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50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9. 미혹하는 환상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1.15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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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웃은 오늘날의 극대화된 시뮬레이션 우주가 이제 어떤 괴기한 일까지 실현 가능한 지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소위 세간이 말하는 회귀, 빙의, 환생, 차원 이동, 시간여행 따위의 모든 종류의 망상을 실제 현상으로 일으키는 것마저 가능하지. 한 마디로 개개인이 자신만의 세계에서 신처럼 행세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가짜 속에 빠지는 게 무슨 유익이 있죠?”
윤혁의 반박에 헬리웃은 아무런 해명도 없이 동문서답으로 응수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말이야, 개인별 S-unvs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
그의 증언에 따르면 여러 사람의 S-unvs가 단순히 개별 단위로 존재하는 수준을 넘어 서로 유기적으로 얽힘으로써 공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도 가능하다고 한다. 더 나아가 공공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다차원적 S-unvs도 이미 숱하게 생성되었단다.
또한 5세대 버전의 장점이 6세대에도 업데이트된 덕에 한 S-unvs가 직렬 방식이나 병렬 방식으로 증식하는 일도, 이를 통해 스스로 다양화되고 심화되는 일도, 더 깊고 고차원적인 S-unvs를 자가생산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는 사람들이 체험 가능한 세계관의 폭이 무궁무진하게 확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저 안에서는 자신만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고, 타인과의 풍부한 교제도 누릴 수 있고, 창조성과 역량도 펼칠 수 있지. 지식과 지혜의 성장도 이룩할 수 있고 발명품과 사상도 생산할 수 있어. 더욱 놀라운 건 그렇게 경험하고 만들어낸 것들이 전부 현실 세계의 발전에까지 반영되어 이바지한다는 점이지. 이거야말로 진정한 천국이 아닌가?”
그는 여기에 조롱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희들이 말하는 허황한 천국보다 낫지.”
“그래봤자 사람들의 영혼을 비참하게 망가뜨릴 뿐이죠.”
“아, 참고로 6세대 버전은 실체화 기능까지 보강된 건 알지? 가상의 세계관을 실제 우주로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어. 이미 너도 실컷 겪어봐서 알 테지만.”
칼티엔뉴르의 마법과 비슷한 맥락일까?
“이쯤 되면 천국과 비교해도 어떤 면에서든 안 밀리지.”
헬리웃의 호언장담을 들으며 윤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심해. 이제 보니 당신은 21세기에나 유행하던 싸구려 소년 만화에서나 등장하는, 망상에 젖은 중증 메시아 콤플렉스 악당이었군. 어리석어.”
그리고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거세 위협의 고통을 한 번 더 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윤혁도 굴하지 않았다. 헬리웃이 고문할 때마다 염동력을 일부러 약하게 조절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물리력도 가하긴 했으나 그보다는 말초신경 전기신호를 미세하게 조작하는 방법에 방점을 두어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함부로 윤혁의 신체를 해칠 권한은 없는 모양이다.
“이 세계는 내 담당이지만 다른 하늘도시들에도 이미 ‘환상제어자’가 파견되었지. 너희가 어디로 선교하러 가도 마찬가지야. 1억 개의 하늘 도시 중 최소한 1% 이상은 나와 같은 자율적 사고가 가능한 환상제어자가 활동 중이지.”
통증 가운데 신음하던 윤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환상제어자? 그들도 당신처럼 초인입니까?”
“일부는 그렇지만, 대다수는 인공지능이야.”
이번에는 기계가 인류를 환각에 빠트리는 디스토피아 영화인가.
‘그나저나 하늘도시의 개수가 1억 개라고?’
처음 출발할 당시에는 고작해야 2백만 개 남짓했었다고 들었거늘. 대체 언제 추가로 건설한 걸까? 우주선도 아니고 무려 세계이거늘. 최근 초은하단들을 정복하면서 경제력과 생산력이 폭증한 덕분일까?
“제3 철인왕이 인류연합 대표에게 정식 승인받은 대규모 프로젝트가 있어.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3 철인왕이 환상제어자들을 대거 파견했어. 이곳의 시간 기준으로는 약 57일 후에 최종 시행 예정이군.”
의미가 불명확한 말에 초조감이 들며 가슴이 떨렸다. 이곳뿐 아니라 우주 전반에 걸쳐 뭔가 위험한 계획이 전개되고 있다. 대체 뭘까? 윤혁은 몹시 애가 탔다. 적이 이렇게 술술 계획을 다 말해주는데도 잡혀있는 탓에 아무런 도움도 못 주는 현실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무력히 나신으로 결박된 채 힘없이 축 늘어진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헬리웃이 비아냥거렸다.
“심심한데 나와 내기라도 할래?”
“내기?”
“너 무려 그 성녀와도 내기했다며? 어떤 행운이 뒤따라서 이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잘나서 이긴 것이 아니었음을 이번 기회에 보여줄게.”
헬리웃은 비참한 처지에 처한 자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재주가 있었다. 윤혁은 이를 아득 깨물었다. 곧 헬리웃은 환상과 현실의 틈을 재조작하여 영역의 형태를 뒤바꾸었다. 이번에는 시뮬레이션 우주뿐 아니라 현실 차원까지 그 위에 겹쳐졌다. 두 영역은 아예 연속된 스펙트럼마냥 얽혔다.
‘S-unvs가 뇌 속에서 벌어지는 가상현실 프로그램과는 본질적으로 원리가 다르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압도감에 얼이 빠진 윤혁.
“저쪽을 봐봐. 네 친구들이 일하고 있네.”
경탄하던 그에게 헬리웃이 말을 걸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영역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뮬레이션 우주와 현실의 겹침으로 인해 투영된 영상. 과연 그쪽에 시선을 집중시키자 흐릿하게 점처럼 보이던 리온과 루디아와 스테판의 모습이 확대되어 선명하게 보였다.
“아직도 포교 활동에 애쓰는 모양이야.”
“친구들이…….”
“너는 이렇게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 말이지.”
이간질하려는 건가? 윤혁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만약 저들이 단 한 명이라도 개종자를 얻는다면……. 그래, 그 문제를 두고 우리 한 번 시합해보는 게 어때?”
귀가 쫑긋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호언장담을 할까?
“한 명이라도 저들의 말을 귀담아듣는 자가 있다면 너를 즉시 풀어주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난 거짓말은 안 해.”
뻔뻔스럽게 호언장담하는 헬리웃.
“그리고 마지막까지 아무도 저들의 말을 안 들으면…….”
그는 윤혁의 반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게서 저걸 받아 가지.”
이제 어느 정도는 소유권 종속으로부터 느슨히 풀려난 것인지 반지는 윤혁으로부터 약 3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둥둥 떠 있었다. 만약 저 물건을 잃으면 윤혁은 다음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진과 맺은 약속도 지킬 수 없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저 반지가 가진 강력한 힘이었다. 그것이 지극히 위험한 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막아야 할 당위성은 충분했다.
“그 힘으로 뭘 할 생각입니까.”
“거짓말은 안 한다고 했었지. 저 힘을 빌려서 내 계획을 진행할 거야.”
“제3 철인왕이라는 자가 이미 환상 제어자들을 파견했다지 않았습니까? 그자의 계획은 이미 전개되고 있던 것 아닙니까? 그자가 이 반지를 취해오라고 당신에게 지시했습니까?”
“아니, 내 독단이야. 난 그녀와는 계획이 조금 다르거든.”
도대체 그녀의 계획은 뭐고 저자의 계획은 뭘까? 상대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으니 추리할 만한 단서가 당최 없어 답답했다. 어느 쪽의 생각대로 되건 저들의 뜻이 이뤄진다면 긍정적인 일이 없을 것임은 자명했다.
‘대단히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윤혁은 계산했다. 자신이 이 내기를 수락해서 손해볼 일은 없다. 어차피 저자에게 결박당한 처지이니 저자는 자기 멋대로 행동할 것이 뻔하다. 내기 수락 시 반지를 빼앗길 리스크가 증가하긴 하지만, 내버려둬도 언젠가는 허락 없이 가져가려 들리라. 또 윤혁이 이겼을 시 헬리웃이 약속을 어기고 보상으로 내보내 주지 않더라도 어차피 본전인 상황에 불과하다.
‘어차피 이 내기는 불가피해.’
고심 끝에 윤혁은 내기를 수용했다.
*
그러나 그 무렵, 진리와 말씀을 겸허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전파하던 선교사들은 예상치 못한 장애물과 맞닥뜨렸다. 위정자들의 탄압, 무력시위, 교활한 거짓 선지자들의 방해, 불경건한 오컬트적 관습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방해물이었다. 이번에 맞상대할 난관은 전도를 받는 사람들 그 자체였다. 그들은 듣긴 듣되 도무지 믿지 않았다.
복음을 듣고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허무맹랑한 망상이라고 비판하거나 지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흥미와 관심을 보이는 이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진지하게 자기 죄를 뼈저리게 깨닫고 슬퍼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간혹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치 체계 내에 적절히 수용해 변형하는 이는 있었지만, 전적으로 마음으로 복종하는 이는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 것인가? 선교사들은 여러 지역, 문화권, 문명을 순회하며 한참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고 만난 끝에야 문제점의 윤곽을 어렴풋이 발견하였다. 그 세계 주민들은 하나같이 깊은 망상에 젖어있었다. 아니, 너무도 생생하고 합리적인 증언인지라 과연 망상이라고 부를 수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듣는 자들마저 그 증언들이 현실이라 느낄 정도였다.
먼저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런 이들이 발에 치일 만큼 많았다. 그들의 증언만 들어보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환상 세계들이 실존하는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나는 A라는 세계에서 몸 그대로 이동해왔다.’ ‘나는 B라는 세계에서 정신만 갖고 들어왔다.’ ‘나는 C라는 세계에서 D라는 세계를 거친 후에, 다시 C의 과거 시점으로 돌아갔다가 이곳에 왔다.’ ‘나는 총 25억 번의 삶을 거친 후에야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착륙했다.’
이 외에도 온갖 기괴한 증언이 난무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제법 체계적이고 이치에 잘 맞는 내용이었다. 나름의 역사성, 논리성, 증빙 가능성, 합리적인 연결성을 띠고 있었고 물증 또한 충분했다. 쉽게 말해 자신이 빙의자나 환생자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모두에게 저 나름대로 존재했다. 이를테면 장래의 흐름을 짐작한다던가, 현실과 다른 세계관의 지식과 사상사와 역사를 지나치게 과학적으로 상세히 알고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망상 장애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웠다.
“스테판 씨, 혹시 짚이는 바가 있으세요?”
리온은 혹시나 스테판이 겪어온 것과 같은 정체 모를 변칙 요소가 모종의 이유로 보편화되어 확산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스테판도 자신도 모르는 원리로 여러 세상을 옮겨다니며 기억들을 얻지 않았던가.
“아니, 내 경우와는 미묘히 다른 것 같소. 내 머릿속에는 각 하늘도시의 관리 시스템에 관한 실제적인 정보가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소. 하지만 이곳 주민들의 체험담을 들어보니 나와는 확연히 다르오. 뭔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전전한 것만 같소.”
스테판이 불완전한 옛 기억을 더듬어가며 비교해보았다.
“아쉽지만 지금 내 기억과 경험만으로는 저들의 증상의 본질을 해명키 위한 충분한 참고 자료가 되지 못하오.”
“그렇군요. 윤혁이라도 우리 곁에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혹 그가 세계의 비밀과 관련된 키워드를 알려줬을 수도 있을텐데, 지금으로써는 방도가 없네요.”
“안타깝게 되었소”
일행은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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