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80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6. 인터미션 IV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1.22 | 회차평점 0 |
Chapter 36. 인터미션 Ⅳ
본부로 돌아온 리온은 본격적으로 2차 선교 여행의 개시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새로운 참모가 전체적인 판을 훌륭히 조성해주었다. 동료들로부터 능력과 신용을 확실하게 입증받은 아나스타샤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압도적인 지혜를 발휘하였다. 그녀는 그 재주를 십분 활용하여 선교팀을 체계적으로 재구축하고 모든 시나리오의 현지 전에 대비한 전략 체계를 설립하는 데 힘썼다.
“저분은 어디서 오신 분이길래 저렇게 혜안이 탁월하시지?”
“그러게나 말이야. 성경 말씀에 관한 지식은 물론이고 현 세계정세의 흐름에 대한 정보도 손바닥 보듯이 하잖아. 거의 전 방면으로 모르는 게 없다니, 참 경탄할 노릇이지.”
“사실 나도 처음에는 그녀가 조금 의심스러웠는데 몇 개월간 같이 일해보니 기우였다는 것을 알겠어. 확실히 올바르고 굳건한 신앙을 지닌 신실한 현인이야. 대체 저런 인재가 왜 숨어서 지냈을까?”
각 소그룹의 리더를 비롯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동료가 아나스타샤의 추진력과 현명함에 감탄했다. 어느 쪽이 물이고 어느 쪽이 물고기인지 말하기 애매할 정도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은 강력한 날개를 얻었다. 그녀는 에드레이의 유산인 동시에 주님께서 최후 대결을 위해 내려주신 은택이었다.
그녀는 그간 선교사들이 끙끙 앓았던 난해한 과제들을 몇몇 해결해주었다. 가장 먼저 시행한 일은 리온과 그의 친구들이 미리 확립해놓은 네트워크를 확장해 전 세계에 흩어져 숨어 있는 신실한 자들, 곧 성경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믿는 참된 형제들을 모조리 물색하였다.
그녀는 경이로울 정도로 사람의 심리와 행동 패턴을 잘 간파했다. 그랬기에 누가 참된 알곡이고 누가 거짓된 가라지인지를 상당히 잘 분간하였다. 그녀는 그 분별력을 기반으로 남아있는 알곡들을 물색한 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낙심과 타성에 젖어 묻혀 있던 진정한 마음 위에 생기를 더해줌으로써 재기할 기력을 회복시켜주었다.
그 후, 그녀는 그들로 하여금 ‘최후의 한 판’에 동참하도록 설득하였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무의미한 것. 그녀는 더 많은 이들이 우주 선교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덕분에 고작 스물다섯 명의 제한된 인원으로 시작되었던 1차 선교 여행 때와는 달리, 2차 선교 여행 프로젝트는 지상에 남은 대부분의 신실한 자들을 공동 참여자로 아우르게 되었다.
“나는 배후에서 섬기는 참모일 뿐입니다.”
모두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와중에도 아나스타샤는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고 리온을 지도자로서 존중하였다. 본인은 그저 리온을 곁에서 보좌하며 조언과 지혜를 제공하는 식으로만 일했다. 이 역시 현명한 전략이었다. 이미 얼굴이 알려져 있으며 명망도 높은 리온이야말로 젊은 성도들을 통합할 구심점으로 적격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내심 그녀를 의심하였던 리온도 그 추진력과 정직함과 지혜를 보고는 신뢰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나스타샤가 두 번째로 시행한 과업은 다수의 백업 선교팀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의외로 그녀는 1차 여행 때와 같은 ‘소수 정예 전략’ 대신에 다수의 팀을 구성해서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하늘도시를 점거하자는 과감한 전략을 제안했다. 진중한 리온은 그녀의 의견에 관해 설명을 요구했다. 의도는 공감되었으나 방법론적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의 고견을 듣고 싶었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그녀의 권고가 이어졌다.
“이번 타이밍이야말로 앞으로의 승부를 가를 기로이기 때문입니다.”
“승부라니요?”
“강윤혁 씨가 개시한 식민지 선교 전략, 그리고 인류연합 수장의 우주 정복 계획, 두 흐름은 사실상 길항제(antagonist)의 관계나 다를 바 없습니다. 두 개의 계획은 필연적으로 곧 충돌할 것입니다.”
리온은 엄중한 선언에 긴장하였다.
‘강재혁 대표님과 윤혁, 그 둘의 대결인가? 아니,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최종 승부라고 봐야겠지. 두 사람은 단지 각 진영의 대표자일 뿐.’
아나스타샤의 증언이 더 이어졌다.
“심증뿐이긴 하지만, 이미 인류는 수많은 은하를 손아귀에 넣은 듯합니다. 지금은 우주 인류가 하늘도시에 갇혀있지만, 조만간 그들도 시민권 혹은 그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도시끼리의 물리적 교류도 자유로이 이뤄질 것입니다. 아울러 행성 테라포밍도 진행되는 중이니 그곳의 개방도 곧 시간문제입니다. 필시 인류연합은 식민지 인간들을 새 행성에 옮겨심을 것입니다.”
아나스타샤는 장차 인류연합이 보일 행보를 손바닥 아래를 내려다보듯 훤히 추측해내었다. 어찌나 멀리 정확히 내다보는지 에드레이 같은 현자가 되살아나 함께하는 것만 같은 착각도 들었다.
“더욱이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현장에 다녀오신 당신의 증언이 담긴 1차 선교 여행 보고서를 참고해보니, 우주 인류는 초기 세대부터 현세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지하 어딘가에 따로 동면 보관되어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노화를 억제하는 기술력이라면 능히 가능하고도 남겠죠. 그 동면 된 인간들도 곧 우주 전역에 뿌려질 것입니다.”
“역시나 그랬군요.”
여행 도중 동료들과 더불어 토론하면서 대강 추론한 바와 아나스타샤의 의견은 얼추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심증이 쌓임으로써 내적 확신이 강해졌다. 앞으로의 향방이 정말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길항제 관계’란 말은 무슨 뜻으로 하신 표현입니까?”
리온은 껄끄러운 감을 지우고자 좀 더 명료화된 해석을 요구했다. 지적 수준이 달라서 그런지 그녀의 비유법과 표현법은 한 번에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홀로그램 도면 위에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구의 교회가 먼저 전 우주 인류를 복음화시키느냐, 아니면 인류연합이 먼저 우주 인류를 광활한 우주 곳곳에 퍼뜨려 무한정 팽창시키느냐, 그 두 물결의 속도 경쟁이 관건입니다.”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해설에 감이 확 와닿았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기회를 놓치거나 시간을 허비한다면 인류 가운데 복음화되지 못한 국소 영역은 인류연합에 의해 팽창합니다. 영적 무지 상태에 놓인 자들이 무한정 후손을 불리게 되겠죠. 그 뒤로는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 후손들에게 전도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주의 공간 팽창을 빛의 전파 속도가 따라잡지 못하듯, 자칫하면 복음의 전파 속도도 인류의 팽창에 뒤처질 위험성이 컸다. 물론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귀중한 한 영혼 한 영혼이 건짐받는 위대한 역사는 일어나겠지만, 온 나라 만방과 모든 민족 가운데 복음이 증언되리라는 종말의 예언은 실현에서 멀어진다.
“안 될 일이죠.”
“네. 하나님의 계획은 늘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니까요.”
다만 아나스타샤는 성도 측이 세상과의 속도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극히 희박함을 정직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비관적인 현실주의자라기보다는 신앙적인 현실주의자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도 믿었고 동시에 성도들이 맡아야 할 현실적 책임에 대해서도 적극적이고 실용적인 마인드를 지녔다.
“조금이라도 더 승률을 확보하려면 사고의 틀을 넓혀야 합니다.”
아나스타샤는 한 가지 창조적인 사고 전환을 리온에게 제안했다. 인류연합의 최대 장점이자 고지 중 하나인 타임필드, 그것을 활용하는데 주안점을 두자는 역설적인 아이디어였다.
“타임필드라면, 시간을 압축하는 그 기괴한 기술 말입니까?”
“네, 강윤혁 씨에게 이미 들으셨겠죠?”
“물론이죠. 아니, 직접 제 몸으로 체험해보기까지 했습니다.”
“그 테크놀로지는 인류연합의 대표가 우주 인류의 인구를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 손수 고안한 기술입니다. 원래는 항성계들의 무인 개척을 더 빠르게 시행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기술이죠. 어느 순간부터엔가 인류 증식을 촉진하는 용도로도 쓰이게 된 것 같지만요.”
현재의 거대 문명을 구축해낸 원동력이자 세상 주관자들의 유용한 무기.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동시에 역발상적인 측면도 강조했다. 타임필드가 역으로 선교사들에게 호재로 작용하게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단 복음의 씨앗을 어느 한 곳에 심어놓으면 해당 지역에 타임필드가 발동된 뒤로는 수천 년간 교회가 꾸준히 내부에서 성장하게 될 기회를 얻게 된다. 이 같은 ‘겨자씨의 성장’이 착실하게 누적된다면? 인간들의 작은 노력이 하나님의 섭리에 힘입어 오병이어(五餠二魚)처럼 증폭된다면?
“세상 사람들의 노력과 발버둥마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작은 실낱에 불과하죠. 우리의 헌신과 그들의 발악은 정교하게 교차되고 짜여 그분의 위대한 태피스트리를 자아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마지막 결말이 나타난 뒤 주님의 영광을 평안히 만끽하면 됩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승리에 갈급한 갈망이 깃들었다.
“옳은 말씀이다만, 과연 그 전략이 계획대로 먹힐까요?”
리온의 속눈썹이 의문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믿음의 용사라지만 여전히 그에게도 연약함이 있었고 의심과 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주님의 계획이 자신들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을까? 부끄럽지만 현실적으로는 너무도 막연한 맹신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최대한 많은 팀을 동시에 내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많은 분이 현지에 뿌리를 내리시는 편이 좋습니다.”
“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리온은 동요했지만,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장난 한 점 없이 비장했다.
“그렇습니다. 지구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타임필드에 갇혀서 현지에서 평생을 보내다가 나이를 먹고 소천하실 겁니다. 지구 입장에서는 성도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일이겠죠.”
선교지에서 평생을 헌신하다 사랑하는 그 땅 주민들과 함께 현지에 뼈를 묻은 선교의 영웅들은 지난 세월 숱하게 있어왔다. 리온과 동료들도 언젠가는 자신들도 그런 그들의 족적을 따라가기를 바라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지체없이 모두가 그 길을 택해야 한다? 선뜻 가벼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분도 이미 깨달으셨겠지만, 고작 몇 달간의 전도로는 한 세계에 진지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내리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찾아갈 지역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은인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삶 전체를 선물로 내어줄 헌신적인 은인들이 말입니다.”
“그런 은인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지역이 최소 수천만 이상의 세계이니, 참으로 추수할 밭은 많으나 추수에 쓰임 받을 일꾼은 너무도 부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이 지당하군요.”
어떤 의미로는 아나스타샤의 이 제안은 선교사들 모두를 헌신하는 희생자의 길로 내몰려는 급진적 계략이나 다름없었다. 지구의 그리스도인 전부를 소모해 땅에 떨어져 썩는 밀알로 만들려는 계획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사라고는 해도 우주 표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선교 여행 시작 후 며칠 만에 파견된 선교사의 대다수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인력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어.’
지구라는 행성 위에 남은 교회의 교세, 그것을 내려놓아야 할 시점이었다. 어차피 교세라고 해도 남아있는 분량이 거의 없긴 했지만, 이제는 있는 것마저도 포기해야 할 판국이었다. 이는 복음의 물결이 지구라는 틀을 넘어 넓은 우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 희생이었다. 과연 그 희생의 열매를 충만히 되찾을 수 있을까? 리온은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주님의 역사를 믿기를 택했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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