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65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3. 해후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2.20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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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그 인간, 헬리웃 씨는 어떻게 되었죠?”
“그 녀석?”
약간 섬뜩한 분노가 카이젤의 표정에 스쳐 지나갔다.
“녀석이 좋아하던 시뮬레이션 우주에 몸 자체를 봉인해버렸지. 언제 풀어줄지는 고민을 조금 해봐야겠군. 그 감옥은 놈이 기획한 가상 사후세계를 본떠 제작했는데 지옥에 버금가는 형태로 제작되어있지.”
갑자기 그 범죄자에 대한 연민이 들었다.
‘이름값 한번 제대로 한 셈이구나. 골로 가버렸네.’
“끝없이 아이디어와 창조성을 짜내는 정신노동용 젖소로 써먹어야겠군.”
형벌 묘사를 들은 윤혁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한여름인데도 서리라도 맞은 듯 싸늘했다. 아무리 자신의 고환을 염동력으로 쥐어짜면서 거세하겠다고 수백 번도 넘게 협박한 인간쓰레기라지만 그 말로가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아주 조금만.
“감정적인 처벌은 아니야. 나와 우리에게도 다 법이 있어. 내가 중심이 되어 기획하긴 했지만 인류 보편적인 가치 체계가 주축을 이루고 있지. 감정적인 방식으로 제멋대로 작동하는 룰은 아니야.”
“법이요?”
“일종의 헌법이라고 해야 하려나? 차이가 있다면 시대가 시대인만큼 성문법보다 더 복잡한 원리로 구축되어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나 ‘이데아’ 같은 중추에는 ‘컨스티튜션 셋(Constitution-Set)’들이 여럿 내장되어있지. 말하자면 최상위 알고리즘이자 근본 작동 원리이지.”
어려운 내용인지라 이해는 되지 않았다. 하긴 ‘기계들의 율법’도 엄연히 존재하는 마당에 거대한 인류연합을 지배적으로 통괄하는 보편적 법칙이 어떤 식으로든 실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 운용 방식과 입법 방식이 정말 인류를 위해서 유익한 것인지는 심히 염려되긴 하지만.
“여하튼 놈에게는 그 행위에 적법한 형벌을 내린 것뿐이다. 시뮬레이션 우주에 간섭한 죄목으로 벌을 내려줬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꽉 쥔 주먹에는 사적인 유감이 몹시 실려있었다. 말은 형벌이니 법치니, 헌법이니 어쩌고 하면서도 내심 자기 혈육을 상하게 한 일에 대한 원한이 가득해보였다.
“네가 원한다면 차라리 죽여줄까?”
“아니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아무리 고통스러운 형벌이라도 진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죽으면 그 뒤에는 저 왕보다 훨씬 더 두려운 전능자의 심판이 기다리니까. 윤혁의 온유한 심성은 제아무리 극악의 원수라도 그렇게 비참하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성경이 지지하는 사형제도를 부인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으나 타인의 피를 흘린 살인자만 아니라면 범죄자의 생명이라도 되도록 보존되기를 바랐다.
“시뮬레이션 우주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돕기 위해서 존재한다. 절대로 그 자체가 현실의 존재의의를 훔쳐서는 안 돼. 내가 그것을 설계하고 발명한 목적은 현실 인류의 복지와 유익을 위해서였다.”
의외로 환상계를 대하는 카이젤의 관점은 건전했다. 스튜아라는 자가 말로는 제 아버지를 위한다고는 했으나 실상은 그저 과잉충성에 취해 월권을 시도했던 모양이다. 과연 철인왕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자들뿐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그나마 진이 나은 축이었을 줄이야.
‘철인(哲人)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불성설이야.’
윤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놈에게 고문당한 뒤 몸은 좀 괜찮나?”
다시 기습적으로 던져진 형의 질문에 윤혁은 움찔하며 다리를 오므렸다.
“아, 네……, 입자 단위의 재조립 기술로 치료받아서 지금은 멀쩡해요.”
말로는 괜찮다고 했으나 행동은 정직했다. 상상 속에서 떠오른 트라우마만으로도 저절로 손이 아래로 내려가 본능적인 보호 행동을 취하는 동생을 보며 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혹시라도 문제 생길까 봐 걱정했는데.”
“아, 다행히도 실제로 다친 건 아니에요. 기능도 전과 똑같고요.”
“그래, 다행이군.”
그는 자조하듯이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불능이니 너라도 온전해야 아버지가 손주를 보시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두 사람 모두 낯이 살짝 뜨거워졌다.
‘역시 형은 아직까지도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건가?’
걱정스러움과 짠한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다친 것도 아닌 자신도 정신적으로 심한 흉터가 남았는데 칼과 흉기와 불로 온 몸과 수치스러운 부위를 구석구석 찢긴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어색함이 지나간 이후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뭐, 다른 경험담도 계속 이야기해봐라.”
“네.”
이번에 윤혁은 칼티엔뉴르에서 보았던 각종 마법에 대해서 질문했다. 초심자를 상대로 그런 내용을 해설하기란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카이젤은 귀찮아하면서도 애써 하나씩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각 기술을 어떤 원리로 제작했는지, 어떤 기술에서 파생되었는지 등등. 모르고 볼 때는 마법이었건만 들춰내고 보니 과학이나 다름없었다. 그곳 주민들에게도 저런 식으로 원리를 알려주지, 왜 미신적 이미지를 씌워서 마법적인 분위기가 조장되도록 놔뒀을까? 윤혁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한테 물어봤을 때는 버벅거리던데 형은 척척이네요.”
“그 녀석은 아직 백만 년도 더 멀었어.”
“푸훗.”
윤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은근 동생 앞에서는 자랑을 많이 한다니까. 나름 형이라고 체면 세우는구나. 의외로 귀여운 면도 있구나. 귀엽다는 낱말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두고 윤혁은 엉뚱한 상상을 하였다.
이제 다시 한번 다른 주제로 화제를 확장해보았다.
“그럼……, ‘홀로그래피 차원’이란 것에 관해서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요?”
“음, 공부는 좀 한 모양이군. 이젠 좀 이해하려나 모르겠어.”
카이젤은 손가락으로 홀로그램을 그려내어 생생한 시청각 자료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원본 차원인 ‘소스(Source)’의 이미지 투영체, 다시 말해 ‘홀로그래피(Holography)’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소스 또한 더 높은 소스의 투영체야. 이 연쇄가 무한히 반복된다. 역으로 우리 세계의 홀로그래피도 존재하지. 언뜻 보면 ‘리얼리티(Reality)-시뮬레이션(Simulation) 관계’와 유사해 보이지만 물리적 의미는 조금 달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감은 안 잡혔으나 문득 궁금증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형의 가설이 옳다면 이 세상 위에는 더 높은 상위 차원으로서의 ‘소스’와 ‘리얼리티’가 존재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궁극의 소스와 궁극의 리얼리티에 도달하면 과연 무엇에 이를까? 아마도 모든 것을 초월한 단계가 아닐까? 이를테면 이론상의 개념인 무한 차원처럼.
‘그게 설마 성경에서 말하는 영(靈)들의 세계인가?’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는 것은 나름 흥미로웠다.
“진한테서 배웠어요. 하나의 소스에서도 여러 쌍의 홀로그래피가 방출된다면서요. 그것들끼리의 관계를 소위 ‘시블링 홀로그래피(Sibling holography)’라고 부른다는 해설은 들었어요.”
“그래, 우리 세계와 시블링 홀로그래피 관계에 있는 차원도 무수히 많이 존재하지. 몇몇 유명한 것은 구체적인 이름도 붙였어. 아스트랄, 시그니쳐, 사이클릭, 포스트월드, 사이킥 등의 이름을 붙였지. 미신적인 개념에서 빌려온 이름도 있지만 실상 초자연적 원리와는 무관해. 지극히 과학적인 현상일뿐이지.”
참고로 청건당이 선보인 마법도 이러한 시블링 홀로그래피 중 몇 개를 빌려 조합한 원리라고 한다. 물론 카이젤이 보유한 홀로그래피 차원 관련 기술력은 청건당 무리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에게는 현존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시블링 홀로그래피에 가장 깊숙한 심도까지 접근해 연산하고 조합하는 일도 능히 가능했다. 그에 비하면 칼티엔뉴르의 잔당들이 부리던 묘기는 지극히 원시적인 유품이요 아이들 장난에 불과했다.
“혹시 보다 더 높은 상위 차원의 ‘소스’에 접속하거나 그 상위 소스에서 파생된 홀로그래피들을 응용하거나 조작할 수는 없나요? 그 접근법이 훨씬 더 탁월한 잠재력을 지녔을 텐데요? 아, 아직은 미지의 영역이려나요?”
“그 부분은 현재 내가 별도로 직접 연구를 지휘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홀로그래피 우주의 조작은 상대적으로 손쉬운 S-unvs에 비해 훨씬 최상위 기술에 속하니 앞으로도 진척을 이뤄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았지.”
동생은 자신의 짧고 보잘것없은 탐구욕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형의 위인적인 열의에 순수하게 경의를 느꼈다. 하여튼 지성도 지성이지만 열정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말이 나와서 그런데요. 그…, 시뮬레이션 우주 말이죠.”
“물어봐라.”
안 좋은 기억이 어른거려서인지 이 주제를 꺼내긴 영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왕 최고의 기회가 왔으니 최대한의 정보를 빼내야 마땅하리라. 윤혁은 밀려오는 현기증을 꾹 참고 입술을 열었다.
“어떤 원리로 실체화가 가능한 건가요? 불완전하게나마 실존하는 차원이기 때문인가요? 하지만 그렇게만 설명하기에는 뭔가…….”
“어렵지만 좋은 질문이군.”
표현하기부터 어려워하는 동생의 말을 형이 가로챘다.
“실존성과도 얼추 연관이 있긴 해. 하지만 더 중요한 원리는 따로 있지. 편의상 현실 차원이라고도 부르는 이 물리계는 확실히 시뮬레이션 우주보다는 상대적으로 ‘리얼리티’에 해당하는 영역이지. 하지만 이 물리적 세계보다 더 상위의 리얼리티에 속하는 영역도 존재한다.”
청자는 움찔하는 기분과 함께 긴장감이 바짝 들었다.
“우리 세계보다 상위라면?”
“정신의 영역, 혼(魂)이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차원 말이다. 많은 사람이 그 영역을 유령 같은 불투명한 느낌 혹은 형이상학적인 허구 실체처럼 여기지만, 엄연히 그 영역은 물리계 이상의 복잡성을 지닌 상위 차원이지. 수학적 레벨로만 따지면 최소 몇 곱절, 몇 거듭제곱 이상은 되는 규모와 복잡성이다.”
혼의 실존성을 믿어왔던 윤혁이지만 이런 식으로 과학적 관점에서 그 실체를 관통하는 해설을 접하기란 처음이었다. 그도 혼과 상위 차원의 관련성에 대해 나름의 가설은 상상해본 바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증명 불가능한 상상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학계 최정상의 입에서 나온 권위 있는 발언의 무게감은 대단히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그러면 정신, 그러니까 혼의 차원의 시선에서 보면 물리적 세계나 시뮬레이션 우주나 전부 하위계이기 때문에 혼의 영역을 조율 탑으로 삼으면 두 하위 세계의 위상을 서로 바꿀 수 있다, 이런 의미인가요?”
“조금 부족한 표현이긴 하지만 대강 의미는 통하는군.”
“하지만 무슨 수로 그런 상위 차원을 경유하죠?”
“정신이라는 수단이 있으니까. 혼의 차원은 벌크, 리얼리티, 소스와는 달리 유일하게 인류 본연의 정신과 맞닿은 영역이지. 의외로 과학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가장 쉽게 도전해볼 수 있는 상아탑이다.”
원리를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했다.
‘아무튼 효율적이긴 하네. 정신력을 창조력으로 환산한다라.’
누구의 머리에서 최초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명백했다. 과연 발상력과 천재성은 인정해줄 만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시뮬레이션 우주의 실체화란 창조주의 영역을 넘보는 유사 창조 행위. 사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윤혁은 유독 처음부터 그 기술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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