이었다. 이제 더 중요한 논의가 하나 남았다.
“우리 쪽이 임무에 실패했을 시 벌칙은 무엇입니까?”
리온이 조심스레 불안감을 억누르며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아하, 물론 그것도 책정해야겠죠. 제가 거는 벌칙 조건은……, 우리 리온이 가찮은 이 짓을 포기하고 그만 지구로 돌아가는 거예요. 물론 두 번 다시 어떤 하늘도시에도 얼씬거려서는 안 돼요. 그 어떤 명분으로도요. 평생!”
부드럽지만 무시무시한 협박. 의외로 리온은 차분하게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도리어 곁에 있던 친구들이 당황하며 동요했으나 그는 침착하게 장기적인 손익을 계산했다. 어차피 티아라가 작정하고 덤빈다면 앞으로 윤혁을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 윤혁이 어긋난다면 이후의 여정은 아예 가능성조차 성립하지 못한다. 그럴 바에야 조금의 도박을 감수하더라도 사부가 친구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설령 가망성이 희박하더라도 기댓값은 나쁘지 않았다.
“보상은 어떻게 되죠?”
“리온!”
리온이 순순히 미끼를 물고 화답하자 윤혁이 놀라 외쳤다.
“호호, 구미가 확 당길 거에요.”
성녀는 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잠시 눈을 감는 시늉을 하였다. 이에 곧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윤혁의 머릿속으로 수십억의 지적 생명체들의 음성이 한꺼번에 들려왔다. 이윽고 윤혁의 청각 피질과 연결되어 있던 루디아와 리온의 인형 CPU로도 전자 신호로 변환된 음성 정보가 강물처럼 쏟아졌다. 그들도 당황했다. 스테판만 일이 돌아가는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이, 이건?”
“말도 안돼!”
티아라는 의기양양하게 자랑하였다.
“하이테로 대륙 위를 거니는 지적 생명체 개체 전부를 텔레파시 네트워크에 연결했답니다. 정신간섭은 어렵지만, 소통이라면 가능해요. 언제든 원하는 메시지를 실시간 동시다발로 전달할 수 있죠. 감정과 호소력까지 함께 담아서 말이에요.”
티아라는 텔레파시를 통해 윤혁에게 속삭였다.
“한 번 보아서 아시죠?”
윤혁은 며칠 전 티아라가 이곳의 종족들을 어렵지 않게 감정의 홍수로 다스렸던 일을 회상했다. 정말 그러한 힘을 대륙 단위로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녀의 선언이 마냥 허언은 아니었다.
“여러분이 만일 임무에 성공한다면 나의 이 힘을 빌릴 일회용 이용권을 선물해 드리죠.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에게 한꺼번에 설파할 기회를 드리겠어요. 무엇이 되었건 여러분이 전달하기를 원하는 메시지를 말이에요.”
선교사들이기에 뿌리치기 더욱 힘든 유혹이 눈앞에 제시되었다.
이전회
231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3. 내기 (2) |
다음회
23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4. 세뇌당하는 세계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