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67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3. 해후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2.24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한편 윤혁은 비로소 퍼즐이 맞춰지며 감이 잡히자 신선한 상쾌함을 느꼈다. 에드레이 씨가 아주 은연중 언급했던 정체불명의 ‘두 번째 억제자’가 바로 이치죠우지 쥰 씨, 그 사람이었구나.
아버지 성한이 그토록 입이 닳도록 칭찬했던 선량한 인품의 인물, 역시 예상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사람이 2대째 위버멘쉬의 배우자였다니, 세상도 참 좁다는 감상이 들었다.
‘난 어르신처럼 지혜롭지도, 쥰 씨처럼 티 없이 선량하지도 못한데, 과연 초대째 위버멘쉬나 이벨리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저 사람을 막을 수 있을까?’
눈앞에 서 있는 저 거대하고 단단한 장벽은 윤혁으로 하여금 잠시 불확실한 고민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약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하나님의 권능은 연약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할 때 더 극명한 위력을 드러낸다지 않았나? 약한 자가 약한 능력으로 위대한 쓰임을 받을 때 비로소 모든 영광을 하나님 홀로 독점하실 수 있으리라. 더욱이 주님께서 미천한 자신을 택하여 임무를 맡겼는데 마냥 낙심하며 뒤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디 이 일을 잘 감당하도록 이끌어주세요.’
더욱 기도하는 마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카이젤은 자신이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티아라와 만났다지. 그녀를 본 소감은 어떤가?”
“티아라 로페즈 씨요? 그 성녀 말인가요?”
“성녀는 무슨. 참 같잖은 별명이로군.”
아무래도 형은 그녀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 것 같았다.
“그 성녀, 아니 티아라 씨는 뭐랄까…, 대단하긴 했어요. 비록 우리의 적대자이긴 했지만, 실력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탁월했죠. 외모도 아름답기도 했고요. 아, 제 친구의 사부라더라고요. 뭐랄까,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좀 어렵네요.”
워낙에 그녀에 엉킨 복잡한 생각이 많은지라 머릿속이 엉켜 횡설수설하는 말이 나왔다. 카이젤은 잠시 얼빠진 채 떠벌리는 어리숙한 동생을 조금 한심하다는 눈으로 흘겨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자기 할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내 경쟁자였다.”
“아,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물론 딱 열세 살 때까지만. 이후로는 내가 압도적으로 차이를 넓혀버렸다. 스무 살 때 2차 각성을 이룩한 뒤에는 아예 본질적인 궤적 자체가 달라져 버렸지. 그녀도 다른 이들도 더는 내 상대가 아니야.”
운명의 대결 때 리온이 얼마나 티아라를 두려워했던가. 그 담대하고 강직한 리온이. 윤혁은 그 압박감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데 그런 티아라를 하찮게 취급하는 격이라니. 형제라는 관계 때문에 미처 잊고 있었건만, 눈앞의 사람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다시금 새삼 실감하였다.
‘우리도 인간적인 두려움 앞에 완전하지 못하구나.’
물론 윤혁도 리온도, 오로지 절대자이신 하나님만이 경외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아울러 그분보다 낮은 존재는 경배하듯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그러나 제아무리 머리로 알아도, 막상 강한 상대를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위축되기 쉬운 것이 인간의 본성. 신앙의 사람들도 연약함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약함을 체휼하고 도와주시는 성령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초창기 텔레파시 기술 개발 당시부터 그녀를 압도하셨다면서요?”
“그건 그저 시작이었을 뿐이지. 사실 그 이전부터 격차는 명료했다. 아마 텔레파시는 그녀가 관심을 쏟던 분야이자 나름 자신만만해하던 주력 분야였기에 더더욱 패배감이 더 컸을 거야. 정작 난 그 분야에 관심이 적었지.”
모든 분야에서 철두철미하게 남을 이기는 것은 그의 본질이자 본능이었으며 숨을 쉬듯 당연한 신진대사와도 같았다. 그런 괴물의 위력에 희생당한 애꿎은 티아라가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이었다.
“뭐, 나야 그녀가 왜 그렇게 남을 미혹하는 데 집착하며 애쓰는지 도통 이해를 못 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자기 능력이 뛰어나면 인망은 알아서 따라올 터인데 말이지.”
“좋은 인상을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 않을까요? 티아라 씨의 방식은 아무래도 화려한 외적 성과보다는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쪽에 가까웠어요. 그러려면 매력 이외의 마음을 얻는 능력이 필요하겠죠.”
“난 한 번도 억지로 남의 호감을 사려 노력한 적 없다.”
그건 당신의 외모가 지나치게 훌륭해서 누군가의 환심을 사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어서가 아닐까? 이렇게 대꾸해보려던 윤혁은 조심스레 말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기어오르다 잘못하여 꿀밤이라도 맞으면 머리가 깨질지도 모르니까. 맹수에게는 작은 장난에 불과한 손짓이 개구리에게는 사망 선고와도 같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자.
“그래도 분명 티아라는 위협적인 강적이지. 적어도 다른 초인들에게는. 하지만 내게는 그저 이용하기 좋은 카드에 불과해.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고개는 절대 안 숙여도 그녀의 심리를 이용하면 내부 안정화에 큰 도움이 되거든.”
“티아라 씨가 그 말을 들으면 분노하실 것 같네요.”
“그러든가 말든가. 오히려 그녀가 내 동생을 조롱하고 학대했던 걸 고려하면 내 쪽에서 처벌하러 나서지 않은 게 큰 자비였다고 생각한다만.”
“학대까지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일행 전부가 제 발로 티아라의 내기 도발에 넘어갔었지. 워낙 신념을 공격해대는 통에 욱했다지만 어쨌건 자발적으로 넘어가 버렸으니 전적으로 선교팀의 책임이긴 했다.
‘그래도 매번 나름대로 편들어주네. 괴롭혀도 자기만 괴롭힌다 이건가.’
하여간 불시에 찔러오듯 살갑게 대해주니 도무지 형이라는 사람을 감정적으로는 미워할 수가 없다. 이런 자신의 감정이 무르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를 품어줄 그릇이 된 것 같아 감사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 티아라 씨한테서 과거 그 사건의 경위를 조금 들었어요.”
윤혁은 형을 조금 더 이해해볼 심산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민감한 이야기로 방향을 돌렸다. 왠지 지금이라면 형도 불같이 화를 내거나 예민하게 굴지 않으리라는 미연의 확신이 들었다.
“형이 납치당했다던 그 사건, 그녀의 행보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했어요.”
몹시 불편한 기억과 관련된 주제가 나오자 카이젤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역정을 내거나 피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의 감정은 냉정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곁에서 조심스레 그를 지켜보던 윤혁은 일말의 미안함이 들었다. 괜히 트라우마를 건드린 걸까?
“뭐, 그랬었지.”
카이젤은 감정적 동요를 억제하며 숨을 고르며 일화를 풀었다.
“그녀와 다른 친구 하나, 그 둘이서 한창 중립을 유지하던 중 갑자기 나를 배신한 두 반역자 편에 붙어 조력했지. 물론 티아라로서는 나를 아예 몰아낼 생각은 아니었어. 단지 내가 구축한 시스템을 견제하거나 피드백 정도를 할 작정이었지. 그러다가 두 반역자에게 속아 넘어가 버린 셈이지만.”
그 당시, 카이젤은 일생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어처구니없는 몇 번의 실책과 방심을 저지른 탓에 적들의 예기치 못한 무모한 행동에 휘말려 큰 위기에 처했었다. 복잡다단한 변수들이 겹치고 겹쳐 악재를 낳았고, 너무도 어이없이 패배에 가까운 결과를 맞이했다. 그 사고의 결과로 그는 분절되어 좌표가 왜곡된 아공간에 떨어졌고 그곳에서 무기력하게 무장해제 된 뒤 적들이 미리 준비한 범죄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무자비한 처우를 당했다.
“당시의 정세는 아주 복잡하고 긴박하게 전개되었지.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인류연합 간부들이 얼마나 패닉에 빠졌을지 이해가 되나? 그들로서는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카테고리 분류 불가의 초인 넷과 맞상대하는 꼴이 되었지.”
“심각한 위기였겠네요.”
“모두에게 있어서 골머리 썩이는 상황이었지.”
세력이나 인프라나 무력으로는 인류연합이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었으나 잔꾀와 지혜에서는 반역자들이 우위에 서 있었다. 거기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넷. 그들은 교묘한 계획을 통해 카이젤의 부하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브레인이 되어줄 카이젤이 초반에 역공을 당해 도와주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전략 대결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에녹이 나름대로 잘 지휘했지만, 그도 역부족이었다.
“사실 그들의 원래 계획이 시나리오대로 완벽하게 진행되진 못했다. 내가 갇힌 아공간의 좌표 역시 그들의 예상과는 어긋났지. 반역의 주동자는 내 의지를 속전속결로 붕괴시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권한을 빼앗으려 했었지. 그것을 위해서 따로 마련한 시설이 있었어. 그런데 처음 계획했던 그곳에 가두지는 못한 채 꿩 대신 닭 격으로 다른 공간에 전송했지.”
“불행 중 다행이었네요.”
어쩐지 ‘다행’이란 표현을 쓰자니 미묘하게 힘이 실리지 않았다. 영적인 관점에서 그가 어떤 의미의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인지 대국적으로 그의 생존이 과연 이로운 일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심정으로는 안도의 감정이 들었다. 아무리 독선적인 독재자라도 그런 비겁한 방식으로 억울한 해를 입는 것은 탐탁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카이젤이 죽었더라면 세상 전체에 더 큰 혼란이 임했겠지. 윤혁 자신도 형과의 인연을 알지 못했을 테고.
“그럼 반역자들이 형을 잡으러 찾아오지는 못했나요?”
“못했다. 당시에는 인류의 공간 제어 기술 자체가 몹시 불안정했지. 놈들은 나에게 접근하지도 못했고 나를 역소환하지도 못했어. 게다가 내가 통상 공간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발동시켜 기계들의 통제권을 발휘하면 반역자들은 즉각 처분할 수 있는 처지였지. 기술력이 되었더라도 함부로 날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 형이 갇혔던 그 공간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처리된 공간이었군요.”
“그래, 지금이야 물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공간을 포함해 모든 차원에서 작동하도록 강력히 개량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는 원시적이고 뒤처져 있었으니 범 차원적으로 작동하진 못했지.”
어쨌건 이런저런 이유로 일이 복잡하게 꼬인 나머지 반역자들은 차선책으로 미리 잡아둔 포로들의 잔학한 본능을 간접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들은 하이에나들이 결박된 호랑이를 물어뜯도록 내버려 두었다. 극도의 고문으로 카이젤의 정신이 무너뜨려지기를 소망했다.
동시에 그들은 미연의 반전 가능성을 예방하고 뒤처리를 깔끔히 하고자 티아라를 포함한 두 명의 중립자를 처리하고자 움직였다.
“처음에는 네 명이 한 패였지. 하지만 내가 납치당한 걸 깨닫자 두 중립은 손을 뗐다. 자신들이 두 반역자에게 속았음을 알아차렸지. 그들은 양쪽 세력, 그러니까 인류연합과 반역 측을 모두 피해서 몸을 숨겼어.”
“그냥 투항하면 간단하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둘에게는 당시 나를 통상 공간으로 역소환할 가능성을 담은 유일한 열쇠가 있었기 때문이지. 다만, 두 중립자의 열쇠를 함께 쓴다면 안전하게 소환할 수 있으나 한 명분 열쇠만 있으면 그 해당 한 명이 거의 목숨을 포기하기를 각오해야 소환할 수 있도록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지.”
그제야 윤혁은 전에 티아라가 전해줬던 설명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다. 퍼즐 조각이 짜 맞춰지듯 딱딱 이치가 맞아떨어졌다. 티아라가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합당한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만일 인류연합 측에 홀로 잡히거나 투항하면 카이젤을 구출하는데 이용당한 뒤에 목숨을 잃을 위험성이 높다. 반대로 반역자 측에 붙잡히더라도 철저히 이용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제거당할 가능성이 컸겠지.
(다음 회차에 연속됨)
이전회
26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3. 해후 (4) |
다음회
268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3. 해후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