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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5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0. 경계 붕괴 (4)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1.29 | 회차평점 0 0

 

 

 

 

 

 

 

 

*

 

 

 

 

   그 시각, 현실 차원에 머무르던 리온과 루디아와 스테판은 세상의 격변을 보고는 기겁하였다. 하늘도시 내부 전체가 환상의 세계에 물들어가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하늘 위에 전혀 다른 천지가 펼쳐졌다. 그것들은 서로 겹치고 섞이며 혼합체를 만들어갔다. 물리 법칙의 경계가 붕괴하는 것이 섬칫 느껴졌다.

   “조심해.”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루디아의 손을 재빨리 리온이 붙잡았다.

   “그나저나 이건 설마!”

   “현실 세계가 실존하는 허상 세계들과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것 같소.” 

   스테판은 당황을 억누르고 의연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위기와 맞닥트린 지금 기회 또한 뚜렷해졌다. 드디어 실존하는 허상 세계, 아니 ‘시뮬레이션 우주’라는 실체에 대한 그의 옛 기억이 선명해졌다. 이 상황은 스테판에게 있어서 침몰의 위험인 동시에 역전의 발판이었다. 기억을 찾은 여파로 그는 어떻게 해야 허상 세계로 잠수할 수 있을지 그 전략을 깨달았다.

   “내게 기회를 준다면…….”

   스테판은 동료들의 허가를 위해 부탁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예전의 스테판이었다면 무작정 단독으로 행했겠지만, 지금은 신뢰와 유대감과 의지로 엮인 동료들과 더불어 모든 계획을 공유하고 싶었다. 신중한 성격인 만큼 반대할 가능성이 크겠지만, 이미 넌지시 암시했듯 리온도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으니 조금만 더 간곡히 설득한다면 허락될 듯했다.

   “문제의 근원으로 쳐들어가서 뿌리에 다가간다면……?!”

   그러나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깜짝 놀랐다. 리온과 루디아가 갑자기 머리를 붙잡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오? 괜찮소?”

   “저, 저는…, 아직 괜찮아요.” 

   루디아는 가까스로 버티는 기색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우리의 인형 몸체가 훼손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정식 입장이 아닌, 인형을 통한 의식 공유라는 편법으로 진입했어요. 그런 마당에 현실이 왜곡되면서 예상외의 반발 작용이 유발된 것이겠죠.”

   리온은 겨우 고통을 견뎌내면서 말을 힘겹게 이었다.

   스테판은 우선 두 동료의 몸을 부축하여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나 시공간과 법칙이 계속해서 격변하는 바람에 몇 초 이상 버틸만한 곳이 없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도망쳤다. 잠시나마 숨을 돌릴 곳을 애타게 찾으며.

   “스테판 씨…….”

   리온이 고통스럽게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리온?”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당신, 허상 세계에 대한 기억을 되찾으셨죠?”

   스테판은 멈칫하며 잠시 표정을 굳혔다.

   “……그건 어떻게 알았소?”

   시간이 없었기에 리온은 사족을 생략한 채 본론을 말했다.

   “인형으로는 아마 오래 못 버틸 거에요. 인형 몸체를 버리는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선교의 여정이 중지될 줄은 몰랐지만……, 이제는 우리 여행은 잠시 보류에요. 윤혁도 행방불명이니 당신 혼자 남겨지겠죠. 그러니 당신이 하려던 일을 망설이지도 말고, 눈치 보지도 말고 맘껏 시행하세요.”

   “하지만 내게 위험성을 경고하지 않았었소?”

   비단 복음의 영적 본질과 환상계의 상충하는 성질 탓을 제쳐두고라도 스테판이 즉석에서 구상한 전략은 어느 과점에서 봐도 충분히 위험하고 충동적이었다. 당장 환상이 범람하고 경계가 붕괴하는 가운데 죽음을 방불하는 심연 안으로 뛰어들겠다는 발상이 지혜롭게 비칠 턱은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죽음을 각오하는 태도가 삶을 자아내는 법.

   “더 묻지 마세요. 저도 도박하는 셈 치죠. 부탁할게요.”

   “하지만 당신들과는…….”

   “만일 기회와 인연이 된다면, 아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 믿어요. 그전까지는 당신의 판단은 당신의 자유의지대로 맡기세요. 주님의 섭리가 당신의 자유의지와 그 결과마저 아우를 것입니다.”

   루디아는 여기에 더해 응원을 덧붙였다.

   “대신 꼭 살아남으셔야 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스테판은 뭐라고 대꾸하려 했으나 리온이 고개를 저어 입을 막았다. 그는 스테판에게 마지막으로 눈짓으로 신호를 전했다. 직감적으로 그 의미를 알아들은 스테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근 2년 이상의 세월을 공유한 동료들에게 경의를 담아 경례를 하였다.

   “그대들을 알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었소. 무엇보다 그대들이 내게 내 진정한 주인과의 참된 만남을 주선해주어 기뻤소. 부디 그대들도 아무 탈 없이 지구로 돌아가시길 바라오. 비록 우리가 오늘 헤어지더라도 나와 그대들은 여전히 주 안에서 연합되어 있을 것이오.”

   미련이 안 남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윤혁을 구해주지 못했던 점은 심히 안타까운 유감이었다. 자신에게도 좋은 친구였으나 저 둘에게는 특별히 의미 깊은 인연이었을 터인데. 부디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루디아도 아쉬운 맘을 담아 스테판에게 작별 인사를 전하였다.

   “스테판 씨, 몸조심하세요.”

   “여건으로 보아 어렵겠지만……, 힘이 닿는 대로 해보겠소.”

   윤혁에 이은 스테판과의 이별은 상냥한 루디아의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인형 몸체도 서서히 현실 괴리 현상에 휘말려 붕괴 중이었기에 스테판의 행로를 막을 방법도, 도와줄 방도도 없었다. 그저 윤혁과 스테판이 모두 안전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테판은 미련이 남았는지 두 동료의 멀어져가는 모습을 자꾸만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굳게 마음을 다잡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가장 활발히 환상 경계 붕괴 작용이 일어나는 벌판으로 달려갔다. 블랙홀들과 화이트홀들이 무수히 중첩되기라도 하듯, 그곳에서는 초 광범위한 유사 다중 차원 현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범람하는 환상이 그의 몸을 서서히 엄몰 하였다.

   자신 위로 온갖 기묘한 차원들이 겹치는 기괴한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스테판은 신속하게 행동에 돌입했다. 리온의 경고했던 대로 제대로 하지 못하면 도리어 자신의 몸과 마음이 환상에 먹힐 위험성이 컸다. 그는 왼쪽 눈에 박혀있는 의안을 뽑아내었다. ‘그녀’가 그를 손에 넣어서 이레귤러로 만들기 위해서 지불했던 대가는 바로 적출된 왼쪽 눈이었다. 그 안구를 대신해 채워진 의안은 일종의 봉인 장치였다. 표식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장치.

   “이제야 드디어 감이 떠올랐소.”

   시뮬레이션 우주에 접속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전에는 항상 무의식 상태로 입장했었는데, 지금은 내적 조건과 외적 상황이 바뀌어서인지 의식적인 진입이 가능했다. 마치 자각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연습 몇 번만에 스테판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새겨진 여러 종류의 보편 표식 중 하나, 곧 ‘환상의 표식’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마음껏 조종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비틀거나 조작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레귤러가 되기 이전 상태였더라면 평생 이 표식에 조종당했겠지. 이레귤러가 된 이후로도 그녀의 조종 아래 있었다면 표식을 사용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서 자신이 표식을 역이용하게 되었다.

   현실과 환상의 붕괴가 격렬히 일어나는 중심 좌표에 도달한 스테판은 눈을 잠깐 질끈 감고 심호흡하였다.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투신하기 직전의 기분. 잠시 두려움이 몸을 휘감았지만 이내 미련 없이 떨쳐내 버렸다. 그는 붕괴하는 틈으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존재를 통째로 던졌다. 드디어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의 주사위가 던져졌다.

 

 

 

 

 

 

 

*

 

 

 

 

   드디어 헬리웃은 염원하던 야망을 성취할 순간을 목전에 두었다. 이제 그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이곳의 성공 신화를 보고서 다른 식민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그 방식을 벤치마킹할 것이다. 이로써 인류 전체가 ‘환상을 실체화한 세상’, 곧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날이 성큼 다가왔다. 이것이야말로 헬리웃이 추구하는 진정한 궁극적 자유였다.

   “거의 다 되었어.”

   고차원적 형태로 변모한 네 개의 구조물들이 이제 하나로 온전히 얽혀 복합체를 이루었다. 복합체는 무수한 가지와 부수품을 뻗으며 무한히 확장되었다. 곧 이 하늘도시는 물리적 본체 그대로 송두리째 사중 복합체에 강제 연결될 것이다. 최종 단계가 목전에 다다랐다. 이제 남은 스탭은 궁극의 힘을 빌려서 계획의 화룡점정을 그려내는 일.

   “그동안 고마웠어, 꼬마야.”

   윤혁의 생기 잃은 동공은 듣는 둥 마는 둥 광활한 대격변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허망함이 그의 표정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패배를 실감하지 못하는 패배자처럼 그는 무너져있었다.

   “그 대가로 보여줄게. 내가 지금부터 만들어나갈 세상을.”

   헬리웃의 소스라치는 웃음소리가 귀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드디어!”

   헬리웃은 소름 끼치는 미소와 함께 반지를 품에서 꺼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보화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광기의 이채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것을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이미 자신의 신체와 강제로 동기화되도록 소유권 강탈 준비는 마친 상태였다. 이제 이 반지의 힘에 적응하는 일만 남았다.

   “크윽.”

   반지 속의 정체불명의 방대한 에너지가 헬리웃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힘겹게 힘의 흐름을 버티면서 그것을 제어하고자 애썼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목에서 저절로 흘러나왔지만 조금씩 조금씩 적응은 이뤄졌다. 강제 동기화를 마친 헬리웃의 얼굴에는 환희가 깃들었다.

   “그래, 이 힘이라면 가능해!”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권능에 심취한 광기의 노예. 그는 그토록 사용하고 싶었던 ‘실체화’의 힘을 마음껏 휘두르기 위해 신중히 반지의 힘과 자신의 정신을 하나로 동기화하였다.

   ‘드디어!’

   그렇게 집중하던 찰나에.

   “넌 누구지?”

   “……!”

   순식간에 헬리웃의 의식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깨어났다. 하늘도시가 아닌 머나먼 우주, 아니 통상의 우주라기에는 매우 괴이하고 이질적인 차원이었다. 곧이어 낯설고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이 설명하기 힘든 감각은?’

   타임필드 속에서 수십 년 이상 시뮬레이션 우주만을 연구해온 초인이었기에 그는 직감적으로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모든 시뮬레이션 우주를 생성하고 주관하는 인류 유일의 핵, 이데아. 이론상 오로지 그 존재만이 낼 수 있는 흐름이 주변 영역을 잠식하고 있었다.

   ‘왜 그 불가사의한 실체의 기운이 이렇게 선명하게?’

   한 번도 오감으로 직접 체험해보지 못했거늘,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것마냥 뚜렷하게 뇌리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원리는 모르겠으나, 이데아 본체가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실체화되었다. 초정보 집약체의 형상이 아닌, 육화(肉化)된 객체의 모습으로.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하나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분홍 머리 사내는 본능적으로 어떤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네가 대체 뭐길래 내가 그 아이에게 준 선물을 쥐고 있지?”

   자신이 급작스레 심각한 경각에 처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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