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81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6. 인터미션 IV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1.25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그러나 결단을 내린다 해도 현실적 문제가 남아있었다.
“틀림없이 스스로를 강윤혁 씨의 후원자라고 소개했던 그 초인은 여러 선교팀을 동시에 옮겨주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강윤혁 씨가 동행하는 리온 당신의 팀에만 관심을 베풀겠죠.”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네요.”
아나스타샤도 내심 마음이 아팠지만, 전략가답게 냉정한 현실을 지적했다. 진이라는 초인은 여러 선교팀을 챙겨주지 않을 것이다. 최선의 시나리오를 상정한다고 해도 딱 한 번 못 이기는 척 옮겨주기만 할 뿐, 그 뒤로는 시간 감옥 속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리온 당신은 동료들을 설득해주세요. 선교지에서 평생을 보내는 일은 결국 철저히 자원하는 마음으로만 결정되어야 하니까요. 분명 쉽지 않은 선택일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믿음의 소유자라도 완전한 헌신의 자리까지 내려가기는 쉽지 않은 법이니까요.”
“후원자가 과연 그 많은 인원을 우주로 데려가 줄까요?”
리온으로서는 솔직히 걱정이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희생이야 자신들이 결단하면 될 문제지만,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오차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갈 수 있을까?
“그자를 설득하는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 거물들을요?”
“이미 사전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 있습니다.”
아나스타샤의 빈틈없는 계략성과 준비성에 리온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초인 측과의 거래는 항상 윤혁의 몫이었다. 그것도 항상 즉석에서 이뤄지는 불완전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그 역할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중이었다. 그녀를 믿어봐도 될까? 리온은 팽팽히 머리를 굴리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확실히 여태껏 세계 측과 거래하는 일은 윤혁에게만 맡겨왔지. 아무리 형이 세계의 수장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 친구에게 몹시 부담이 컸을 텐데.’
이제 지혜로운 참모가 등장했으니 체계적인 전략 수립과 외교의 역할은 그녀에게 넘겨도 좋으려나? 그렇게 한다면 윤혁은 현장에서 뛰는 한 가지 일에만 순전하게 집중할 수 있을 테니 유익이 될 터. 다시금 깊은 고민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고민의 향방에 쐐기를 박았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저를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참고로 전 과거에 이미 몇몇 주요 초인 간부들과 만났었습니다.”
“네? 정말입니까?”
냉큼 던져진 충격 선언에 리온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저 역시 그들과 비슷한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설마 당신도 초인입니까?”
잠시 그녀는 망설이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엄밀히는 반쪽짜리입니다.”
“반쪽짜리라면?”
“말 그대로입니다. 통상 초인과 비교해 능력이 불완전한 존재죠. 지금껏 각 세대의 초인 가운데는 반쪽 초인이 항상 하나 있어왔습니다. 1세대 때는 에드레이 테일란드 어르신. 그리고 2세대에서는…….”
순간 리온은 어르신의 타계 때 성한이 유언을 듣던 장면을 떠올렸다.
“강성한 씨, 윤혁과 강재혁 대표님의 친아버지이겠군요.”
“네.”
“역시 그분도…….”
“그리고 3세대 초인 중 반쪽짜리가 바로 저입니다.”
아나스타샤에게는 한없이 초인에 가까운 지혜와 더불어 한없이 초인에 가까운 육체가 있었다. 지혜 쪽만을 보유한 에드레이, 육체 쪽만을 보유한 강성한과는 또 다른 유형의 반쪽짜리로 양쪽 부문 모두 턱걸이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초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저를 직접 가르치신 스승은 에드레이 어르신이었지만 그분과 항상 같이 생활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어르신이 어린 시절의 저를 거둬들인 이후 저의 양육을 주로 맡았던 분은 어르신의 수양 따님이셨습니다.”
아나스타샤는 인자함이 넘쳤던 그 할머니를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2세대 상위 초인 몇몇과 알고 지내셨죠. 어떤 이들과는 몹시 막역하기도 했습니다. 현 인류연합 대표의 친모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어린 시절 2세대 초인은 물론 그들과 얽힌 3세대 초인들과도 종종 마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인류연합의 현 간부들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그들은 행방불명이 된 에드레이 씨의 자취를 찾으려는 목적으로 그분의 따님과 자주 접촉했었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이웃이었던 저는 원치 않게 초인들과 불편한 안면을 틀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 이것 참.”
“결과적으로는 이용할 기회가 생겼으니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긴 하지만.”
실용적인 성격인 아나스타샤는 흔쾌히 자신의 자원을 활용키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현 초인 간부 중 가장 이용 가치가 좋은 사람이 누구인지 귀띔해주었다. 최근 들어 기독교의 재기하려는 몸부림에 대해 호의적인 행보를, 최소한 적대적이지는 않은 행보를 보이는 자가 그래도 간간이 몇은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유성운 동부 섹터장도 그중 한 예시였다.
“초인들을 역이용한다라.”
“그들도 우리를 실컷 이용하려던 눈치던데, 피차일반 아니겠습니까?”
“뭐, 저도 딱히 양심에 걸리진 않습니다. 그나저나 지구의 초인들을 아나스타샤 당신의 인맥만으로 구워삶을 수 있겠습니까?”
“효과가 얼마나 클지 장담은 못 하겠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당신들을 후원한다는 그 후원자의 연락처를 저에게 넘겨주신다면 제가 그자와도 접촉점을 만들어서 나름대로 양측 모두 흡족할 만한 방향으로 거래를 시행하겠습니다.”
아나스타샤는 그것만으로 괜찮을지 재차 고민해보았다. 곰곰이 돌아보니 현재로서 도출해낼 수 있는 최선의 거래처는 이 정도 범위가 전부였다. 다른 초인들의 귀에 2차 선교 여행 계획에 대해 많은 정보를 흘리지 않으려면 현재로서는 유달리 독단적인 행보를 보이는 초인을 포섭해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
‘유성운 섹터장, 진 라흐블뤼크, 이 둘은 각각 인류연합 대표의 동생과 부친과의 일로 긴밀하게 얽혀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용하기에 최적격이야.’
그렇게 아나스타샤는 지구 교회의 최종결전 승부수나 마찬가지인 2차 선교 여행 프로젝트를 완벽히 완성해내기 위해 에스더 왕비와 같이 지혜로운 계교를 창안한 뒤 리온과 더불어 실행에 박차를 가했다.
*
고차원의 시공간 영역.
{Quasar–I 안정화 완료.}
{복제 프로세스 준비 완료.}
{인피니티 모드를 발동합니다.}
이곳은 벌크, 소스, 리얼리티, 세 축의 상위 차원이 모두 접하는 영역으로 통상 공간과는 시간이 흐르는 기전이 달랐다. 이 영역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인류는 ‘테서렉트 아키텍쳐’를 건설했다. 블랙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수많은 테서렉트 아키텍쳐들은 얽히고 얽혀 거대한 우주적 그물망과 다중 복합체를 형성하였다. 현재 테서렉트 아키텍쳐는 거의 전 방면의 산업에 응용되는 중으로 그 효용 가치는 가히 무한에 이를만했다.
상위 차원 속 테서텍트 아키텍쳐 내부로 소환된 ‘원본 퀘이사 엔진’은 마침내 안심하고 최종 모드를 발동하였다. 지나치게 강력한 출력 때문에 통상 공간에서는 제어가 어려웠던 차였다. 안전성 문제도 있고. 하지만 테서렉트 아키텍쳐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제 퀘이사 엔진은 자신의 무한 에너지 발산을 활용해서 새로운 자녀들을 낳는 작업을 개시했다.
엔진에서 솟구친 방대한 에너지가 응축되자 테서렉트 아키텍쳐는 촉매제가 되어 에너지를 변형하고 안전화하고 지탱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퀘이사 엔진을 출산하는 일을 돕는 산파 역할을 감당하였다. 곧 Quasar–I으로부터 1차 복제형 퀘이사가 하나씩 제작되었다. 상식의 틀을 부수는 빠른 속도와 효율로. 그것은 허상이나 분신이 아닌, 실질적인 영구 생산이었다. 흡사 암탉이 달걀을 낳아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시키듯.
다만 인피니티 모드에는 1회 발동 당 지속 시간의 제한이 있었다. 1시간 동안 엔진이 힘을 뿜어내면 향후 1년간은 휴면상태에 빠진다. 그렇기에 원본 퀘이사는 그 1시간 동안 최대한도로 많은 자녀를 낳아둘 필요가 있었다.
일련의 복제 작업을 마치고 Quasar–I이 휴면상태에 빠지자 그 딸들인 1차 복제형 엔진들은 어미의 몸에 연접하여 다시금 손녀들을 생산해냈다. 곧 2차 복제형 엔진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비록 원본인 Quasar–I이나 1차 복제형들과는 달리 최대 ‘빌리언 모드’가 한계였지만, 이것만으로도 인류의 기존 엔진들의 출력은 아득히 초월할 수 있었다.
테서렉트 아키텍쳐가 자리 잡은 상위 차원에서 억겁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Quasar–I은 인피니티 모드 발동과 휴면상태를 반복하면서 지속적으로 딸과 손녀들을 재생산하였다. 통상 공간이 자리한 하위 차원과는 시간 개념이 달랐기에 시간 자체는 넉넉했다. 일련의 복제 작업이 벌어지는 이 기간에도 우주 표준 시간은 불과 며칠 흐르지 않은 채였다.
이러한 기막힌 작업이 벌어지는 동안, 진은 시뮬레이션 우주상에서 약 한 달간을 머무르며 모니터링을 시행하고 데이터를 기록하였다. 그는 2차 복제형 엔진의 성능을 시뮬레이션 우주의 힘을 빌려 실험해보았다. 거듭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참으로 정신 나간 규모의 물건이로구나.
‘단순히 출력이 높은 게 전부가 아니야.’
엔진 스스로가 자기 힘을 섬세히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현재 이론상 밝혀진 에너지 속성은 전부 구현할 수 있었다. 아니 상위 차원 간섭도 가능하니 그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힘만 강력한 게 아니라 부속 기능마저 압도적인 존재. 가히 황금알을 낳는 만능 거위라 평할 만했다.
게다가 진이 인수한 자료에 드러난 내용은 본래 기능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점은 지금 진이 고평가하는 이 대상이 기껏해야 2차 복제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본에 관하여는 아직 공개되지도 않은 상황. 특징 일부를 반영한 손녀마저 저 정도라면 모체는 얼마나 상식을 깨부수는 물건인지 가늠조차 잡히지 않았다.
에녹이 제안한 셀레스티언 종족 설계 도안만 보았을 때는 갤럭시 클래스라는 프로젝트가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였건만, 한 수 더 비상식적인 저 퀘이사의 도움이라면 의외로 쉽게 해결하고도 남을 듯하다. 최소한 생산력 부분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았다.
“바보 삼촌에 이어 아버지까지도 사람 경악하게 만드는 일에 가세하시는군.”
진은 밀린 업무를 한참 처리하던 중 잠시 휴식하는 셈 치고 다른 상념에 잠겼다. 최근에 강윤혁의 팀원들이 대뜸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과감히 다가왔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일반인치고는 제법 영리한 참모가 합세한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그들에게서 나온 협상안이 전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 세련되어졌다.
“설마 다른 초인이 도와준 건 아닐 테지?”
고민하던 진은 이내 신경을 껐다. 크게 관심 쏟을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은 강윤혁과의 약속을 완주해야만 그의 반지를 획득할 수 있으니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이레귤러에 대한 정보를 다른 초인들에게 철저히 비밀로 하려면 저들과의 협력은 불가피했다. 질투심 많고 경계심 깊은 진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과 권한을 남에게 빼앗기기를 원치 않았다.
“배송 인원을 늘려달라니, 내가 뒷일을 일일이 책임져 주지 않을 것은 각오하고 하는 소리인가? 우습군. 과연 지구에서의 삶을 포기하겠다고 희생을 자처할 이들이 얼마나 되려나?”
때마침 최근 하늘도시 운영 정책은 급격한 변화의 기로에 서기 일보 직전이었다. 조만간 몇 년 안에 본격적인 대규모 전면개방이 예비적으로 시행되고 시민권 적용 범위도 확대될 예정인지라 인류연합도 미리 밑밥을 깔아두는 중이었다. 아마 하늘도시로 진입하는 과정도 전보다는 훨씬 더 간소화되었으리라.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탁해오다니, 혜안인지 요행인지는 몰라도 기독교인들의 부탁은 제법 저들에게 시의적절했다.
“마침 1차 여행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반지의 코드를 미리 여러 개 복제해둔 덕에 여러 명에게 동시에 배포할 수 있겠군.”
진은 윤혁에게서 반지를 빌린 지난 몇 달 동안 저 나름대로 그것의 속성을 연구해보았다. 헬리웃 사건 이후로 카이젤이 윤혁의 반지에 담긴 기능을 대부분 봉인해버렸지만, 그래도 출입 허락권 같은 기본 기능의 소스 코드는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오랜 연구 끝에 이제는 반지 본체 없이도 최소 수천 명의 지구 시민을 하늘도시들로 옮기는 게 가능해졌다.
‘꺼내서 옮겨주는 것은 다른 문제겠지만.’
허나 그 부분까지는 자신이 알 바도 아니고 책임질 일도 아니었다.
“대가는 확실히 받아둬야겠어.”
현재 진은 셀레스티언 종족을 생산하는 프로젝트를 이유로 칼리드와 공동 전선을 구축한 상태였으나 여전히 강윤혁 일행을 돕는 문제에 관해서는 칼리드와 대립하는 구도였다. 이것은 단순히 한 집단을 돕느냐 방해하느냐의 차원이 아닌, 우주 경영 철학의 향방을 결정하려는 철인들 간의 투쟁이었다.
이번 기회에 그와의 승부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더 확실하게 쐐기를 박으려면 의도적으로 강윤혁의 동료들을 돕는 게 합당하다. 그래야 칼리드도 견제할 겸, 우주 속에 새로운 변수를 퍼뜨릴 수 있으니까. 최종적으로는 진이 꿈꾸던 식민지 주민들의 자유로운 사회 참여라는 목적을 이룩하는 동시에 반지까지 획득하게 될 테니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다음 회차에 계속)
이전회
280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6. 인터미션 IV (1) |
다음회
282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6. 인터미션 IV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