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6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3. 해후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2.16 | 회차평점 0 |
Chapter 33. 해후
“그동안 잘 지냈나, 동생?”
카이젤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물론 동생의 행적이야 이미 훤히 알고 있었지만, 본인 입으로 듣는 체험담은 또 다른 법이니까. 반면 윤혁은 이렇게 갑자기 형과 재회할 줄 미처 몰랐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당황했다.
“아, 음……, 네, 일단은요. 잘 지냈습니다.”
“정말로 그런가?”
반문하는 음성에 뼈가 실려 있었다. 동생이 험한 일을 자주 당했다는 소식은 이미 다 들었다. 하지만 형은 굳이 되묻거나 따지지 않기로 했다. 대답 대신에 그는 천천히 물 위로 걸어 사뿐사뿐 다가왔다. 그 광경에서 어떤 것이 겹쳐 떠오른 윤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 지금은 좀 괜찮아 보이는군.”
형은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대면은 그때 이후로 처음이지?”
“……네.”
“소식은 들었다.”
‘어떤 소식?’
잠깐 윤혁의 머리를 스친 의문은 금세 풀렸다.
“알레프 노인. 나름 존경하는 분이었기에 나도 장례식은 지켜보았다.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연명시켜주겠다고 제안했는데도 거절하시더군.”
그랬었구나. 역시 그날 형도 그분을 만났었구나. 하긴 세계를 통제하는 지배자가 사람 하나 찾지 못했을 리가. 여유롭게 지켜보면서 언제든 찾아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겠지. 어르신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적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의 마지막 순간을 농락했을 저 사람이 얄미웠다.
“더 험한 일 안 보고 하늘나라에 가시길 원하셨을 테니까요.”
에드레이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고슴도치처럼 까칠해지는 동생을 본 형은 씁쓸하게 손을 뗐다. 윤혁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감정적 반응이었다. 소중한 선생의 별세도 물론 슬픈 기억이지만, 그가 하늘나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순간 카이젤에 대해 경고했던 말이 떠올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비록 그저 특수 염동력이나 반중력, 공간 기술을 응용한 과학기술에 불과하긴 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형이 유유히 물 위를 걷는 모습이 꼭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 같아 불편했다.
‘하지만 형이 멸망의 아들이 되지 않도록 막을 유일한 희망은 지금으로써는 나밖에, 아니, 지금 내 안에서 나를 통해 움직이기로 작정하신 성령님밖에 없어. 그분은 내게 임무를 맡기셨다.’
여기까지 와서 자신이 포기해버리면 어쩌겠는가. 윤혁에게는 형을 책임지고 지켜줄 의무가 있었다. 카이젤 자신이라는 적으로부터 카이젤을 구해야만 한다. 더욱이 그런 이유를 떠나서 그도 엄연한 가족이었다. 그것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전학적인 형제. 영적인 적대관계를 떠나서 저 사람도 개인적으로는 윤혁에게 소중한 인연이었다.
“물가에서 놀려던 참인가?”
“여름 나기에는 여기가 제일 좋아서요.”
“바다로는 놀러 가지 않고?”
“아무래도 탁 트인 곳은 감시당하기 쉽잖아요.”
“딱히 이런 계곡이라고 해서 훤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지구 안이라면 상공부터 내핵까지 티끌 하나 빠짐없이 내게 실시간으로 감시당하는 중이니까. 내게서 숨으려는 생각이었다면 오판이었다.”
참 대단하신 관측 기술이시네.
‘이러다 나중에는 우주까지 샅샅이 감시하는 체계를 만들겠어.’
투덜거리는 속생각에 반응해 카이젤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최신 버전의 관측 기술을 이용한다면 적어도 우리 은하 내에서는 모든 좌표에 대한 실시간 예측, 감시, 대응이 가능하지. 웬만한 미시 현상까지도 말이야.”
이미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구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거 무서워서 사람이 살겠습니까.”
윤혁은 몸서리치듯 고개 저으며 항변했다.
“우주 전역을 감시한다니, 완전 빅브라더 감시 체계잖습니까?”
“누군가 내 별명을 빅브라더라고 붙이기도 했었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아버린 윤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카이젤은 동생과는 달리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 것인지 농담을 늘어놓았다.
“큰형이라……, 형제는 너 한 명으로도 충분한데 말이야.”
“낯 뜨거울 정도로 감사하네요.”
“내가 좀 편해진 모양이군. 농담도 대담하게 주고받고 말이야. 나쁘진 않아.”
기어오르는 동생더러 분수를 알라고 압박 주는 어투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어조였다. 윤혁은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정말로 자신이 전과 달리 형을 덜 두려워하게 되었나? 같이 지내다 보니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러는 카이젤이야말로 변한 기색이 역력했다. 확실히 그는 전보다 유순해진 것 같았다. 이복형제의 존재를 알고 교제를 나누게 된 것만으로도 저 두려운 사내가 이렇게까지 성정이 변한 것을 보면 인간관계라는 것 속에 내재된 잠재력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싶었다.
“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좀 쉬다 가지.”
형은 어른답게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능숙히 깨트렸다. 그는 동생더러 같이 놀 것을 제안했다. 각자를 향한 앙금이나 두려움이나 망설임일랑 잠시 내려놓고 그저 한 피를 나눈 형제답게 이 시간을 공유하자. 다정하고 상냥한 그 제안은 거부하기 힘든 편안함이 녹아 있었다. 마침 물에 들어가 놀려던 차였기에 윤혁도 흔쾌히 동의했다. 상대와의 관계가 필요 이상으로 막역해지는 건 무의식적으로 두렵긴 했으나 동시에 내심 반갑기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할 이야기가 있었지.”
아주 잠깐 섬뜩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저, 저기, 형?”
낌새를 감지한 윤혁은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자, 잠시만요!”
그는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동생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카이젤의 염동력이 윤혁을 깊은 물속에 빠트렸다. 엄청나게 미세한 컨트롤의 보이지 않는 힘이 물을 조종하여 강력한 소용돌이를 자아냈다. 카이젤은 그것으로 동생을 옥죄었다. 우습게도 물에 잠긴 상태에서도 숨은 잘만 쉬어졌다. 참으로 대단한 미세조작이 가해진 듯했다.
‘크윽, 이건 또 무슨 능력이지?’
사실 칼티엔뉴르나 다른 세계들을 돌며 마법이나 기묘한 힘도 실컷 구경해왔던 윤혁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세계들의 관리자인 카이젤도 이 정도는 손쉽게 해내리라고 예상했었다. 애초에 기술의 원제작자이니 당연한 일이지. 그가 이런 묘기를 부리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힘으로 당하는 참교육은 달갑지 않았다. 제대로 된 화풀이라기보다는 형제가 형제를 골탕 먹이는 장난스러운 행동에 가까운 태도이긴 했으나, 상대의 위력이 엄청난 만큼 일반인으로서는 부담스러웠다.
“으악! 저기, 잠깐만! 우리 말로 합시다, 말로 해요!”
“흐음, 아직도 기운 넘치는 것 같군.”
“형! 아, 제발 좀!”
한참을 물로 골탕 먹인 후에야 형은 동생을 풀어주었다. 덕분에 윤혁은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윤혁은 야속하다는 눈초리로 형을 흘겨보았다. 카이젤은 그런 동생을 내려다보고 웃으며 느긋하게 웃었다.
‘쳇, 다행히 화난 건 아닌 모양이네.’
애완동물 감상하듯 웃으며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내려다보는 저 잘난 남자가 아주 조금 얄미웠다. 확실히 잘났긴 잘났지. 제왕의 제복이 아닌, 심지어 고급스럽지도 않은 일상복을 입고 있음에도 우월한 남성스러움이 자연스레 넘치는 저 자태와 기품부터 참으로 인상 깊었다.
“젖었군.”
“물놀이하려면 형도 들어오시죠.”
샘통이 난 윤혁이 투덜거리자 다시 카이젤이 피식 웃었다.
“너도 참 담대해졌어. 보기 좋군.”
“누구 덕분에요.”
“뭐, 그렇게 담대해진 덕에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고 다녔던 건가.”
농담을 주고받던 분위기가 잠시 얼어붙었다. 윤혁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 은근한 두려움에 입이 꼭 닫혔다. 형은 과연 자신과 동료들의 선교 계획에 어떤 식으로 대응할 생각일까. 관용? 탄압? 아니면 그 중간? 자신의 행적을 예측하고서도 놔둔 것을 보니 희망은 보였다. 호의적인 입장이리라고 판단해도 될까? 하지만 마냥 믿기에도 꺼림칙했다. 이제까지만 해도 초인들에게 수차례나 당하지 않았던가. 세상 사람을 믿기에는 이미 너무 지쳐버렸다.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부끄러움 없이 떳떳합니다. 혹시라도 말리시려면 확실하게 여기서 말씀하시던가요. 힘으로는 저를 탄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제 뜻과 의지만은…….”
“그게 아냐, 이 녀석아.”
카이젤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네가 하도 몸을 함부로 굴리고 다니는 게 눈에 밟혔을 뿐이야.”
“그, 그게…….”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에 말문이 잠시 막혔다. 나무랄 줄 알긴 했으나 정작 상상했던 이유와는 전혀 다른 통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걱정했던 대상이 자신이었단 말인가?
“누가 그렇게까지 무모할 줄 알았나?”
괜한 미안함에 윤혁은 숙연해졌다. 확실히 여행 중 불미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현지에서 민중의 공격을 받는 일은 다반사였고 핍박은 어딜 가나 기본이었다. 거기다가 기묘한 위기도 자주 마주쳤다. 호문쿨루스 원숭이의 피격, 티아라의 텔레파시를 받아치는 과정에서 정신력을 소모하고 쓰러진 일, 그리고 헬리웃의 납치까지. 그 모든 일의 귀책 사유가 윤혁에게 있는 건 아니었으나 확실히 세상은 그에게 맹렬히 적대적이었다.
“저를 걱정하셨던 건가요?”
“조금은.”
카이젤은 대번 인정하긴 자존심 상했는지 에둘러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고삐를 풀어놓은 책임도 있으니까.”
“진짜죠? 정말 저희의 행적을 반대하시는 건 아니죠?”
“무턱대고 탄압하는 것 싫어한다. 종교의 자유건 표현의 자유건 개인의 양심의 자유건, 억압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야. 쓸데없이 사람들을 탄압하는 건 겁이나 집어먹는 나약한 옛 시대의 독재자들뿐이지. 진정으로 능력 있는 지도자는 항상 대중이 향유하는 모든 자유에 대해 여유만만하지.”
윤혁은 형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과연 그는 약간 성이 난 것도 같았다. 하기야 동생이 웬 엄한 놈들에게 다치고 왔으니 보통의 형이라면 분노하겠지. 당장에라도 “내 동생을 때릴 권한이 내게만 있다.”라고 말할 기세였다.
“미안해요. 걱정시켜서….”
“다음부터 몸을 험하게 굴리면 따로 감금하는 방안도 고려해보지.”
“그건 안 돼요!”
당황한 윤혁이 손사래를 쳤다.
“안 다치도록 최대한 조심할게요.”
카이젤은 못 미덥다는 듯 동생을 묶던 염동력을 풀어줬다. 물 소용돌이로 세게 압박했는데도 놀랍게도 윤혁의 몸에는 스친 상처 하나 없었다. 도자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염동력을 미세조작한 결과였다. 카이젤이 다가와 윤혁의 등을 토닥이며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졌다. 커다란 손에서 살짝 온기가 전해졌다.
“같이 놀지?”
“방금도 실컷 놀았잖아요. 저만 호되게 당했죠.”
이에 카이젤은 호쾌하게 웃음으로 대꾸했다.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이전회
262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2. 재충전 (3) |
다음회
264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3. 해후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