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70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4. 크리스마스의 별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3.12.30 | 회차평점 0 |
Chapter 34. 크리스마스의 별(QUASAR)
한바탕 따뜻한 물에서 땀을 빼낸 둘은 시원한 물 속에서 신체를 편안히 이완한 채로 느긋하게 긴장을 풀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였다. 두 사람 다 물을 좋아하는 성격인지 물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심리적인 경계심이 풀렸다. 상대방과의 공통점 하나를 발견한 윤혁은 은연 중 소소한 동질감을 느꼈다.
한기가 들 쯤 둘은 다시 따뜻한 물쪽으로 몸을 일으켰다.
“피로 좀 풀리세요?”
“나름 괜찮군.”
“일하느라 힘드실텐데 푹 쉬고 가세요.”
이제 슬슬 대화의 바통을 상대쪽으로 넘길 차례가 되었다. 윤혁은 슬쩍 드는 긴장감을 감춘 채 태연한 척 굴었다. 자신도 미주알고주알 선교 사역에 대해서 털어놓았으니 저쪽에서도 소득을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형은 그동안 어디에 나가 계셨어요?”
자신의 근황 쪽으로 주제가 넘어가자 카이젤은 잠시 멈칫했다. 그의 동요를 본 윤혁은 혹시 말하기 곤란한 주제인가 하고 의심했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비밀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몹시 거창하긴 했지만.
“초은하단의 정복.”
간이 작은 동생은 화들짝 놀랐다.
‘드디어 본격적인 우주 정복이 시작된 건가.’
이미 한 번 그의 정복 사업을 보았기에 그렇게 진행되리라 예상은 했으나 이렇게까지나 빠르게 진도가 나갈 줄은 몰랐다. 인류의 팽창 속도는 기하급수적인 함수라도 된단 말인가.
“얼마나 진행되었죠?”
“우리 은하가 속해있는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그리고 그와 인접한 것들까지 포함해서 총 열 개의 초은하단의 정복이 완료되었지. 이미 개척 장비가 대량으로 살포되어 범 항성계 개척과 IDD(Intergalactic dimension door)의 건설이 진행 중이다. 각 은하 중심부의 ‘초대질량 블랙홀’을 매개로 제작한 게이트와 범 우주 통신 채널의 공사도 막바지에 도달했어. 조만간 더 가속될 거야.”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첫 우주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뇌리에 되새겨졌다. 지금까지 윤혁과 그의 친구들이 인류연합의 식민지를 방문하며 말씀을 전하던 사이에, 카이젤은 훨씬 더 드넓은 우주를 홀로 차지하려는 계획을 차분히, 그러나 신속히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못 본 사이에 기술력의 발전이 엄청났나 보네요?”
“보통 원래도 일 년에 백 번 가량은 기술적 변곡점을 맞이해. 네가 하늘도시들을 순회하던 지난해에는 유독 거대한 수확을 많이 얻었지. 워프와 게이트의 이론이 확립된 이래로 가장 혁명적인 의의를 지닌 발명까지 하나 이룩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그가 친히 ‘혁명적’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아 영 심상치 않았다. 궁금증에 사로잡힌 동생은 살짝 형을 구워삶아 최근의 우주 개발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시도했다.
“틀림없이 이 분야에 관해서 형만큼 박식한 사람은 없겠죠.”
그는 은근슬쩍 추켜세우며 떠보았다.
“이번 기회에 저도 한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데 괜찮으려나요?”
“속 보인다.”
윤혁은 뜨끔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뭐 정 알고 싶다면야 나야 상관은 없지.”
“헤헷, 감사합니다.”
형은 촐랑거리는 동생이 바보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귀엽게 느꼈는지 머리를 살살 헝클어뜨렸다. 그는 편한 자세로 팔과 다리를 쭉 뻗으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사 이래로 몇 번의 문명 변곡점이 있었지. 불의 발견이 그러한 예였고, 그 이후로 인류에게 극명한 분기점을 가져다준 기술은 바로 워프와 게이트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그 두 기술의 이론이 확립되었고 같은 시기에 실험에 성공했으며 같은 시기에 실용화되었지.”
희랍 신화에서는 불의 발견을 프로메테우스의 반역 이야기와 연관지어 묘사한다. 허구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만큼 문명의 혁신에 있어서 불이란 빼놓을 수 없는 전환점의 요소임이 분명했다. 인류는 불에 힘입어 지구를 강제로 지배할 권한과 편리한 생활의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간은 그와 대등하다 할만한 혁신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21세기 중반에 이르러 워프와 게이트와 관련된 물리 이론이 대두되면서 인류는 다시 한번 불의 발견에 필적할, 거대한 도약을 이룩할 기회를 얻었다. 실제로 워프와 게이트는 지구를 넘어 우주를 정복할 기회를 선사해주었으니 인류에게 있어서는 새 시대를 열어준 은총이었다.
이 두 기술에 힘입어 인류 문명은 넓은 우주를 누비며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 뿐만 아니라 통신 기술 또한 비약적인 혁명을 겪었다. 수많은 항성계를 손에 넣어 방대한 자원을 확보한 인류의 경제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나아가 차원문이라는 부가적 소득을 얻으면서 상위 차원의 비밀이 속속들이 밝혀졌고 그로 인해 에너지 공학, 물질 공학, 나노 공학, 양자 공학을 비롯한 각종 기술 일대의 혁명도 연달아 이어졌다. 그리고 차원의 속성을 깊이 연구하면서 물리학과 화학은 물론이고 생물학 분야의 지식도 끝없이 확장되었다.
이렇듯 워프와 게이트가 초인 시대 이후의 문명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다. 일일이 그 산물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카이젤의 감상평에 따르면 그가 개인적으로 1세대 초인들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발명과 관련이 있었다.
“특별히 나의 외조부인 초대째 위버멘쉬는 워프와 게이트의 발동 원리를 손수 이론으로 확립한 주역이자 실용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해둔 당사자였어.”
의외의 사실을 추가로 알게 된 윤혁.
“아, 형이 초대째 위버멘쉬의 외손자였군요.”
태생이 로열패밀리였구나. 역시 위인에게서 위인이 나오는건가? 반드시 그러리라는 법칙은 없겠지만 모양새는 꽤나 그럴 사 했다. 하여간 대단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나저나 1세대 초인의 사역이라.’
윤혁은 내심 흥미로운 눈초리를 내비쳤다.
“개발 당시에 에드레이 씨는 따로 참여하지 않으셨죠?”
“그래, 당시에는 외종조부와 외조부가 서로 떨어져 지내던 시기였으니까. 애초에 그 어르신은 인류의 무한한 탐욕이 우주까지 장악하려 들 것을 염려했지. 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반면 외조부님은 인류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그 기술의 완성에 집착하고 매달렸어.”
지금껏 카이젤은 자신도 자신의 외할아버지처럼 인류의 새로운 도약 지점을 이룩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도전하고 추구해왔다. 탁월한 천재성 덕에 지금까지 무수한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문명사적 의의에 있어서 워프와 게이트의 발명에 비견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건 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원래 기술력이든 실력이든 높은 경지에 이르면 한계 이상으로 약진하기가 비약적으로 어려워지니까요. 성장을 위해 요구되는 노력과 성과가 윗단계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지죠.”
“위로해줘서 고맙군.”
카이젤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하지만 이제는 위로도 필요없어. 너와 우주여행을 다녀온 이후 마침내 나는 오랜 숙원 중 하나를 성취했다. 워프와 게이트를 뛰어넘는 특이점을 이룩했지.”
카이젤은 지난번 윤혁을 동반한 원정이 종료된 후, 그날 인류연합의 함선을 보냈던 은하들을 남김없이 정복했다. 그때 확보된 은하의 개수는 총 10,320개. 게다가 개간에 걸리는 시간도 따로 필요 없었다. 시간 여행의 원리를 활용해 과거 시점의 은하로 함선을 파견하였기에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정복지와 연결을 재개했을 때는 이미 식민지 은하 전역이 개척된 상태였다.
이렇게 새로 확보된 은하들은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기존의 은하 간 게이트들은 첨단화된 IDD(Intergalactic dimension door)로 깔끔하게 대체되었다. 또한 각 은하의 중심부를 이루는 초거대 블랙홀의 물리적 비밀이 밝혀지면서 허블 공간 팽창마저 완충할 튼튼한 게이트들도 대거 건축되었다. 덕분에 전에는 불가능했던 은하 간 통신과 이동마저 손쉽게 가능해졌다.
이 기회에 쐐기를 박고자 카이젤은 ‘원거리 타임머신’ 전법을 더욱 확장하여 적용했다. 이 반칙에 가까운 혁신적 전법으로 인류연합은 단기간에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이라는 수천 개 은하 분량의 권역 전체를 잠식하였다.
교통 통신 기술력의 진화에 힘입어 정복 속도는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가속되었다. 우리 은하 하나를 잠식하는 데 걸렸던 시간이 수십 년이었다면, 수많은 은하계를 집어삼키는 데는 불과 1년 남짓 걸렸다.
자연히 인류가 단 하나의 은하를 지배하던 시절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막대한 부와 영광이 연합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 경제력을 기반으로 인류는 온갖 항성 개조 실험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그렇게 막대한 실험 데이터가 쌓이며 테크놀로지가 향상되자 이윽고 최소 자원으로 인공항성을 양산하거나 항성을 영구동력원에 근접한 구조물로 개화시키는 경지에까지 도달하였다.
한편 풍부한 경제력은 곧 과학 기술 수준의 향상으로 직결되었다. 시뮬레이션 우주의 능력을 힘입어 완성 단계까지 성사된 실험들이 이내 새로 정복된 영토와 천체 자산에 대거 실용적으로 적용되었다.
실제적인 실험 적용 무대가 늘어남에 따라서 시너지 효과로 부가적인 신기술들이 발굴되어 홍수처럼 범람했다. 이러한 기술 향상은 다시금 시뮬레이션 우주의 자체적인 창조성을 보강하고 촉진했다. 이러한 선순환이 불과 짧은 시간 동안에 어마어마한 횟수로 반복되었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의 개량은 문명 진보의 축을 뒤바꾸어놓았다.
“타임필드 기술도 일전보다 수억 배 이상 진보했지.”
타임필드는 현재로서는 단기간에 우주 개척을 고속으로 진행하기 위한 핵심 요령. 근래의 타임필드 개량은 우주 구조물 건설이나 천체 개척에 필요한 시간을 비약적으로 압축해주었다. 이 역시 선순환의 아주 중요한 한 축이었다.
“와, 그럼 시간 압축률이 수억 배 늘었다는 말인가요?”
“압축률만이 전부는 아니지. 안정성도 높아졌으니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진이 언뜻 ‘타임필드는 아버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언질 줬던 기억이 났다. 현존하는 초인들은 그저 이미 완성된 버전의 타임필드 기술을 빌려서 응용할 뿐 그 원리를 이해하거나 독자적으로 동급의 유사품을 개발할 능력이 없었다. 아직은 카이젤을 제외한 모든 초인의 힘을 합쳐도 불가능한 과업이라고 했었다.
“과연 시간 기술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단하네요.”
“그렇지.”
“대체 그런 연구는 어떻게 하시는 거죠?”
“다 그런대로 방법이 있기 마련이지.”
자신만의 비결들을 자랑스레 회상하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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