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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68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3. 해후 (6)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2.25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카이젤은 이 부분에 대해 더 알기 쉽게 명쾌히 해명해주었다.

   “중립 입장인 그 둘이 서로를 믿었다면 모를까, 그럴 수도 없었어. 당시 우리 다섯 명은 서로서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배신의 늪 속에 빠져있었거든. 서로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야 납치된 처지였으니 무력했지.”

   “치킨 게임…, 죄수의 딜레마 같은 상황이었군요.”

   “그래, 지혜롭다는 초인조차 불신 앞에서는 무력하다니, 참으로 웃기지. 알레프 노인이 목숨 걸고 중립자를 만나 조율하지 않았다면 파국으로 끝날 뻔했어. 만약 그녀 중 하나가 죽었으면 99% 이상의 확률로 인류연합과 반역자 측이 서로를 필사적으로 죽이는 대전쟁을 벌였을 거다.”

   “그러면 그 여파로 지구도 통째로 공멸했겠네요.”

   “정확해.”

   윤혁은 왜 그토록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자찬하는 교만한 초인들조차도 에드레이 테일란드를 깊이 존경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어르신에게는 과연 단순한 초지능이라는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연록과 지혜와 인품이 있었다. 스스로의 생명을 이타적으로 내어줄 수 있는 초연함까지. 존경심과 그리움이 더 깊어졌다.

   “아, 그나저나 티아라 씨가 그 위기 때 도움을 받았다는 인류연합 간부가 있다고 들었어요. 이명이 뭐였더라. 아, 확률왕(確律王)이라고 했던가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요?”

   “하긴 티아라가 그때 그에게서 도움 좀 톡톡히 받았었지. 최근에도 히어로즈 프로젝트를 벌여서 그렇게 재미를 보더니,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톡톡 튀는 행동력과 발상력 하나는 알아줘야 해.”

   ‘누구길래 형이 저렇게까지 고평가하는 걸까?’

   궁금증이 더 깊어졌다.

   “너도 이미 잘 아는 사람이야. 유성운 동부 섹터장이다.”

   “헉! 유성운 회장님? 그 사람요?”

   의외의 이름에 놀란 윤혁.

   “한번 겪어봐서 알지 않나?”

   “하긴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시긴 했죠.”

   참고로 ‘확률왕’이라는 기묘한 이명은 일곱 ‘시민의 수호자’인 로스트엠페러들에게 보편적으로 붙여진 이명 중 하나인데, 이 이름은 성운의 고유 재능인 ‘양자 확률 특수 연산’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란다. 본래 로스트엠페러들은 각자 자신만의 사병 체계를 소유했으나 성운에게는 그런 군단이 없었기에 재능이 이명에 반영되었다. 말 그대로 성운에게만 주어졌던 능력으로 지금이야 카이젤이 흡수했기에 보유자가 두 명이지만 여전히 대단히 희귀하고 가치 높은 재능이란다.

   ‘전엔 몰랐는데 능력 복제가 정말 말도 안 되는 반칙이었네.’

   고유 능력 같은 희귀 재능마저도 흡수하다니. 그것도 한층 더 강화해서 흡수할 줄이야. 단순히 음악이나 수학의 재능을 흡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유용성 아닌가. 딱 한 번 형 속에 담긴 ‘학습의 괴물’로서의 본성을 보았던 윤혁은 그 두려운 능력의 가치를 더욱 깊이 실감했다.

   ‘그래도 형은 형일 뿐이야. 괴물이 아닌 인간이야.’

   마음 한구석의 양심과 분별력은 여전히 카이젤이라는 존재를 향한 경보를 울렸으나 다른 한구석의 상냥함과 자비심은 그를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내적인 싸움이 무의식적으로 치열히 벌어졌으나 윤혁은 이를 의식적으로 묻어두었다. 아직은 근심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형제는 한참을 더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형은 인류연합이 최근 이룩해온 각종 여러 가지 업적들과 자신이 창조한 과학 기술 지식을 자랑스레 가르쳐주었다. 동생은 선교 여행 당시에 체험한 여러 은혜로운 경험과 회심자들의 간증 일화를 들려주었다. 의외로 형은 담담한 태도로 동생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하였다. 동생의 활약상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지 않고 그저 수고했다고만 말해주었다.

   ‘이젠 성운 녀석이 왜 그토록 막냇동생에게 큰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는지 알겠군. 나 역시도 똑같은 상황에 부닥치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

   카이젤은 왜 이리 자신이 동생에게 연약한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왜일까? 자신은 그 무엇에게도 꺾여서는 안 될 강한 존재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어째서 한 줌밖에 안 되는 나약한 인간, 지극히 평범하여 한 손에만 쥐어도 부스러질 인간에게 휘둘린단 말인가.

어쩌면 그가 죽는 날까지 깨닫지 못할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역대 최고의 지혜자라 인정받는 그에게도 인간 본연의 본질적 문제, 곧 사랑과 인애의 문제는 해석 불가였다.

 

 

 

 

 

 

 

 

*

 

 

 

 

   해가 슬슬 저물자 형제는 개울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제법 괜찮은 온천이 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좋군.”

   둘은 목적지로 걸어가며 계속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기대되시죠?”

   “글쎄?”

   어느덧 온천이 나타났다. 그곳은 천장이 뚫려있는 동굴 안에 있었다. 달빛이 그 틈새로 스며들어 동굴 중앙의 수정에 반사돼 은은한 조명을 자아내었는데 그 잔잔한 분위기가 몹시 일색인지라 명소로 불리기에 흠이 없었다. 또한 산에서 흘러나온 깨끗한 물이 동굴의 바위틈을 통해 작은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렸는데 이 작은 폭포는 몸을 씻는 용도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흐르는 계곡물이 고여 큰 냉탕 여럿을 만들었는데 물이 워낙 잘 순환되어 바닥이 보일 만큼 수질이 청정했다. 또한 지하수가 지열에 의해 가열되어 용솟음쳐 인체에 유익한 광물질을 담은 커다란 온탕도 형성했다. 지하수와 여러 갈래로 갈라진 폭포수는 다양한 위치에 섞여 고임으로써 다양한 온도의 온탕도 생성하였다. 덕분에 목욕하며 피로를 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여긴 생각보다 넓어서 물놀이도 가능해요.”

   과연 물이 고인 온천은 성인 남자 열댓 명은 능히 헤엄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무인도인지라 지금까지는 윤혁 말고는 사용한 사람이 없어서 쓸쓸하게 낭비된 공간이었다.

   “같이 씻으려니 조금 민망하네요.”

   “막역한 친구끼리는 종종 그러지 않나?”

   “하긴 그렇죠. 하지만.”

   막역하다고 할 정도로 두 형제 사이가 가까울까? 어떤 의미에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애매했다. 친형제보다 친밀하면서 어떨 때는 대적보다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존재.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심리적 장벽이 너무도 비가역적으로 많이 허물어진 마당에.

   둘은 탈의한 후 시원하고 맑은 폭포 물에 몸을 씻기 시작했다. 어차피 휴양하러 온 처지라 조급한 마음은 전혀 필요 없었고 여유는 넘쳤다. 형제는 아예 밤새 눌러앉을 태평한 심정으로 눌러앉아 시시콜콜한 것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아버지께서는 잘 지내시나? 아주머니는?”

   돌연 카이젤이 동생에게 부모님 안부를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직 집을 방문하지 않아서요.”

   “결심이 흔들릴까 봐?”

   “……네.”

   윤혁의 시무룩한 표정에 형도 숙연해졌다.

   “네 입으로 안부를 들으려 했는데 좀 아쉽군.”

   “세계 전체를 감시하실 수 있다면서요.”

   “주관적인 경험담과는 다르지.”

   “의외로 감상적이시네요.”

   “비꼴 줄도 알고, 많이 컸군.”

   가볍게 꿀밤을 먹인 뒤 형은 동생에게 아버지의 근황을 알려주었다. 질문한 당사자가 대답을 주는 모양새가 아이러니했으나 어쨌든 동생이 우주에 나가 있던 동안 지구를 감시했던 존재는 형이었으니까. 맏이로서 가족의 일에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 말이다.

   “최근 아버지가 재미있는 사건에 휘말리신 모양이더군.”

   “무슨 일이요?”

   “여러 영웅 녀석들과 만나서 그들과 친목을 다지고 계시지. 그 와중에 나름 교화도 시키시는 중이다. 하여간 반쪽 초인은 이런 방면에서는 오히려 우리보다 더 대단해.”

   여러 의문이 스쳤다. 영웅이라는 자들은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교화라고? 설마 아빠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일까? 나름 전도자이니 충분히 가능하겠다만, 그 대상이 다소 의외였다. 지구의 근황을 잘 모르는 윤혁은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너 지구에 돌아온 지 꽤 됐다며? 사회와 아예 연 끊고 살았냐?”

   카이젤은 윤혁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게……, 네, 맞아요. 진이 허튼 생각하지 말고 쉬라고 해서.”

   “신기하군. 세상일이야 검색 한 번만 해보면 다 알지 않던가. 요새 젊은이들은 죄다 사이버 네트워크 중독이던데, 넌 좀 특이하군.”

   “저 여기 와서는 디지털 금식 중이에요. 가끔은 세상의 잡념이나 방해물을 끊고 전적으로 금식하는 시간도 필요하거든요.”

   ‘금식? 디톡스나 고행 같은 개념인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영적인 금식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카이젤은 제멋대로 예측하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기에 이내 신경을 꺼트렸다.

   그는 다시 동생의 궁금증에 답해주었다.

   “네가 지구를 떠난 직후에 유성운을 배후로 ‘영웅단’이라는 새 조직이 창설되었다. 1차 선발 때는 전직 휴먼 솔져들을 뽑았지. 최근에는 지구 시민 중에서 고귀한 인품과 명예와 영웅성을 소유한 자들을 추가 모집함으로써 무력과 도덕의 균형을 맞추고 있지.”

   과연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평이 적합한 유성운 회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본연의 영웅성과 도덕성까지도 계산 속에 넣어 프로젝트를 기획하다니, 보통의 초인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감상이 들었다.

   ‘그나저나 솔져라면, 설마 신해 형도 그 팀에 소속된 걸까?’

   부디 안전해야 할 텐데.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고 윤혁 자신과 친밀한 인연을 지닌 사람인 만큼 얼굴을 못 보는 지금도 신경은 쓰였다. 신해가 어떤 길을 걸어가기로 택했건 부디 은총과 선한 보호가 뒤따르기를 소망했다.

   한편 윤혁과 카이젤은 계속해서 영웅단 혹은 히어로즈라고 불리는 조직이 거둔 여러 가지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 담화를 주고받았다. 윤혁은 내심 그들의 놀라운 활약에 감탄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꺼림칙한 심정이 들었다.

   ‘유성운 회장은 물질만능주의적 성향이 제법 짙어 보이던데. 히어로즈라는 조직의 설립 취지를 믿을 수 있을까? 이미 연루되어 버린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아빠도 유 회장 같은 사람에게 휘말리지는 말아야 할 텐데.’

   물론 윤혁이 아는 아버지는, 아니 인간 대 인간으로서 보아온 강성한이라는 사람은 소나무처럼 강직하고 듬직한 거목이었다. 그는 본인이 직접 히어로즈에 좋은 영향을 미칠 사람이지 역으로 나쁜 영향을 받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약간의 염려는 들었다.

   ‘하기야 아빠는 날 염려하겠네.’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영향력을 곁에 둔 처지이니까. 그 위협적인 존재와 태평하게 노닥거리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쉴 때는 쉬는 것이 인지상정. 모처럼 찾아온 휴식을 걱정으로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물이 시원하군.”

   “괜찮죠? 자주 놀러 오세요.”

   폭포 물은 너무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알맞았다. 여름철 더위를 깔끔히 몰아내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둘은 쾌적함을 만끽하며 한참을 멍 때리며 몸과 정신의 긴장감을 편안히 푹 이완하였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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