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51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29. 미혹하는 환상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1.18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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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세히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스테판에게도 희미한 직감이 한 가지는 있었다. 하지만 모든 정보의 투명성이 불확실한 마당에 혼란 정보를 더하고 싶지 않았기에 발설은 삼가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현실과 다른 세계를 전전하며 여행했노라고 주장하는 이곳의 주민들. 어쩌면 스테판 자신도 식민지 주민 출신이니만큼 언젠가 과거에 유사한 체험을 직간접적으로 겪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실제로 그에게는 ‘꿈’이라는 것과 관련된 불투명한 기억의 한 조각이 있었다.
“최대한 내 무의식속에 파묻힌 단서를 찾아보려 노력하겠소.”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임무의 본질은 어차피 현지 조사가 아니었다. 제한된 지식과 역량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 손에 닿지 않는 영역은 그저 섭리에 맡기고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선교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 와중에 선교사들은 그 지역에 유행하는 다른 유형의 망상병도 전해 듣게 되었다. 자신이 시간의 인과율을 거스르고 과거와 미래를 오갔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수두룩 나타났다.
대표적인 유형은 자신이 한 번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했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한 술 더 떠 미래로 이동하여 경험을 쌓은 후 돌아왔다는 말, 수천 번의 시간 회귀를 경험했다는 설, 죽음이나 사고 등의 특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마다 회귀를 겪었다는 설도 있었다. 원하는 때마다 특정 의식(儀式)을 행하여 시간을 돌리는 능력을 지녔다는 자도 있었다.
사람마다 자신이 겪었다는 미래의 전개 형태를 묘사하는 법도 다양했다. 회귀를 할 때마다 미세한 변수만으로도 전혀 다른 형태로 역사 전개가 뒤틀어진다는 주장도 있었고, 그와 반대로 일어날 사건은 어떻게 역사가 전개되어도 반드시 일어난다는 증언도 있었다.
하나의 고정된 시간대만 존재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시간축이 여러 갈래로 끊임없이 분화되어 무수한 평행세계가 펼쳐진다는 말도 있었다. 자신이 그 평행세계를 전전했다는 자도 있었다. 한 마디로 온갖 엇갈리는 가설이 난무했다.
“망상장애도 유행병처럼 될 수 있는건가?”
당황한 리온이 의아해하며 중얼거렸다.
“망상이 맞긴 할까? 그러기에는 증언이 하나같이 구체적인걸.”
타인의 감정적 반응을 민감히 파악할 줄아는 루디아는 대강 이곳 사람들의 말이 막연한 망상이나 거짓말이 아님을 느꼈다. 그들은 맨 정신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어떤 실체가 이 현상의 막후에서 무대를 전개하고 있는 중일까? 지금껏 겪어온 기상천외한 일들을 생각해보니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 어떤 환상도 사실처럼 되는 세계라……. 섬뜩하네.”
상황이 이러하니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진리로 여길 턱이 없었다. 어떤 진실을 못 믿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비슷한 가짜 소문을 수없이 양산하여 맞불을 놓는 방식이라고 했던가. 지금 상황이야말로 그런 격이었다. 환상의 세계에 잔뜩 취해 현실 구분이 불가능한 자들에게는 진리가 발을 디딜 마음 속의 틈이 없다. 앞길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스테판은 둘의 대화를 듣던 중 의견을 추가로 제기했다.
“루디아 말대로 사람들의 주장은 망상이 아닌 것 같소. 저들이 일련의 의미 있는 정신적 활동을 수행했었다는 증거가 수두룩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체험들과 업적들을 기억하고 있잖소.”
이에 리온과 루디아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좀 더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스테판은 중요한 핵심을 지적했다.
“저들은 저들이 말하는 소위 ‘다른 세계, 다른 공간, 다른 시간대’를 경험하면서 실제적인 정보, 경험, 지식, 기술 등 유의미한 소프트웨어를 획득했소. 단순히 머릿속 허상이었다면 그 유의미한 정보를 현실에서 재현해내지는 못하오.”
과연 해당 하늘도시 주민들에게는 이계(異界)를 경험하며 얻어온 선명한 증거물들과 유품들이 있었다. 마법이 발전한 세계를 다녀왔다던 이들은 부분적이나마 마법을 다루었고, 과학이 발전한 세계를 거쳐왔다던 이들은 현지 수준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탁월한 지식을 선보였다. 시간축을 여러 번 이상 경험했다는 이들은 놀라우리만큼 장래 대처 능력이 뛰어났다.
이런 예시들 말고도 서로 다른 세계 간의 실체 교류가 실존했다는 간접 증거는 일일이 셀 수 힘들 만큼 많았다. 리온은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려보았다.
“그렇다면 저들은 모종의 방법으로 다른 하늘도시에 건너갔던 것일까요?”
그러나 스테판은 즉각 그 가설을 기각하였다.
“아닐 듯하오. 하늘도시 간 물리적 교류는 상부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오.”
이에 리온은 다른 추측도 구상해보았다.
“그러면 저나 루디아처럼 인형 혹은 다른 수단을 활용해서 공간적 장벽을 넘어 정신을 교류하는 방법은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가능성은 있으나 그렇다기에는 저들이 증언하는 실존 세계들의 개수가 지나칠 정도로 많소. 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증언을 전부 다 사실로 인정해버리면 세계 개수의 합계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이 되오.”
루디아도 맞장구를 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요. 게다가 시간을 되돌이키는 조작이라니,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그것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진실이리라는 상상이 안 되어요.”
리온이나 스테판이 생각하기에도, 그 어떤 기술력으로도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바꾼다는 ‘절대적 인과율 위배 행위’는 불가능해 보였다. 제아무리 인류 문명이 발전하더라도 그것만은 영원히 신의 영역으로 남겠지.
‘그럼 당최 무슨 원리로?’
추리는 점점 더 오리무중의 안갯속에 빠졌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급기야 시공간을 뛰어넘었노라는 망상적 괴담보다 더 충격적인 경험담까지 속출했다. 소위 자신이 존재적 한계의 벽을 넘어 ‘상위의 존재로서의 승화 경험’을 겪었다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현실 세계보다 훨씬 더 시공간적으로 자유로운 고위 영역에서 인간 뇌의 한계를 넘어선 정신 활동을 경험했노라고 말했다.
“위험한걸. 이건 마치 영적 체험 묘사와 비슷하단 말이지.”
리온은 의심을 제기했다. 지금 저 사람들이 영적인 경험(Spiritual experience)에 심취해있는 것이 아닐까? 과거 지구에도 종종 마약류의 도움을 받아서 영혼들과 연접하려고 시도했던 자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성경은 이런 류의 행위를 가증한 일로 정의하고 금지한다. 금지된 연접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영들은 모두 하나님을 배반한 악한 영들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저런 경험을 겪었다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극소수잖아. 절대다수의 인구가 일괄적으로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은 조금 이해가 안 돼.”
루디아는 이것이 단순한 영적 현상이기에 앞서 뭔가 중요한 다른 요소가 개입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기했다. 그러자 리온은 이에 대해서 다시금 스테판에게 자문하였다.
“혹시 조금 떠오르는 단서가 있으신지요?”
“있소. 사람들의 증언을 계속 듣다 보니 희미하게나마 한 가지가 생각났소. 하지만 물증에 기반한 것은 아니니 신뢰할 수는 없을 거요.”
“모르는 것보다는 낫죠.”
마침내 희미한 머릿속 잔상에서 안개를 걷어내는 데 성공한 스테판. 그는 꿈을 매개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보편적 시스템인 ‘실존하는 허상 세계’라는 것이 존재함을 알려주었다.
“내가 그 체계에 대해 아는 바는 지극히 제한적이오.”
그가 태어났을 당시는 아직 ‘실존하는 허상 세계’가 온전한 체계를 갖추기 이전의 태동기였기에 그도 자주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이레귤러로 변질시킨 이후로는 내재된 표식이 훼손되는 바람에 ‘실존하는 허상 세계’에 들어갈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렇기에 현재의 주민들이 어떻게 그 세계를 체험하는지는 그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나마 있던 예전의 기억도 많이 지워져 버렸소.”
“비교적 최근에는 진입해본 경험이 없나요?”
“얼추 기억하기론 아주 가끔, 어쩌다 한 번씩 정도는 우연히 꿈을 통해서 그곳에 들어갔던 것 같소. 그러니까 이레귤러가 된 이후로도 말이오. 아주 얕고 짧은 접속에 불과하다만.”
이에 리온은 좀 더 구체적인 묘사를 요구했다.
“실존한다면……, 그 실존의 의미가 무엇이죠?”
“말 그대로의 의미요. 망상이나 헛것이 아니라 정말로 고유의 실체를 갖고 있다는 뜻이오. 물론 현실 세계의 물리학과는 다른 운영 원리가 적용되지만,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이성적인 법칙이 실제적으로 작용하오.”
“혹시 영적 세계와는 관련 있습니까?”
“모르겠소. 나는 영에 대한 앎이 부족하오. 하지만 약간 다른 듯하오. 실존하는 허상 세계는 인간들이 직접 관리하거나 제어할 수 있소.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조작하거나 변형하거나 확장하거나 삭제하는 일도 할 수 있소.”
만일 스테판의 기억에서 유추한 추리가 정확하다면 지금 세 팀원은 대단히 위중한 문제와 맞닥트리게 된 셈이었다. 리온은 두려운 직감을 받았다. 역사 전반에 걸쳐 끈질기게 인간을 미혹해온 악명 높은 적. 지구의 근대사를 살펴온 리온은 누구보다도 그 위험성과 심각성을 깊이 알았다.
“오랜 원수의 검이 드디어 궁극의 경지로 거듭났군요.”
대중 매체. 인류의 오랜 친구이자 적.
“설마 이렇게까지 진화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이제는 ‘실존하는 환상 세계’라는 형태로 옷을 바꿔 입은 것일까?
“대중 매체란 것이 그렇게까지나 위험한 존재요?”
“위험하다고요? 신자건 불신자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최악 최강의 병기는 의외로 무신론도, 타 종교도, 과학주의도 아니에요. 매일같이 마약처럼 사방에서 스며들어 사람의 정신을 파고드는 대중 매체들이죠.”
그는 대중 매체의 역사에 대해 루디아와 스테판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두 사람은 출신이 출신이니만큼 지구의 고전적 미디어와 친숙하지 않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설명을 귀담아들었다.
문제의 시작은 20세기 후기 무렵. 전자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TV를 포함한 영상기기가 범람하였고 사람들은 그 재미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대중 매체는 연기하는 배우나 연예인에게는 부와 명예를 얻는 수단이 되었고 대중에게는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즐거운 오락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영악하게도 ‘어둠의 세상 주관자’는 바로 이러한 미디어를 자신의 최강의 무기 겸 매개물로 삼았죠. 인간들의 뇌리에 잘못된 생각들을 심어주기 위한 도구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루디아와 스테판의 표정이 점차 심각하게 굳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사고방식을 심어주건 큰 상관 없었죠.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의 말씀에만 거부감을 느끼도록 만들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실제로 온갖 반역적인 생각들을 진리처럼 여기게끔 하는 풍토가 범람하였고 미디어는 악마의 설교를 확산시키는 일등 공신으로 자리매김했어요.”
미디어 속에 은밀히 담긴 오컬트, 사탄 숭배, 인본주의, 유물론, 반역적인 사상, 사회를 향한 분노와 적개심, 쾌락주의, 행위 기반 구원, 속세주의 등의 온갖 더러운 먹물. 그 구정물을 매일 접하면서 사람들의 무의식적 사고는 차츰 가랑비에 옷 젖듯 오염되었다. 자연스레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 성경의 가르침, 절대적인 가치체계와 윤리 기준을 고리타분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며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배격하게 되었다.
“오늘날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아니, 훨씬 더 심해졌지.”
“하지만 이것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 너무도 암울하고 절망적인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주님은 우리더러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걸까?”
루디아의 질문에는 갑갑한 마음이 절실히 녹아 있었다. 든든한 힘이 되었던 윤혁은 납치되었고 하늘도시와 그 주민들의 마음은 정체 모를 ‘허상의 권세’에 잠식되었다. 미디어라는 이름의 인류의 걸림돌은 불가항력적인 수준에 이르기까지 거듭나 이제 그들의 선교의 길마저 위협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답을 찾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리온은 단호하게 답했다.
“아마 이런 어둠의 흐름을 우리 힘으로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하겠지. 성경도 종말에 가까울수록 더욱더 악한 세대가 나타나리라고 예언했어. 하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이 이 악한 계획의 일부분으로 포섭되는 것만은 막을 수 있겠지.”
그럼에도 어차피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마지막 날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경건한 삶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아무리 가망성이 없더라도 사람들에게 진리와 사랑을 증언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
“계속 우리 임무를 멈추지 말자.”
설령 모두가 귀를 굳게 닫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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