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6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3. 해후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2.23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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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엄밀히 말하면 시뮬레이션 우주 실체화는 진정한 창조가 아닌 모방에 불과한 장난에 불과하긴 하다. 이미 창조주가 창조해둔 차원을 인간이 빌려 재조작한 뒤 시뮬레이션 우주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이니까. 크레파스로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렸다고 그것을 창조라고 칭할 수는 없잖는가. 실체화는 그 도화지에 그린 그림을 오려내고 접어 물체를 만드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겠지.
“하지만 역시 환상보다는 현실이라는 발판을 발로 딛고 살아가는 편이 나은 것 같아요.”
“낮고 누추한 환상계는 원치 않는다 이건가? 그렇다면 높은 차원은? 아직은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의 계획대로라면 인류는 그곳에도 다다를 수 있다. 소스, 리얼리티, 벌크, 심지어 그 너머의 상위 차원들까지도.”
“물질계의 현실보다 더 높은 현실이라면 이미 저도 매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걸요. 그것도 어떤 접속이나 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물질계 안에서 말이죠.”
카이젤은 동생의 말에 내포된 의미를 쉽게 알아차렸다.
“영적인 삶이라……, 과연 너다운 해석이군.”
“하나님께 순종하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는 삶의 진리죠.”
“훗, 녀석도 허세는.”
‘하지만 확실히 그 말대로 초자연계는 가장 높은 미지의 영역이긴 하지.’
카이젤은 이 말은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상위계를 추구하는 태도는 같아도 그 방식은 참으로 상이하군.”
“그러게요.”
윤혁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더 높은 영역으로의 비상은 비단 초인들이나 카이젤만의 꿈은 아니었다. 플라톤처럼 이데아의 추구를 주장한 세속 철학자도 고대 시절부터 간간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주의에 매몰된 삶을 초월해 영적인 삶을 지향하는 성경과도 통하는 듯하다. 실제로 신약 성경이 유럽에 전파된 뒤로는 그리스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려 했던 학자들도 많이 나왔었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몰랐던 플라톤이 물질 너머의 실체에 대한 철학을 펼친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의 마음에는 누구든 하나님을 알도록 창조자를 향한 무의식적인 경외가 심겨 있어. 영원을 사모하는 본성 같은 것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위계와 상위계를 완전한 진리 안에서 균형 있게 통괄하여 연합시킨 성경의 진리와는 달리, 인간의 철학은 하위계인 환상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케하거나 반대로 상위계에만 집착하여 현실을 등한히 여기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진리와 어긋난 ‘영지주의’라는 누룩을 낳은 플라톤 철학도 그러하였고 오늘날의 철인왕들과 그들의 정신적 우두머리인 카이젤도 그와 같이 성경과 무관한 원리로 상위계를 추구하는 중이었다.
홀로 고민하던 중, 형이 다시금 정적을 깨트렸다.
“이데아의 본질에 관하여 고민한 모양이로군.”
“또 마인드리딩 쓰셨죠?”
“그냥 추측이다. 너처럼 순진한 사람은 얼굴만 봐도 생각이 전부 읽히니까.”
비슷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어지간히도 표정을 잘 못 숨기나 보네.’
“뭐, 하위계와 상위계의 역전 현상을 염려한 네 걱정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그래서 구태여 중추 시스템을 만든 것이기도 하지. 그것을 이데아라고 명명한 이유도 절대 불변의 기준 축을 세워두기 위함이었어.”
“형의 수양 자식들의 별명이 ‘철인왕’인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나요?”
“녀석들을 선발할 때쯤 시뮬레이션 우주 개발 프로젝트도 막 기틀이 확립되었었지. 일차적으로 당시 그 녀석들의 역할은 시뮬레이션 우주 생성 기술의 공고화였다. ‘이데아’를 주축으로 이뤄진 리얼리티와 시뮬레이션의 위계질서를 관리하는 보조 관리자들이니 ‘철인왕’이라 불릴 당위성은 충분하지.”
과연 그 근간부터 이데아 철학에 뿌리를 둔 직위였구나.
“그랬군요. 아무튼, 그들에게서는 숙부님이니 뭐니 하는 낯뜨거운 소리만 안 들었으면 좋겠네요. 저는 아직 이십대 초반이라고요.”
“하기야 아직은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지.”
카이젤은 동생의 머리를 헝클이며 웃었다.
“사실 그 녀석들 말고도 네 조카로 셋이 더 있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각성한 최상위 초인들이다. 정식은 아니지만 내 자식 노릇을 하고 있고. 철인왕들과는 선별 목적 자체가 완전히 다르긴 한데 엄연히 내가 거둬들인 자들이지.”
설마 헬리웃이 아주 잠깐 언급했었던 그 자매들 이야기인가? 윤혁은 몹시 궁금했으나 그 질문은 속에만 담아둔 채 꺼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저 언급을 듣는 것만으로도 미연의 불길함이 들었다.
그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어떤 세계에는 가짜 신들이 지배자 노릇을 하는 거죠? 원래는 인류연합이 정식으로 관리하는 게 아니었던가요? 그 신들은 변수 밖의 존재들인가요, 아니면 연합 측의 도구인가요?”
떠보듯이 조심스레 접근하는 윤혁.
“가짜 신들이라고? 별 의미는 없다. 그냥 실험체 겸 보조 제어 장치이지.”
윤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형을 불편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렇게 당당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시인할 줄이야. 여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높으신 분이라 하찮은 영역에서의 일은 어찌 돌아가든 상관없다 이 말인가? 어쨌건 가설로서만 염려했던 부분이 당사자의 입으로 확증되었다.
‘일부러 조작된 상황이었다 이거지?’
카이젤도 괜히 양심에 찔려서인지 동생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딱히 지배를 강요하진 않았다. 주민들 스스로 선택한 거야.”
“그나마 황제 숭배보다는 낫네요. 속였으니 더 큰 잘못이려나요.”
“너무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진 말아라.”
그럼에도 동생이 계속 쏘아보자 카이젤도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가뜩이나 미신에 취약한 인간들인데 미혹에 내버려 두면 안 되잖아요.”
“그래, 내가 졌다.”
이젠 카이젤 스스로도 왜 이런 협소한 문제로 일일이 사과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어 의아할 지경이었다. 강심장의 철인이 되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여린 양심에 휘둘리다니. 게다가 평소 같았으면 타인의 질책 앞에서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을 터인데, 유독 이렇게 휘둘리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하여간 참 강적이군. 이 내가 맥을 못 추리다니.’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고자 말을 돌렸다.
“참고로 그 실험체들은 이종족과 기계의 혼합체, 즉 하이브리드다.”
“역시 그랬었군요.”
“어차피 오늘날의 인조 피조물들은 이종족과 기계라는 이중 카테고리로 나누기에는 너무 모호해졌지. 워낙 생산 품목의 유형이 다양해져서 말이야. 무기물과 유기물,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정보와 물질, 상위와 하위 차원, 신물질과 통상 물질, 모든 것이 뒤섞여 온갖 잡종들이 태어났지. 그 때문에 개체들의 힘이나 지혜도 과도하게 강해졌어. 물리 법칙의 범주도 꽤 벗어났다.”
“인류가 그런 존재들을 책임지고 감당할 수나 있을까요?”
제아무리 초인들이 대단하다지만 끊임없이 진화하고 스스로를 확장하는 기계나 이종족의 고삐를 영원히 쥐어틀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이 들었다. 이러다 어느 순간이 이르면 인간들이 자기 손으로 제작한 작품들에 패하여 밀려나거나 짓밟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만의 고유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야지.”
“영성(靈性) 말인가요?”
“부분적으로는 정답에 근접했다. 이번 기회에 너와 티아라의 대결을 보면서 에녹 그 친구도 이 부분을 깨달았을 거야. 물론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성은 늘 초자연계와 연결되어 있지.”
문득 두려움이 스쳤다. 지금은 경계심을 내려놓고 형제로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기에 자신의 눈에도 겉으로는 저 사람이 다정한 형처럼 보이지만, 잊어서는 안 될 두려운 진실이 있었다. 카이젤 라흐블뤼크의 본질은 엄연히 적그리스도의 그릇인 ‘위버멘쉬’. 그러니 그가 말하는 영성이란 분명 건강한 의미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 동생으로서 몹시도 걱정되었다.
“형은 영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문자 그대로다. 이미 나나 나와 동류인 자들은 일정 부분 영(靈)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초인들 말씀인가요?”
“더 정확히는 최상위 이상의 초인들이지.”
영 능력이라니, 대체 어떤 식의 능력을 말하는 것일까?
‘마법과는 다른 개념인건가?’
궁금증은 곧바로 해소되었다.
“우리 초인들은 인간 정신의 물리적 요소인 ‘뇌’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상위 차원 영역에 속하는 ‘인간 정신의 본체’를 활용할 수 있다고 알려줬었지. 혹시 기억하나?”
“아, 네. 분명 그랬었죠.”
예전에 형의 정체를 온전히 알기 이전 들었던 그 이야기를 지금 다시 고찰해보니 영 예사롭지 않았다. 뇌의 가능성을 초월한다라. 어떤 방식이건 긍정적인 징후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이 초인이 되고, 초인이 위버멘쉬가 된다면, 그다음 단계는 무엇일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한시라도 빨리 형도 회개해야 할 텐데.’
근본적으로 그 일만이 해결책임은 자명했다. 그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결국 어떤 노력도 미봉책에 불과하리라. 결국, 어두운 운명은 필연적으로 엄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 사람이 복음을 쉬이 마음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리라는 염려가 마음에 걸렸다. 애초에 신학이나 지식이 부족해서 신을 못 믿는 사람이 아닌, 고의로 신에게 도전하려는 사람이니 무슨 말이 도움이 되겠는가.
‘말로는 불가능해. 내 삶으로 복음을 증명해주는 수밖에.’
막막하고 어려운 과업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의 가장 큰 난관은 입을 여는 부분보다는 도리어 삶으로 신을 증언하는 것. 과연 자신의 삶은 저 완악한 사람의 심령을 회심으로 이끌 만큼 향기를 내포하고 있는가. 윤혁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잠시 심각한 고민을 하였다.
침묵을 마친 그는 다시금 또 다른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방금 언급하신 분, 에녹이라는 분은 누구신가요?”
“내 부관이지. 비유하면 국무총리 비슷하겠군. 트리플 스페셜 클래스 초인 중에서도 단연 현존 으뜸이지. 내 친애하는 친우이기도 하고.”
“아하.”
여기에 더해 뜻밖의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참고로 그는 혈통도 특별해. 이벨리아 아담즈의 친아들이다. 나의 경우처럼 어머니는 초인이고 아버지는 일반인이지. 아, 반쪽이신 우리 아버지와는 달리 정말 일반인이야. 결혼으로는 썩 좋지 못한 조합이지. 이름이 이치죠우지 쥰이라고 했었던가?”
“이치죠우지 쥰이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익숙한 두 이름의 조합에 윤혁이 매우 놀랐다.
‘그 사람이 왜? 게다가 이벨리아 아담즈는 애초에 2대째 위버멘쉬인데?’
카이젤이 잔뜩 놀란 윤혁을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네가 아는 사람인가?”
“아빠가 아시던 분이었어요.”
“아버지가?”
“네, 그분도 주님을 믿는 분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라,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군. 역시 그랬던 건가?”
카이젤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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