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5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0. 경계 붕괴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1.22 | 회차평점 0 |
Chapter 30. 경계 붕괴
아렌과 얀을 비롯한 삼백 명의 섬 주민이 선교팀 지구 본부를 방문했다.
“얘야, 우리가 왔다.”
“할아버지들…….”
루디아는 그간의 마음 고생을 해갈하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래, 우리가 네게 너무 큰 짐을 맡겼구나. 미안하다.”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보탬이 되어주지 못했어.”
전후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루디아는 지구에 있는 본체로 의식을 옮긴 뒤 현장에서 활동 중인 선교팀이 마주한 큰 위기에 관한 소식을 대대적으로 전했다. 윤혁의 납치에 관해서는 이미 지구의 동료들도 들어 알고 있었지만, 환상의 범람이라는 새로운 위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에 그 심각성의 전달이 필요했다. 당장 우주로 갈 수 없는 지구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중보 기도뿐이었지만, 그것만이라도 당장은 시급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섬에서 온 메시아닉 유대인들도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에 본부에 대기 중이던 유대인들 몇몇이 하와이 섬에 귀환하여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평소부터 세계 선교에 긍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어른 세대를 주축으로 이방인 교회와 행동으로 협력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방인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행성 바깥에서 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정치 세력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죠. 우리는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본래라면 우리가 맡았어야 했던 책임을 그들이 더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서도 종말 때 필연적으로 임할 ‘온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만 온 신경을 몰두하기에 앞서 ‘천하만국에 예슈아의 생명이 전달되는 일’을 더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번데기가 껍질을 벗어 나비로 탈바꿈하듯, 민족을 아끼는 마음만을 주축으로 세워졌던 영혼 구원의 열망이 이제는 인류애에 기반한 열망으로 도약하였다. 유대인들의 마음은 윤혁과 동료들의 위기를 계기로 한 차원 더 높이 성장했다.
“물론 우리는 복음의 그라운드제로인 ‘시작의 땅’, 곧 우리 고향인 이스라엘을 벗어나 멀리 흩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처럼 몸소 머나먼 우주로 나가기에는 여건상의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행성에 거하는 인간들에게는 우리가 책임감을 안고서 발벗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방인 전도자들이 지구에서 거절당했으니 이제는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들이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마음 위에 되새기고 행동으로 표현하자. 이러한 일념 하에 뜻으로 충만한 메시아닉 유대인 여럿이 본격적으로 소매를 걷고 나섰다. 그들은 루디아가 머무르는 선교팀 본부를 방문할 일꾼들을 동포 가운데서 모집했다. 총 삼백 명 가량이 세계 선교에 동참하기 위해 추가 선발되었다.
한편 배교하지 않고 신실함을 지키던 지구 전역의 교회들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움직임이 개시되었다. 두려움과 망설임 때문에 우주 진출 임무에 동참하지 못했던 많은 청장년 세대가 뒤늦게나마 선교팀과의 동역에 발을 담갔다. 그들은 우주로 나아간 팀을 물심양면 지원하고자 본부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시작의 땅 출신 백성들과 머나먼 땅의 이방인들이 지역이라는 경계선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초월하여 한자리에서 한 마음으로 교차해 미래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강윤혁이라는 희망의 구심점이 사로잡힌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지구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새 소망이 솟아났다.
루디아는 메시아닉 유대인들과 이방인 신자 전원을 모아놓고 기도 모임을 이끌었다. 리온은 현지에서 힘겹게 전도와 설교를 반복하느라 지구에서는 피로 회복에만 전념해야 했기에 중보 기도를 이끄는 일은 자연히 전적으로 루디아 몫이 되었다. 기도하면서 그들은 절망을 잊고 하나가 되었다. 자기 의지나 욕심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소망으로 품었다.
“제 소중한 친구가 생사불명 상태에 있어요. 부디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가 위기에서 건짐을 받도록 간구해주세요. 그리고 은하 너머의 주민들이 부디 거짓된 현혹에서 벗어나 진리를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주세요.”
당장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그랬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했다.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과 기도에 매달렸다. 수십 일이 지나도록 깜깜무소식이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아렌과 얀은 아이가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고 크게 놀랐다.
많은 이들이 아파하는 그녀의 슬픔에 공감하였다. 그 공감은 무익한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고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은 매일 모여 각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고 토의하고 예배와 기도에 힘썼다. 또한 그들은 장차 임하게 될 최후의 선교 계획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하나님, 제발 저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기도할 때마다 루디아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차라리 저를 징계하시는 일이 있더라도 그를 구해주세요. 우리에게는……, 저들에게는……, 죽어가는 인류에게는 그의 역할이 아직 필요해요. 그리고 저에게도 그가 필요합니다.”
윤혁과 약속한 공동의 소망, 아직 그 비전의 현실화를 보지 못한 지금, 그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가 보고 싶었던 광경을 그녀도 간절히 소망하는만큼, 그 또한 그녀의 희망을 간절히 소원하고 있으리라. 비록 그를 구하는 일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으나 그 대가로 그분께서 그녀 자신이 치를 희생을 요구하신다면 얼마든지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
그 사이, 하늘도시의 내부에서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리온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경계 붕괴 현상이 대단히 심각한 징조임을 어렴풋이 인지했다. 허구 속의 세상이 조금씩 현실 세계로 침투하고 있었다. 스테판의 증언대로 이 세계 사람들이 빠져 있는 덫은 허상이나 가짜가 아니었다. 조금 다른 의미이지만 실존하는 세계였다. 그 실존하는 허상 속에 있던 배경이나 인물이나 사건들이 현실 세계로 튀어 올라오는 중이었다.
“마치 수억 개의 소설들이 현실과 융합하려고 시도하려는 것만 같아.”
아직은 진척이 많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국소적으로만 징조가 보였지만 머지않아 이러한 붕괴 현상이 보편적으로 퍼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주민들은 점차 자신들이 믿는 모든 공상이 현실과 다를 바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이런 믿음이 전염병처럼 만연했다. 모든 사람 각자가 ‘더 높은 실체’와 교제함으로써 각자의 ‘고유의 현실’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믿음.
“스테판 씨도 이 현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죠?”
리온은 확인하고자 물어보았다.
“이런 단계까지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오. 아니, 원리조차 전혀 모르겠소. 이건 단순히 인공생명체나 로봇 따위의 것을 응용한 눈속임이 아니오. 허상에 있던 것이 실제로 현실 위로 튀어나오고 있는 것 같소.”
“정말 심각하군요.”
어쩌면 이곳의 상황이 조만간 도무지 회복 불가능한 심각한 지경까지 전락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장르를 막론하고 온갖 공상과 허구가 죄다 현실 세계와 합쳐지려는 상황. 이 마당에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는가.
“리온 당신조차도 가망이 아예 없다고 보시오? 우리가 전하는 주님의 가르침과 복음으로도 저들을 일깨울 수 없단 말이오?”
“미안해요. 저도 자신이 없어요. 최선은 다해보겠지만……, 지금까지 방문해왔던 그 어떤 세계보다도 미혹의 진이 굳건해요. 성경에서도 분명 마지막 때에는 너무도 속임수의 유혹이 심한 나머지 미혹의 권세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심을 받은 자들도 넘어뜨리려 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셨죠.”
“지금이 바로 그때이겠소?”
“글쎄요. 모르긴 해도 매우 근접해 보여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의 현실 구분 능력은 서서히 파괴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만들어낸 온갖 상상에 취했다. 스스로의 마음속에 만들어낸 온갖 우상들이 실체화되자 그들은 그것들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테판은 이러한 기괴한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과거의 기억을 아주 조금씩 되찾았다. 그는 급기야 과거의 자신이 ‘실존하는 허상 세계’에 접속했던 감각마저도 회상해내었다. 자신이 있던 시절과 지금 시대는 너무도 기술적 격차가 벌어졌기에 과연 똑같이 적용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레귤러가 됨으로써 ‘사상제어의 표식’에 대해서도 제어 능력을 얻었으니 혹시나 ‘환상의 표식’도 제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별안간 들었다.
“과연 매체(mass media)라는 것이 악하기만 한 것이오?”
“네?”
갑작스러운 스테판의 질문에 리온은 당황했다.
“아,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위험한 것은 사실이죠.”
왜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질문일까?
“허상, 즉 픽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행위 자체가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소? 결국,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소? 같은 기술을 선하게 쓸 수도, 악하게 쓸 수도 있듯이 말이오. 누군가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메시지를 픽션 속에 심어 넣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소.”
이 말도 분명 일리가 있었기에 리온도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했다.
‘물론 그야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인류 역사상 매체가 그렇게 경건하게 쓰였던 순간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만큼 적지 않을까?’
어느 시대이건 대중 매체를 제작하는 자의 대다수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 곧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자연히 생산자의 생각과 사상이 필연적으로 반영되는 창작물의 특성상, 그들이 만들어내는 매체 안에는 반드시 인간 본연의 짙은 죄의 성질이 담기기 마련이다.
“스테판 씨의 말은 옳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 인간은 불신자예요. 구원을 받기 전에는 누구든 그 영혼은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죠. 그분이 가르쳐주시는 기준과 법도를 철저히 거절하죠. 자연히 마귀가 그 영혼을 강력하게 지배하기에 반역하는 생각이 저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 속에 넘치게 돼요.”
심지어 거듭난 이후로도 그 옛 본성에 휘둘리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본 적이 아예 없는 인간들에게서 선량한 열매를 기대하기란 무리이지 않을까? 특별히 사상의 창작의 영역이라면 더욱더.
“세상의 대중 매체는 대부분 그런 자들의 손에서 빚어져요. 드물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매체를 통해 전하려고 시도했었지만, 현실적인 고난과 핍박과 편견 등의 이유로 묻혀버리기에 십상이었죠.”
게다가 지금은 사실상 대중 매체를 생산하는 주체의 자리에 그리스도인이 아예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실존하는 허상 세계’의 정체와 주인이 무엇이건 간에 이 역시도 인류연합의 세상적 시스템에 연루되었을 테니 경건하고 거룩한 메시지가 담겨있을 리는 만무했다. 이것이 리온의 내린 판단이었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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