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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62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2. 재충전 (3)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2.13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당장에 그녀가 한 말만 듣고 덥석 믿기는 어려웠기에 리온은 몹시 고민하며 머뭇거렸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이를 신뢰하기 어려운 점은 이해합니다. 워낙 거짓 교사들이 판치는 세상이니 더욱 그렇겠죠. 시간을 두고 기다리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원한다면 영적 실태를 검증하셔도 좋습니다.”

   외견과 비교해서 상당히 어른스럽고 현숙한 소녀였다.

   “그렇게 무례히 대할 생각은 없지만……. 여하튼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직 경계를 완전히 거두지 않은 채로 리온은 계속 질문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선교사들을 도울 계획입니다.”

   “저희를요?”

   어찌 보면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오늘날 지구에 남은 제대로 된 복음적 선교사라고는 이 본부에 모여있는 이들이 전부였으니까. 그녀는 당신들 말고 누가 있냐는 눈초리로 무언의 눈짓을 주었다.

   “네, 정확히는 우주 식민지 선교를 도울 겁니다. 일시적으로 중지된 그 과업을 재개하시도록 제가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계책이나 전략 측면에서 돕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초인과의 거래 부분은 제가 맡아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생각보다 너무도 많은 부분을 알고 있음에 리온은 은근 놀랐다. 전에 윤혁이나 그 일행과 교류한 적도 없었는데 초인 세계니, 세계정세니 하는 부분들을 어찌 저리 알고 있단 말인가. 설명할 방도는 하나, 그녀 역시 복잡한 정세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얽힌 존재라는 해석뿐이었다.

   문득 그녀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긍정적인 결론을 확실하게 내릴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미연에나마 그녀가 대적과 연루된 자가 아닌, 올바르고 진실한 사람이기를 소원했다. 잘만 하면 힘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과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도 있을 텐데.

   “방금 말을 번복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의도와 인품과 진실성을 투명하게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 불가피하게 저도 앞으로 당신을 시험하여 검증하겠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리온은 그녀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증거를 요구했다.

   “오히려 저도 바라던 바입니다.”

   그녀는 그 정도 수순은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대화 몇 번만으로 평가를 마무리해서는 안 될 노릇. 교리적 건전함이야 문답이나 면접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거룩한 삶의 열매는 같이 생활하면서 확인해야 할 계제였다. 리온은 여인의 진실성을 검증하는 일에 다소 긴 호흡으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유려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궁여지책으로 먼저 객관적 증거부터 보여드려야겠군요.”

   데자뷔가 느껴졌다. 스테판을 설득할 때 선교팀이 사용했던 화법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리온은 소녀가 다음 순간 무슨 말을 꺼낼지 귀를 쫑긋 기울였다. 그녀는 무슨 방법으로 추천서와 증빙서를 보여줄 생각일까?

   “증거라면 설마.”

   “제가 신뢰할만한 손님이란 증거 말입니다.”

   “아아.”

   “리온 마흐무드 씨, 실례지만 에드레이 테일란드 어르신이 남겨준 두 유품, 곧 당신과 당신 친구에게 맡겨진 몫의 원본을 제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에드레이 씨요?”

   뜻밖의 연관성에 리온의 경계심이 발동했다.

   “설마 당신도 그와 관련이 있습니까?”

   그녀는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몰라 망설여졌으나 리온은 마지못해 두 유품의 원본을 꺼냈다. 여기서 두 유품이란 하나는 윤혁에게 넘겨준 에드레이의 수필, 젊은 시절에 감옥에서 만났던 일생 최초의 친구에 대해 적은 이야기였고 다른 하나는 리온에게 넘겨진 성경 주석 책이었다.

   소녀는 그 두 개를 받아들더니 곧장 리온의 앞에서 뭔가를 시범 삼아 시현해보았다. 전산 분석이었다. 그녀는 책 곳곳에 교묘히 새겨진 표시와 흔적을 조합하여 능수능란하게 암호를 풀기 시작했다. 비밀리에 하는 것이 아닌, 리온 앞에서 모든 과정을 설명해줘 가며 진행했다.

   그 해설과 접근법이 어찌나 간결 명료한지 수학에 능숙지 못한 리온조차도 마법에라도 걸린 듯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암호와 코드의 달인인 에드레이의 재주가 소녀의 손에 의해 적나라하게 재현되었다. 그 장면을 목격하면서 리온은 떡 벌려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굉장하잖아?’

   “드디어 다 되었군요.”

   말없이 숙제를 풀던 소녀가 묵묵히 완성을 알렸다.

   “이건…….”

   암호 퍼즐이 완성되면서 최종 완성된 숨겨진 문장이 드러났다. 리온은 주목하여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분명 공용어로 되어 있건만, 의미를 알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너희들을 찾아간다.

 

 

 

   ‘아나스타샤라고? 누구지?’

   이어지는 내용도 의미심장했다.

 

 

 

   그녀는 너희의 계획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그녀야말로 너희의 계획을 최종 완성할 마지막 한 획이다. 주님의 축복이 신실한 자들과 함께하기를.

 

 

 

   이 낯선 제언에 리온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인지요? 혹 심오한 비유는 아닌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바로 아나스타샤입니다.”

   멈칫. 잠시 분위기가 멍해지며 정적이 흘렀다.

   “네? 당신이?”

   “참고로 저는 이 책 원본을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미리 전에 준비해서 연습 삼아 풀어볼 기회는 없었죠. 그저 에드레이 씨에게 배운 알고리즘을 대입해서 이 자리에서 즉석에서 풀었을 뿐입니다. 암호의 해답도 오늘 처음 봤죠.”

   차분히 되돌아보니 확실히 에드레이가 남긴 책의 원본을 만져봤던 자는 윤혁과 리온뿐이었다. 애초에 양산품으로 찍힌 디지털 물건도 아닌 수기로 작성된 것인데다가 종이 자체에 새겨진 요철 패턴도 암호 해독에 필수적이었기에 원본을 손에 넣지 않고 따로 암호를 접할 방도는 없었다. 따라서 정황상 소녀가 이 내용을 미리 알아내어 자신의 정체성을 속일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나저나 이런 복잡한 수식을 마음대로 다룰 정도의 재능이라.’

   리온은 그녀의 지혜가 만만치 않음을 눈치챘다. 모든 정황상 그녀가 에드레이 어르신과의 관련성이 있음은 분명했는데 리온은 그 부분도 세심히 주목했다. 두 사실이 서로 연관된 것일까? 이제 리온은 경계심 대신 정식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로 대화에 임하였다.

   “당신은 어떻게 이곳에 오셨습니까.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아나스타샤입니다. 개인적 사정으로 라스트네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저는 에드레이 테일란드 씨가 남긴 세 번째 유품입니다. 동시에 그에게 도움을 받아 목숨과 영혼을 건진 사람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은인이었습니까?”

   아나스타샤는 끄덕거렸다. 계속해서 그녀는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녀의 가문에는 대대로 전승되는 저주가 하나 있었다. 악마의 간섭에 쉽게 휘말리는 속성이 그것이었다. 성경에서도 유독 악마에게 잘 사로잡히는 부류의 사람 혹은 집안이 언급되었기에 영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저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었죠. 그렇게 절망하던 중 노년의 에드레이 씨를 만났죠. 그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었고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악령의 영향력과 가계의 저주는 끊어졌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게 되었죠.”

   솔직담백한 이야기에 차차 리온은 몰입에 빠졌다.

   “이후 에드레이 씨는 제게 많은 가르침을 전수해주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세상 정세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의 전문 특기인 각종 수학과 공학과 암호학과 알고리즘에 관해서도 말이죠.”

   표정이나 어투를 보아 거짓말을 꾸며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온은 그녀와 얼마간 교류하면서 더 자세히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나스타샤의 제안대로라면 이번 만남은 선교팀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운명적인 새 챕터가 펼쳐지지 않을까?

 

 

 

 

 

 

 

 

*

 

 

 

 

   태평양 남반구의 섬.

   그곳에는 자연 본연의 경치와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사람이 살기에도 안락한, 그야말로 낙원을 연상케 하는 휴양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수풀과 삼림, 호수와 강, 시원한 계곡이 있었고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폭포수와 깨끗한 동굴도 있었다. 야생 동물은 온순한 종뿐이었고 모기 같은 해로운 곤충들도 박멸되거나 인위적으로 봉인되었기에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관광 거리도 풍족했고 수질도 맑고 깨끗했다. 특별히 따스한 온천은 명물이요 보배였다.

   현재 이 섬은 공식적으로는 무인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은밀한 사유지에 가까웠다. 거주용 인공 건물은 몇 개의 근사한 별장과 오두막집, 나무집, 정자와 테라스가 전부였다. 그야말로 개인용 휴양지로 최적화된 곳이었다.

   두 달 반 전부터 새 주거자가 이 섬에 자리하였다.

   “따뜻하네.”

   크리스마스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나 섬이 남반구에 있었기에 계절은 여름이었다. 어느새 날씨는 후끈거릴 만큼 더워졌다. 건실하고 훈훈한 청년은 허름한 반바지만 걸친 채 느긋이 햇볕을 쬐었다. 그는 바위 위에 누워 맑은 공기를 만끽했다. 호리호리하면서도 적당히 잘 뻗은 그의 골격에 적당량의 근육이 붙어 있었다. 두 달 전만 해도 온갖 고초로 인해 흉터투성이였고 얼굴도 초췌했는데, 잘 먹고 편히 쉬다 보니 금세 지금 모습으로 회복했다.

   원래는 이렇게 쉴 생각이 없었다. 윤혁은 지구에 돌아오자마자 일을 계속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진이 보낸 로봇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당분간 누구와도 만나지 말고 푹 쉬어야 한다면서 상부의 명령을 전하였다. 2년 반 동안 갖가지 고생으로 몸과 마음이 소진되었으니 당분간은 조금도 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딱히 반항할 힘도 없었으니 그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내심 피로하기도 했고.

   ‘안식년을 받은 셈 치는 편이 낫겠지.’

   내심 부모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이 여행 도중 불운한 사고 탓에 귀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괜한 걱정이 더해질 것이 자명했다. 게다가 그분들을 뵈면 마음이 흔들려 사명을 끝까지 완주하려는 결심이 흐드러질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윤혁은 일부러 이번 휴가 때는 부모님을 마주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해요, 엄마 아빠.’

   그는 속으로 사과했다. 그 대신 윤혁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대면 시간은 빼먹지 않았다. 혼자서라도 매일 성실히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묵상하며 잠잠히 기도했다. 부모님도 주일마다 한국에서 예배드리면서 아들을 생각하시겠지. 그분들이 그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빨리 회복하고 임무도 완수해야지.’

   마음을 정리한 윤혁은 기분 전환을 할 겸 바위에서 일어나 시원한 계곡으로 걸어갔다. 계곡물이 구불구불한 골짜기에 부딪히면서 물보라가 튀겼다. 구경으로도 청량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래간만에 음침한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쉴만한 물가에 자리한 감각이 들었다. 그는 찬찬히 발을 시원한 물가에 담갔다. 맑고 청정한 촉감이 몹시 유쾌했다.

   바로 그때.

   “오랜만에 보는군, 강윤혁.”

   갑자기 번쩍 튀어나온 익숙한 텔레파시 음성에 윤혁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섬에 저 혼자만 있는 줄로 알았거늘. 이내 물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 형체 하나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정확히는 불가시 모드의 반투명한 상태의 실루엣이 서서히 뚜렷해지더니 원래의 실체가 드러났다.

   “설마……, 형?”

   눈부시게 찬란한 미남자가 말없이 윤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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