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3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5. 산 위에서의 대결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0.14 | 회차평점 0 |
Chapter 25. 산 위에서의 대결
셋째 날의 흐름도 완벽히 티아라의 손안에 있었다. 이제 그녀가 심어놓은 철학과 사상은 광범위하게 대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각지에 파송된 종교 지도자들은 하이테로의 고유 통신매체를 자신들의 매체와 연접한 뒤 연일 화합과 승리의 메시지를 전했다. 지성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가르침에 열광했다.
티아라가 심어놓은 종교와 철학들은 단 사흘 만에 하나로 융합하여 ‘통합 종교’의 단계까지 접어들었다. 사실 애초에 이는 처음부터 티아라가 구상하던 바였다.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간 하이테로 대륙 전역에 시시각각 들끓던 크고 작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분쟁은 모조리 종결 선언에 이르렀다. 차별을 금지하고 종족의 벽을 허무는 취지의 법들과 조약들이 하루 만에 체결되었다. 흩어짐을 면하고 다 같이 모여 조물주의 영역에 도전하자는 취지로 세워진 바벨탑의 유지를 잇기라도 하듯, 하이테로의 모든 인간과 비인간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이렇게 취한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지, 혹 모래처럼 손쉽게 무너질 것인지 아니면 인류연합에 의해 재활용되거나 악용될 것인지, 그 부분은 티아라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다. 어차피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마당에 관심은 없었다. 에녹에게는 종족 다양성의 위험성을 경고함으로써 나름 경종을 울려주었고 더불어 제자의 오만한 사고관을 짓밟아줄 만반의 채비도 갖추어진 상태였으니 그녀로서는 만족이었다. 이제 사실상 확정된 결과의 드러냄만 남았다.
대결을 위한 약속 장소로 지정된 어느 산 정상.
“어머나, 약속 하나는 잘 지키시네요.”
성녀는 자애롭고 너그러운 미소를 한껏 머금고 윤혁과 리온과 스테판을 맞아주었다. 루디아는 동참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체는 잠시 접속 차단된 상태였고 잠든 인형 몸체는 운송용 로봇에게 잠깐 맡겨둔 채였다.
“맡겨준 과제는 잘 해결하셨나요?”
셋 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티아라는 눈웃음과 함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선교팀을 하이테로 곳곳으로 이동시킬 때 쓰였던 단거리 공간이동 포탈이 허공에 수십 개 이상 열렸다. 워프나 게이트와는 무관한, 하늘도시 내부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기술. 원리조차 이해하기 힘든, 마술과도 같은 현상이었다.
흩어져 있던 오십 명 이상의 사람이 여러 지역에서 포탈을 넘어 대결 장소 위에 모였다. 하이테로의 원주민 출신으로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지구에서도 하이테로에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형태의 제례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디자인은 마치 온갖 종교의 의상 디자인을 마구잡이로 섞어놓은 것만 같았다.
“맡기신 임무를 마치고 이 땅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자기 고향에서 교황이 되어 가르침을 설파하는 일을 책임질 것입니다.”
대머리의 인간형 종족 개체 하나가 티아라에게 묵례하면서 보고했다.
“어머, 수고하셨어요. 당신의 성장이 참으로 뿌듯하네요, 가브리엘 스님.”
괴이한 작명 센스에 윤혁은 불쾌한 듯 한쪽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하나로 통합된 사상과 종교 아래 이 땅은 한마음이 될 것입니다.”
다른 광신자도 그의 정신적 지주에게 보고했다.
“물론이에요, 마호메트 목사님. 저를 믿으세요. 저는 이미 이곳 말고도 수많은 세계에 평화의 힘을 뿌리내렸던 경험이 있답니다. 이런 작은 촌락을 개혁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에요.”
가브리엘 승려와 마호메트 목사는 티아라의 칭찬과 호언장담에 뿌듯한 표정으로 얌전히 무릎 꿇고 대기하였다. 이내 오십여 명의 제자들도 다 같이 티아라를 둘러싸 앉아 그녀의 명령이 내려오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에큐메니컬 운동, 종교 다원주의와 통합주의까지.”
윤혁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그녀에게 비아냥거렸다.
“레퍼토리가 너무 뻔하시군요?”
“호호, 그런가요? 허나 그것도 운용하는 자의 역량 나름이겠죠.”
“그렇습니까? 하기야 거짓말을 감당하려면 머리가 좋아야겠죠.”
한 마디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
“그래서 머리가 나쁜 우리는 그저 순수하게 진실만 말하려고 합니다.”
의외로 기죽지 않고 당당한 윤혁의 모습에 티아라는 잠시 의문을 느꼈다. 그녀는 옛 제자 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동료를 일깨운 건가? 혹은 반대로 일깨움을 받은 것인가? 이것은 무익한 오기인가, 아니면 실질적인 부활인가? 그러나 변화가 생겼다기에는 리온의 의기소침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카이의 동생 녀석에게 무슨 꿍꿍이라도 있나?’
그녀는 몰래 속셈을 알아보려 살짝 정신 간섭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그 반칙은 통하지 않았다. 윤혁의 반지와 티아라의 팔찌가 모종의 공명 반응을 일으키더니 반지가 정신 간섭을 차단해주었다.
“설마 잊지 않으셨죠? 대결의 공정성을 부르짖은 쪽이 누구였나요?.”
“어머, 물론 그렇죠~.”
그녀는 태연하게 시치미를 떼며 능수능란히 표정 관리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계산 머리는 그 와중에도 초광속의 기계처럼 민첩히 회전하였다.
‘역시 저 물건……, 단순한 출입용 코드가 아니었어. 카이젤이 첨단 기술들을 잔뜩 심어놓은 모양이야. 설마 저것도 내 것과 같은 그 특수 계약인가?’
조금 탐이 나는지 그녀는 살짝 혀를 할짝거렸다.
그때 윤혁이 티아라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저희도 공정하게 대결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도 그녀의 텔레파시 채널에 수신자 형태로 접속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목적은 대결 양측이 실시간으로 하이테로를 관찰하는 것. 보상으로 받을 ‘메시지의 전달 권한’은 누릴 수 없겠지만, 거시적 정황을 관측하는 것 정도는 계약 조건에 전혀 어긋나지 않았다. 티아라도 별 거부감 없이 승낙했다.
“저야 괜찮지만, 일반인의 뇌로는 오래 견디기 어려울 텐데요?”
걱정해주는 척 살짝 비웃는 티아라의 말투에 윤혁은 담담하게 답했다.
“확실히 위대한 초인이신 성녀님과 저 같은 평범한 인간은 엄청난 격차가 있겠죠. 그러니 약간의 밸런스 조정 정도는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보정이라뇨?”
그는 대답 대신에 자신의 반지를 가리켰다. 그는 예전에 이 반지를 매개로 시뮬레이션 우주의 핵인 ‘이데아(IDEA)’와 융합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기반으로 다중 텔레파시도 버텨내 볼 작정이었다.
‘어쩔 수 없어. 사용은 불가피해.’
각오를 굳게 다진 그는 망설임을 내려놓고 의지를 행동으로 옮겼다. 이내 반지와 동기화된 윤혁의 신체에 희미한 선 문양의 빛이 새겨졌다. 동료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으나 티아라의 눈에는 명료히 관찰되었다. 이내 성녀는 윤혁의 정신 감응력이 조금 전보다 확연히 증가한 것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역시 저게 강윤혁이 믿고 있는 카드인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하이테로의 종족들을 분간할 수 없다. 에녹이 하이테로를 실험실 삼아 남긴 작품인 ‘종(種)의 셔플’, 이미 오래전에 하이테로를 잠식한 그 ‘인위적 혼돈 상태’는 난공불락의 매듭과 같은지라 최상위 초인의 지혜로도 푸는 것이 어려웠다.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임무를 주었어.’
티아라 자신조차도 하이테로의 ‘종의 셔플’ 상태가 지금 단계에서 조금만 더 진행되었더라면 섞인 인구 구성원의 기원과 카테고리를 올바르게 분간할 수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초인의 정신도, 초지능체도 없는 보통의 일반인이 무슨 수로 임무를 완수한단 말인가?
성녀의 입에서 자신만만함을 띤 미소가 조금씩 옅어졌다. 그러나 승리하리라는 굳은 확신은 변함없었다. 어차피 이번 내기는 리온의 필연적 패배로 설계된 운명적 함정. 설령 강윤혁이라는 변수가 개입한다 한들 이 불변의 운명은 움직이지 않으리라.
“좋아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오십 명의 사제들이 신속히 일어섰다. 그들은 그녀의 호위를 위해 엄호 진영 배치를 변경하였다. 그녀가 정신 간섭을 위해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면 잠시나마 그녀에게 틈이 생길 테니 그사이에 벌어질 만일의 일을 대비해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윤혁은 위압감을 방출하는 그녀 앞에서 두 다리를 꼿꼿이 고정하고 버텼다. 체격은 자신보다 작지만, 존재감으로는 자신을 압도하는 성녀, 티아라 로페즈. 히브리 민족이 노예 생활에서 간신히 탈출하기 무섭게 무자비하게 추격해온 파라오의 군대가 백성들에게는 꼭 이렇게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을까?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
티아라가 자신의 반지를 향해 손을 뻗자 윤혁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 조건 반사 반응이 들어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하지만 힘겹게나마 그는 굳게 버텼다. 이내 팔찌와 반지가 공명하더니 윤혁의 뇌리로 티아라의 텔레파시 채널이 연결되었다. 곧 머리가 터져나갈 듯한 고통과 정신이 붕괴할 듯한 압박감이 엄습했다. 하이테로의 지성체들이 내뿜는 마음의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크으으으윽.”
고통스러워하는 윤혁을 보고 티아라는 상쾌히 웃었고 리온과 스테판은 깜짝 놀라 경악하였다. 그들은 윤혁에게 무리한 도박을 그만두라고 외쳤다. 그러나 윤혁은 태연히 친구들을 만류했다.
“괜찮아. 이미 각오하고 계산했던 일이야.”
바로 그 순간 리온의 속에서 울컥 솟구친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웠다. 자신의 무자비하고 위선적인 사부 때문에 휘말린 친구가 받을 필요 없는 고통을 짊어지게 된 현실. 그런데도 자신에게는 도울 힘이 없었다.
“한 가지만 부탁할게.”
윤혁은 그런 그에게 청했다.
“네 기도가 필요해. 어떤 낙망할 만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기도를 멈추지 말아줘. 네가 굳게 믿는다면 나도 무너지지 않아.”
내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순간적으로 리온의 마음에 스쳐 간 생각은 스스로를 향한 의심과 불신이었다. 그러나 친구의 부탁에는 그로 하여금 저 자신의 불신을 스스로 부끄럽게 만드는 듯한 온유한 힘이 있었다. 쉽게 포기해버린 자를 향한 책망인 동시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위로. 그 느낌을 명료하게 표현하긴 어렵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절망 가운데서도 근거 없는 희망을 미약하게나마 불러일으키는 느낌이었다.
그 용기에 전염되기라도 한 것인지 리온도, 스테판도, 다시 진중하고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마음을 굳게 다잡고 속으로 기도했다. 선교팀과 성녀의 진검승부가 올바로 바로잡히도록. 어느 쪽의 승리가 되건 인간의 의지, 인간의 욕망, 인간의 사명감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심지어는 자신들의 선한 이기심과 종교적 승부욕조차도 제멋대로 성취되지 못하도록, 오로지 참된 신의 의지만이 공의롭게 드러나도록 간구했다.
“시작합시다, 성녀 씨.”
“호호, 기대할게요, 제왕의 아우여.”
이렇게 티아라 로페즈와 강윤혁의 대결, 그 무대의 서막이 올랐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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