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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49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9. 미혹하는 환상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1.13 | 회차평점 0 0

 

 

 

 

 

 

 

Chapter 29. 미혹하는 환상

 

 

 

 

 

 

 

   천만다행으로 납치범은 제때마다 먹고 마시고 씻을 거리 정도는 제공했다. 한바탕 고문의 공포를 맞보았던 윤혁 입장에서는 이것마저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입을 옷은 끝까지 받지 못했다.

   “저기……. 너무 춥습니다. 천 쪼가리 하나만이라도 주세요.”

   애원하듯 간곡히 부탁해보았으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대를 무저항 상태로 만드는 제일 편리한 방법이 뭘까?”

   “옷을 벗기는 것이겠죠.”

   “그래, 잘 아네.”

   “…….”

   고분고분 길들이는 첫날 이후로는 물리적인 학대는 거의 없었다. 팔다리의 움직임은 여전히 제한되었으나 일정 수준의 활동이나 운동 정도는 허락되었다. 납치범 녀석은 대부분의 시간에는 ‘환상과 현실의 틈’에서 빠져나가서 어딘가로 일 처리를 하러 떠났다. 그때마다 윤혁은 외롭게 홀로 남겨져 하염없이 시간만 보냈다. 묶인 상태에 벗겨진 몸이라 할 수 있는 시도는 거의 전무했다.

   “하아.”

   그래도 공포심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자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었다. 며칠간은 그저 생각하고 기도하는 일상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조금씩 초조한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여기서 달아나지 못한다면 끝내 고향 땅은 못 밟겠지. 타임필드 안에 그대로 갇히는 걸까?

   ‘아니, 녀석에게도 분명 하늘도시 안팎을 출입할 별도의 방법이 있을 거야.’

   진도 함부로 내부에 들어가지 못하는 보안 영역이 하늘도시이거늘, 그 한복판에 자기 진을 쳤다는 건 놈에게 모종의 특별 수단이 제공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마 시뮬레이션 우주라는 기술과 관련성이 있으리라.

   ‘최대한 환심을 산 뒤 기회를 엿보자.’

   윤혁은 권태로움도 달래고 탈출 방도도 꾀할 겸 납치범과 대화를 시도했다. 평범한 일상 이야기부터 별 의미 없는 화제까지. 그는 어느 정도는 순순히 응해줬다. 납치범인 시점에서 녀석은 결코 좋은 인간이 될 수 없었지만, 심심풀이 말동무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핑크 머리 남자의 이름은 헬리웃(Hellywood). 헬리웃은 비록 E 클래스이긴 해도 초인은 초인인지 상당한 양의 지식과 초지능을 소유한 자였다. 윤혁은 헬리웃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원래 아는 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적절히 비위만 맞춰주면 알아서 온갖 설명을 터주곤 하니, 잘만 하면 유익한 정보를 캐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던 중 헬리웃이 역으로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너 선교사지?”

   “……네.”

   “지구의 유산에 대해서는 나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어.”

   ‘기독교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헬리웃은 우주 출신이라고 했었다. 출생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지구의 종교에는 익숙하지 않겠지.

   “훌륭한 산물을 많이 남기긴 했더라.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도 했고. 그 공헌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현시대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필요치도 않고.”

   윤혁은 말없이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계몽을 일으킬 방도라면 이미 대안이 충분히 많은데 왜 굳이 그렇게 전도하는데 애쓰는 걸까. 수치와 모욕까지 무릅써가면서. 너도 참 용해. 왜 그렇게 고생하나 몰라.”

   무례한 자의 인정 따위는 불필요했기에 윤혁은 조금도 감정 상하지 않았다.

   “자기들끼리만 잘 믿으면 될 텐데.”

   “뭔가 착각하고 계시네요. 우리는 도덕적 계명이나 종교 규율을 설파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 개혁도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에요. 우린 생명을 믿죠. 종교 따위를 퍼뜨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고생은 각오하지도 않았어요. 저희 소원은 각 개인의 영혼이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후후,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헬리웃은 팔다리가 공중에 묶인 윤혁의 턱을 주물럭거리며 조롱했다.

   “뭐, 그런데 주역인 네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묶여있어서 어쩌려나.”

   “당신에게는 아쉽겠지만, 인류연합 측의 정보에 능통한 점만 제외하면 팀원 중에서 선교사로서는 제가 제일 보잘것없는 자질의 사람인데요?”

   친구들을 신뢰하는지라 사역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아, 그래?”

   헬리웃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목을 가볍게 풀었다.

   “뭐, 그래도 소용없어. 이젠 너희가 전도해도 공염불일 거야.”

   ‘뭐지?’

   허세 부리는 기색이 아니라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놈의 꿍꿍이가 뭔지 어떻게든 알아내야 할 텐데.’

   이렇게 윤혁이 고민하던 차에.

   “궁금하면 알려줄게. 어차피 너는 당분간 여기서 못 나가니까.”

   헬리웃이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영업 비밀을 답해주었다.

   “이곳이 왜 ‘환상과 현실의 틈’이라 불리는 줄 알아?”

   “시뮬레이션 우주와 현실 차원이 맞닿아 있어서요?”

   “그래, 다른 초인에게 들었나 봐?”

   어디 듣기만 했을까? 시뮬레이션 우주의 핵심부인 이데아까지 견학한 적도 있었지. 헬리웃이 들었으면 몹시 부러워하며 시기했을 말을 윤혁은 잠잠히 마음속으로 삼켰다.

   “시뮬레이션 우주는 온갖 유용한 용도로 사용되지. 그 많은 용도 중 하나가 뭔지 알아? 바로 식민지 주민들을 가두리 양식장 속의 물고기들처럼 노동시키는 거야. 정신적 노동 차출이지.”

   이 이야기는 윤혁도 진에게 들었기에 대강 안다.

   “그런데 말이야……. 모름지기 노동이란 것은 즐겁게 해야 생산력이 높지 않겠어? 이제까지의 시뮬레이션 우주 경영 지침은 항상 꿈을 매개체로 주민들에게 힘겨운 노동을 싸우는데 주안점이 있었지. 임상시험, 사회 모델 연구, 과학기술 및 물리학 법칙 연구, 뭐 이런 용도로 말이야. 원래 시뮬레이션 우주 내에서는 인적자원이 풍부할수록 아이디어 생산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거든.”

   노동은 즐거워야 효율이 높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윤혁은 헬리웃의 의도를 이해하고자 귀를 기울여 집중하였다. 어쩌면 식민지 주민들이 받는 무의식적 억압의 실체를 올바르게 깨닫게 될 수도?

   “그런데 최근 ‘문화의 창조자’이신 제3 철인왕이 획기적인 개혁안을 하나 제안했어. 시뮬레이션 우주를 식민지 주민들의 ‘행복의 장’으로 활용하자. 이왕 일 시킬 바에는 온갖 세계관들을 풍족히 누리면서 즐기도록 해주자.”

   순간 윤혁은 긴장한 나머지 자신의 목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헬리웃의 말의 맥락을 짐작해 보니 영 낌새가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가 윤혁이 머릿속으로 떠올린 단어를 선점하여 내뱉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마약과도 비슷하겠네. 안 그래?”

   “도대체 무슨 짓을!”

   공포감마저 잊고 저도 모르게 비속어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즉각 헬리웃은 분노의 표정조차 없이 윤혁이 대들지 못하도록 염동력으로 고환을 쥐어짜 거세의 악몽을 재현해주었다. 짧고 극렬한 하반신 통증에 윤혁은 몸을 움츠린 채 짙은 신음을 내뱉었다.

   “으아악! 이런 악질!”

   “뭘 놀래. 이미 우주 진출 이전의 지구 인류도 실컷 해왔던 일 아니야?”

   분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영화, 만화, 소설, 드라마, 광고, 게임, 텔레비전 쇼, 연극, 음악, 미술, 그 외의 온갖 종류의 문화 매체들. 이것들은 정보화 시대 이래로 실상 마약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전으로 작동했었다. 대중을 취기에 빠트려왔었다.

   현재도 매체로서 대중을 지배한다는 전략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저 수단으로써 훨씬 더 고차원적인 초고도 문명의 기술과 상위 차원의 능력을 활용했다는 점뿐.

   “다만 우리 쪽의 전략은 과거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지.”

   헬리웃의 자랑스러운 으쓱거림에 윤혁은 기가 찼다.

   “사람들을 허상의 세계에 가두어서 취하게 하는 일이 생산적이라고요?”

   “허상이라니. 시뮬레이션 우주를 가상현실 수준으로 이해하는 건가? 아쉽네. 미안하지만 시뮬레이션 우주는 엄연히 실존하는 Reality-Simulation Axis 상의 하위 좌표 차원이야. 엄연히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지.”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위험해요!”

   “위험이라고? 아마 넌 이 기술이 인류 역사에 기여한 ‘특이점’으로써의 위대한 의의를 절대 실감하지 못하겠지.”

   특이점이라고? 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이 올라왔다. 인간들은, 아니 초인들은 도대체 기술 진보에 왜 이토록 집착하는가. 그게 대체 뭐라고. 그렇게 아득바득 힘써 경지에 올라서서는 대체 뭘 하겠다고. 위대한 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인 걸까? 그런다 한들 절대자의 눈에는 미약한 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을. 왜 이리도 겸손해질 줄을 모른단 말인가. 분노보다 오히려 처절한 슬픔이 몰려왔다.

   “자, 보여줄게.”

   헬리웃이 손을 까닥 흔들더니 ‘환상과 현실의 틈’의 전체적인 구조가 변형되었다. 현실 차원과는 상이한 곳이어서 그런지 인간의 의지가 법칙 자체에 부분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곧 장엄한 구조물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저건?”

   “이 하늘도시와 연결된 시뮬레이션 우주(S-unvs)들이야.”

   수억, 수조, 수경, 아니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S-unvs들이 거미줄처럼 치밀하게 얽혀 있었다. 인간의 인식력으로는 그 광경을 전부 담아낼 수도 없었다. 5세대 시뮬레이션 우주에 자가 진화 및 자가 개조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고 했던가. 그 탓이었을까? 언제 이렇게까지 팽창했단 말인가? 윤혁은 시뮬레이션 다중우주의 진화가 낳은 결실을 목도한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만, 이게 고작 이 하늘도시 하나에 연결된 분량이라고? 그러면 대체 실제 시뮬레이션 우주들의 총합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 거지? 그것들을 한꺼번에 컨트롤하는 이데아의 본체는 또 얼마나 강력하고?’

   어안이 벙벙한 윤혁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헬리웃은 맘껏 뽐냈다.

   “의외로 인류 문명의 위대한 지평의 확장이 가장 활발하고 경이롭게 이루어지는 최전선의 현장, 그곳은 물리적 정복 사업이 이뤄지는 은하계 너머의 우주가 아니야. 바로 이곳 환상계이지.”

   헬리웃의 설명에 따르면 식민지 주민에게는 집단적 무의식과 사상의 방향을 제어하는 ‘사상제어의 표식’, 즉 윤혁이 이미 그 존재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그 표식과는 별개로 ‘환상의 표식’이라는 또 다른 요소가 새겨져 있었다. 지구 시민과 달리 우주 주민들이 손쉽게 시뮬레이션 우주들에 접속할 수 있던 이유가 바로 그 환상의 표식에 있었다. 말하자면 환상의 표식이란 현실과 S-unvs를 오가는 증표이자 비자 혹은 통행권인 셈이다.

   현재의 시뮬레이션 우주는 6세대 버전. 어찌나 기술이 보편화되었는지 주민 한 명 당 최소 1억 개 이상의 개인용 S-unvs가 존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에 컴퓨터란 발명품이 희귀 재화에서 시작해 흔한 개인 소유로 확대된 것과 비슷했다.

   이렇게 개인과 집단과 세계가 소유한 무수한 S-unvs들 가운데는 현실의 지구 역사를 모방하여 대체 역사를 구축한 것도 있었고 아예 별도의 세계관을 구축한 것도 있었다. 양자역학 식의 평행 우주를 본떠 여러 가능성의 미래가 끝없이 분지되는 현실을 구축한 모델도 있고, 보조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인격을 복제하거나 이식해내는 일을 성사시킨 모델도 있다.

   다시 말해서 그 활용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모든 망상을 버젓이 현실과 융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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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처음 이 초고를 썼을 때는 아직 메타버스 같은 게 유명해지기 이전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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