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78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5. 강재혁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1.17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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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는 리온이 재미있는지 재혁은 피식 웃었다.
“표정이 안 좋아졌군.”
“강재혁 대표님께서 윤혁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임은 잘 알겠습니다.”
“마치 너와 티아라처럼?”
리온의 표정이 좀 더 불편감으로 물들었다.
“설마하니 정말로 생각을 읽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글쎄. 내게는 인간 뇌의 전자 움직임 패턴이 보여. 구태여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러하지. 그 관찰 데이터를 바탕으로 연산해내면 대강 상대가 의식 속에 떠올린 생각이나 기억 정도는 읽어낼 수 있어. 깊은 마음의 본체는 못 읽지만.”
‘하나님과 같은 완벽한 감찰은 아니라는 뜻인가.’
어찌보면 유한한 피조물이니 당연한 이치였다. 그럼에도 리온은 괜히 안도감이 들었다. 저 기묘한 사내라면 정말로 작정하면 뭐든 해낼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에 어디까지 위업을 해낼지 불안감이 앞섰다.
“그래도 썩 유쾌하지는 않네요.”
“넌 담대해서 재밌군. 비굴한 내 부하들보다 나아.”
재혁에게는 리온 마흐무드란 존재가 제법 흥미롭게 다가왔다. 키도 자신보다 최소 30cm 이상 모자란 왜소하고 근육 적은 체구, 잘나거나 비범한 면 하나 없는 보통의 얼굴, 지능도 일반인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껏 초지능만 부리던 시시한 초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비범성이 느껴졌다.
‘그래, 마치 알레프 노인과 비슷하군.’
그 노인에게는 분명 다른 초인에게 없는 지혜와 품위가 있었다.
‘설마 그의 품성과 동일한 성질이 이 녀석에게도 있는 것일까?’
혹시 이 녀석이라면 가능할지 재혁은 한번 시험해보고팠다.
“넌 나를 꾸짖고 싶어서 안달이로군.”
“그게 무슨 말씀이죠?”
당황한 생쥐를 보고 맹수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난 말이야, 누구에게도 훈계받은 적이 없었어.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지배자의 그릇으로 훈련시키긴 했지만, 얼마 안 가 그녀의 상식 범주를 넘어섰기에 책망받을 기회는 없었지.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항상 남들을 가르치고 훈육하는 입장이었어.”
‘그거야 당연히…….’
리온의 무의식에 불쑥 떠오른 말을 재혁이 즉각 가로챘다.
“힘과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긴장감에 리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상성이 너무 안 좋았다.
“어차피 네가 무슨 생각을 의식해도 뇌의 언어생성 구역을 투시하면 내가 먼저 알아차리게 된다. 심지어 유사 예지 예측력을 사용하면 뇌 조직에서 일어날 몇 초 뒤의 신경 전기반응을 예측하는 것마저 가능하지.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네가 먼저 당당히 털어놓지 그래?”
리온은 다시금 상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마냥 먹잇감을 잡아 뜯으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때리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자신에게 덤벼보라는 자비의 표시 같았다. 두려움은 들었으나 어차피 이판사판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의 말대로 솔직해지는 편이 나으리라. 리온은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용기를 구한 뒤, 거침없이 직구를 던져보았다.
“대표님께서는 동생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하시는지요?”
“하하,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타인의 존엄성은 전혀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를 도구로 여기거나 짓밟거나 조종하는 방식으로 평생을 일관해오셨겠죠. 틀렸습니까?”
재혁은 상대를 제대로 만났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반대로 리온은 불 속에 몸을 내던지기 일보 직전의 감각을 체감했다. 리온이라고 예의의 가면을 쓸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독심술 때문에 그 모든 방어막이 강제로 무장해제 된 지금 솔직해지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만일 자신이 조금이라도 유순한 말로 우회하려고 했다간 재혁이 뇌파 조종을 써서라도 본 생각을 끌어낼 기세였다.
‘강재혁. 저자가 전에 윤혁이 말했던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인가?’
일전에 티아라의 교활한 계획의 마수에 휘말렸을 때 윤혁은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 리온을 구해줬었다. 그 후 윤혁은 “나중에는 네가 나를 도와주는 거다.”라면서 신의의 약속을 제의했다. 리온은 그 빚을 잊지 않았다. 이번이야말로 그 빚을 갚아야 할 절호의 기회임을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거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걸. 윤혁은 티아라 사부를, 나는 강재혁 대표님을 상대하라니, 너무 난이도 격차가 심하잖아.’
하지만 우정으로 맺어진 약속에서 이해타산을 따질 자리는 없는 법.
“객관적인 평가 방식은 참 괜찮군. 그래, 네 말이 맞는군. 하지만 나는 내 동생에게는 지금 너에게처럼 정신 간섭을 사용하지는 않아. 약속을 나누었거든. 그러므로 난 내 동생의 생각을 읽지도, 조종하지도 못한다.”
“그 약속을 진중하게 여길 만큼 대표님은 동생을 귀중히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깨트릴 수 없는 속성의 약속이긴 해서. 그나저나 귀중함이라, 그 부분은 잘 모르겠군. 솔직히 부정하지는 못하겠어. 녀석과 만난 후 나 스스로도 감정의 방향이 헷갈릴 때가 많아서 말이지.”
나름 재혁은 이 상황이 즐거웠다. 자신을 꾸짖으려는 인간을 만날 줄이야. 동생 이후로 이런 자극적인 즐거움을 준 존재는 오랜만이었다. 좀 더 시험해보자.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저 영적 전사를.
“넌 내가 밉겠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하셨습니까?”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구나.
“너희는 조금이라도 자신들에 거슬리는 정치적 존재가 나타나면 묵시론적 프레임을 씌우지 않았던가? 내가 기억하기론 역사상 유명한 정치인들은 다 한 번씩은 너희 비평에 희생되었던 것 같던데. 정치적 악마화(Political demonization), 아주 편리한 논리야. 상대를 마음 놓고 미워하게 해주는 도구로군.”
리온은 뜨끔하였다. 확실히 지난 역사 내내 기독교는 해당 시대의 특정 정치 세력에 의심과 의혹의 망을 씌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금이라도 핍박이나 핍박 비슷한 대우를 받으면 상대편을 ‘짐승’이라고 지목하고 저주했었다. 심지어 유명한 종교개혁자들조차도 그러한 프레임 씌우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 지목 대상이 악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한 번도 묵시론적 정죄가 옳았던 적은 없었다.
“대답이 없군.”
“혹 불편하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선을 넘어 판단을 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성도들도 모두 한때는 불신자였으니까요. 같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심판하겠습니까. 그리고 저희는 설령 불만감이 있더라도 국가를 다스리는 위정자에게 복종합니다. 강재혁 대표님은 현 인류의 지도자이니 저 역시 진심으로 예를 갖춰 대할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신의 뜻을 거스르는 명령은 예외겠지.”
“물론입니다.”
재혁은 웃으며 나름대로 합격점을 주었다.
“신념은 뚜렷해서 좋군. 교활한 자칭 성녀보다는 나아.”
“대표님은 사부를 잘 아십니까?”
“물론이지. 너도 그녀에게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오랜 친구이자 악우다. 엄밀히 말하면 일방적인 관계였지. 내게 진정한 의미의 ‘수평적인 친구’는 없었으니까.”
“안타깝네요.”
리온은 상대방에게 아주 조금 측은함을 느꼈다. 윤혁과 리온이 영혼의 교감을 온전히 나눈, 거짓 없는 진실한 친구인 것에 비해, 저자는 그나마 자신의 급에 가까운 티아라조차 그저 낙오자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초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어떻겠는가.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못한 채 스스로를 가둬 유대감조차 나누지 못한다니, 비운의 사람이로구나.
“그런가? 그러면 너란 인연은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신께서 정의하기 나름일 겁니다.”
“꾸짖고 책망하는 자. 내게도 가끔 옆에서 그런 간언을 해줄 이가 필요해. 내게는 그런 자가 없었지. 네 말대로 내가 타인을 마음대로 다루는 성향이 된 것은 그런 탓도 없잖아 있었겠지.”
재혁에게 있어서 동생 윤혁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양심과 애정의 끈이었다. 그를 붙들어 매는 강력한 힘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끈끈한 정 때문에 쓴소리를 나누는 데 한계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윤혁과는 별개로 질책하고 가르치는 자가 재혁에게는 필요했다. 그나마 근접한 후보가 에드레이였으나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러니 더더욱 네 역량이 궁금해지는군.”
리온은 침착하게 자신의 혼을 향해 용기를 내라며 독려했다. 상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까. 이건 어쩌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는 토끼를 향해 ‘내 이빨의 찌꺼기를 빼내 보아라’ 하고 부탁하는 격이 아닐까? 내가 간언을 하고도 저 무서운 자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보고 대언자 노릇을 하라고?’
그럴 자격이 있긴 하려나? 과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왕들을 꾸짖고자 대언자들을 파견하셨다. 그리고 그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제 목숨을 걸고 직언을 던졌다.
[왕에게 나아가 내 전언을 전하라.]
마음속에서 세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분명한 목자의 음성이었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건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임이 분명했다. 재혁의 존재를 처음 발견하자마자 이 섬에서 달아나고픈 마음이 들었음에도 기어이 이 위기의 자리로 몰고 가신 것을 보면 더욱 확실했다. 지금의 자신은 그런 거대한 일을 감당할 그릇이 될까?
‘하지만 가장 뛰어난 대언자 중 하나였던 엘리야조차도 아합왕과 다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하물며 강재혁 대표님은 아합 따위보다 몇 경배, 아니 몇 겁 배 이상 막강한 존재. 반면 나는 엘리야보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존재다. 맞상대가 되긴 하는 걸까.’
그래도 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목숨을 잃는 셈 치자.’
“……대표님께서는 어째서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을 알면서도 그분의 뜻과 계획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방향으로 인류를 이끌고 계신 겁니까?”
즉각 재혁은 고양이 앞발로 얼굴을 얻어맞았을 때처럼 당혹감을 얼굴에 드러냈다. 겉보기에는 무미건조했으나 그의 미간은 평소와는 다르게 미묘하게 각도가 뒤틀어진 상태였다.
‘처음부터 민감한 역린을 찔러오다니.’
유약해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제대로 강단 있는 선지자였다.
“존재하는 만물은 그분의 손에서 지어져 그분의 주관 아래 있고 그분 안에서 존재의의가 완성됩니다. 그 주권을 감히 인류가 찬탈하려는 행위는 명백한 반역이자 가장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무지한 자라면 모를까, 당신의 지혜로는 분명히 알 수 있을텐데요? 왜 그런데도 그분을 경외하기를 싫어하십니까?”
목숨은 뒷전으로 내어둔 리온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깊은 응어리 서린 의문을, 특별히 인류의 현 수장인 저 사람에게 던지려 아껴두었던 직언의 질문을 남김없이 모조리 쏟아부었다. 그것은 강재혁이라는 한 개인에게 던지는 질문이기에 앞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류를 향한 리온의 애처로운 책망에 가까웠다. 대표로서 재혁은 신의 대리자 앞에서 이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주님께서는 역사상 존재했던 피조된 인간 중 당신을 드높이셨고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달란트를 부어주셨습니다. 외적인 아름다움, 힘, 권세, 건강, 지혜, 지식, 부유함까지 포함해서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과분하다고 해도 좋을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청지기된 당신은 선물을 맡기신 주인의 영광은 높이지 않고 저 자신의 영광만 드높이는 것입니까?”
“계속해봐.”
생쥐가 큰 사자 앞에서 큰 소리로 꾸짖는 듯한 장면. 매우 흥미로웠다. 딱 한 가지, 사자의 자비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잔잔한 불안함만 제외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분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렇다 쳐도, 왜 당신이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그러한 식으로 행하셨습니까.”
리온은 옛 기억들을 계산해본 뒤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저는 제 친구인 대표님의 동생과 여러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그곳들에서 자유의지를 제한당하고도 그 사실조차 모르는 불쌍한 영혼들을 무수히 보았습니다. 배후에는 당신이 있었겠죠.”
재혁은 냉담한 표정으로 잠잠히 들었다.
“그렇게 행동한 나름의 이유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대단히 복잡한 정치적 계산일 수도 있고, 당신 나름의 대의를 위한 필연적 선택일 수도 있었겠죠. 제 짧은 식견으로는 그런 부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리온은 영의 감동에 이끌려 조리 있게 진리를 향해 접근하였다.
“아니면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한 반응이려나요? 당신의 마음속에 어떤 쓴 뿌리와 한과 아픔이 있는지 저는 감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행보가 정당화되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아픔으로 쓰라려했다면 타인의 아픔도 동일하게 생각하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제 재혁의 한쪽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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