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84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7. 히어로즈 IV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2.01 | 회차평점 0 |
Chapter 37. 히어로즈 Ⅳ
장남과 차남이 각자의 싸움터에서 투쟁을 감당하는 동안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윤혁이 1차 여행을 간신히 마치고 돌아와 반년 가까이 재충전과 인격 수양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성한과 유진 부부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식당을 성실하게 운영하였다. 그와 동시에 늘 그랬듯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며 기도 생활에도 정진하였다.
다만, 부부의 삶에 한 가지 소소한 변화와 진척이 생기긴 했다. 잘 알고 지내던 이웃 단골손님이 아닌 낯선 자들이 그들의 보금자리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거의 하루에 한 명꼴로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그들은 말투나 성격에서 고유의 개성이 강하게 묻어 나오는, 다양한 색채의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남녀 할 것 없이 장신에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야말로 강건한 육체의 모범답안들이었다.
이렇게 난데없이 근육질 인간들이 출몰하다 보니 주변에서는 부부네 식당을 향한 엉뚱한 소문도 간간이 돌았다. 사실은 조직 폭력배들의 아지트였느니, 대단한 거물들의 거처라느니, 대개는 이런 류의 엄한 소문. 하지만 소문과는 달리 손님들은 지극히 정상인들이었다. 그들은 부부에게 몹시 호의적이었다. 간혹 거칠고 제멋대로인 성격의 소유자도 드물지 않았지만, 대체로는 개념도 똑바로 박혀있었고 나름 훈훈한 성격의 호인들이었다.
낯선 손님들은 성한과 친해지려고 일부러 심리적인 장벽을 허물고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며 버거워했던 성한도 얼마 안 가 그들을 호의로 받아주었다. 원체 성격도 좋고 외모도 호감형인 성한이였기에 낯선 손님들 모두 금방 경계심을 내려놓고 친해졌다. 더욱이 푸근한 성품의 소유자인 아주머니의 존재도 그들의 분위기를 온유하게 녹여주는 데 한몫했다.
이렇게 교제가 이뤄지다 보니 방문자 중 몇몇은 아예 부부와 긴밀하고 각별한 친분을 형성하는 자리에까지 이끌렸다. 그렇게 친구가 된 이들은 한 번의 방문에서 그치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정해진 시간에 성한 부부를 만나기 위해 꼬박꼬박 식당을 방문했다. 좀 더 가까워진 이는 아예 단골손님처럼 되어서 수시로 성한네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부부와 청년들은 정치, 사회, 종교, 과학, 오락 등 온갖 주제로 대화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러다 보니 요새 심심할 일은 없어서 좋네요.”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유진은 기뻐하였다.
“그러게.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런 복이 굴러왔을까?”
“윤혁이를 멀리 떠나보낸 뒤 우리가 외로워하는 것을 다 아신 주님께서 위로를 주시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허허, 그럴지도 모르겠네.”
단골이 된 손님 모두는 성한뿐 아니라 유진과도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다. 그들은 대부분 부모님이 없거나 부모님의 존재를 잊어버린 고아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쾌활하고 젊은 외양의 아저씨와 한없이 따뜻함과 친절함이 넘치는 부드러운 아주머니의 조합이란 부모에 대한 대리만족감을 제공해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부부는 자신들의 존재가 저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예수님에 의해 준비되고 빚어진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드물게 몇몇은 성한 부부가 믿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하여도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질문하였다. 아무래도 신이라는 개념이 낯선 탓이 컸다. 대체로 그들이 살던 고향 세계들은 종교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거기서 자란 영향인지 그 청년들도 평생 신보다는 자기 실력만 믿고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터에 비록 풍족하진 않아도 신을 섬기며 마음의 참 평화를 누리며 사는 부부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분들이 믿는 신이 정말로 살아계실까?’
그렇게 신앙에 대한 인간 본연의 의문을 토로하는 청년들이 다가오자 성한은 마음속으로 반가워했다. 그는 이 기회의 문에 뛸 듯한 심정이 되었으나 애써 벅찬 감정을 갈무리하였다. 그는 흔쾌히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해주었다. 특별히 기독교적 교리를 변증하려고 애썼던 것도 아니고 일부러 의식적으로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했을 뿐. 그럼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얼마 안 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청년은 주님에 대해 한 귀로 듣고 잊어버렸지만, 일부는 좀 더 말씀을 듣고 이해하기를 갈망하였다. 아직 온전한 믿음의 자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져 가는 진척이 보였다.
특이하게도 그렇게 신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이들은 성한에게 유독 더 진한 유대감과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너무도 친해진 나머지 성한을 아빠 대신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혹자는 반쯤 농담 삼아서 밥 먹으러 올 때마다 ‘아빠!’하고 외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본인들도 그 말이 농담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단연 그중에서 누구보다도 성한 부부를 잘 따르는 사람은 역시나 오랜 인연을 착실히 쌓아나갔던 신해였다. 못 보던 사이에 그의 인생은 놀라우리만큼 궤적이 변해 있었다. 성한과의 신앙 상담을 계기로 마음을 연 그는 회심 이후 인생의 방향을 180도 바꿔 예수 그리스도만을 평생 따르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현재도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몸소 살아내는 중이었다. 그러한 그의 삶의 방식은 곁에 있던 다른 동료 청년들에게도 호기심을 일으켰다. 여러모로 변화된 그는 훌륭한 제자요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었다.
윤혁이 휴양차 지구에 잠시 들렀던 기간에 신해는 친구들과 함께 여러 번 성한의 식당을 방문했다. 고뇌와 우울로 가득한 모습으로 찾아와 통회하며 상담을 요청한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이제 그는 쾌활한 긍정의 에너지로 넘쳐났다. 삶의 의미가 온연히 충족된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에너지가 주변인들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선히 보였다. 자연스레 그는 이전보다 더 친절하고 밝은 태도로 모든 이를 대하였다.
“아저씨, 아주머니, 잘 지내셨어요?”
“반갑다, 신해야.”
“어서 와요.”
이제 사실상 그는 이 집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신해에게서 나타난 긍정적 변화는 사람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커리어와 일터라는 영역에서도 여실 없이 영향을 나타냈다. 냉전 기간 중 급작스레 모집이 개시된 히어로즈, 신해는 그 집단에 이력서를 넣고 히어로로 전직하였다. 그는 냉전 때 혁혁한 전공을 많이 세움으로써 타에 모범이 되었다.
가뜩이나 뛰어난 전투 실력도 나날이 성장 중이었다. 똑같이 전사로서의 삶을 이어 나가되 과거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으니, 그것의 실력이나 전공의 크기가 아닌 인생관의 방향성이었다. 휴먼 솔져였을 당시의 공허함과 각박함을 허물 벗듯 내려놓은 신해는 이제 사람들을 돕는 일 그 자체에서 가치와 보람을 제대로 발견해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히어로 동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전해주었어요. 그 친구들도 대체로 저처럼 식민지에서 태어난 솔져 출신이라서 저랑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거든요. 물론 대부분은 무심하게 굴지만, 간혹 관심 보이는 친구들도 있어요.”
신해의 근황 고백에 부부도 크게 기뻐했다.
“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우리도 정말 기쁘구나.”
최근 신해는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로 성한 부부를 찾아뵈었다. 마침 그 시기에 발맞춰 다른 낯선 손님들도 대거 부부를 방문하는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식당은 크게 붐볐다. 손님들은 찾아올 때마다 두셋씩 모여 사적인 담화를 나누었는데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자연히 엿듣게 된 성한은 그들의 정체를 쉽게 눈치채게 되었다. 신해가 말했던 동료들, 곧 전직 솔져 출신의 현직 히어로들, 이 손님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솔져 출신의 히어로들은 대개 정신적으로 결여된 부분이 있었다. 동족, 고향, 가족 따위를 모두 내다 버리고 무한한 경쟁과 임무의 연쇄를 거쳐 시민권을 획득했었던 역전의 용사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고된 삶의 여정을 감내하며 무뎌져 버린 나머지 냉담하게 만물을 대하는 사람도 많았고 따뜻함을 무서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상처투성이인 영혼들이었다.
유성운이 영웅들에게 이능력과 초월적 육체와 탁월한 무기와 무장들을 공급해주고, 크리슈나 칼라만트라가 특급 훈련으로 정신과 실력을 무장시켜 수많은 지식과 경험과 전투력을 쌓도록 단련시켰다면, 본인은 의식하지 못해도 강성한에게 주어진 역할도 엄연히 있었으니 바로 식어버린 마음들을 돌보아 인류애와 고귀한 마음과 끈끈한 유대감을 회복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 과업은 혹독한 훈련이나 공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의 회복은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법. 다정하면서도 고귀한 인품의 성한은 이런 일에 최적격이었다.
여하튼 성한 부부와 친하게 지내면서 많은 영웅이 다정함과 편안함을 체험하였다. 마치 예전에 신해가 회복되었던 것처럼. 가족의 상실로 인한 공백도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아물어져 갔다. 깊이 묵혀두고 묻어둔 과거의 상처와 쓴 뿌리를 회복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어느덧 성한 부부의 식당은 지친 영웅들에게 아늑한 보금자리의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그곳에서 온갖 편안한 추억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지극히 공적이고 서먹했던 인간관계도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부부와 친해지다 보니 원래는 친하지 않았던 동료들끼리의 신뢰도 돈독해져 갔다.
*
이 모든 긍정적 역사를 모니터링하는 이가 있었으니.
“강성한 씨가 제 역할을 잘 해내 주고 계시군.”
진행하던 연구를 마친 성운은 잠시 쉬어갈 겸 히어로 개개인의 근황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들의 슈트에 부착된 감정 측정 기기들이 보내주는 신호를 종합한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최근의 변화는 대체로 긍정적인 징후를 띠고 있었다. 영웅들의 자존감이 회복되었고 불화와 쓴 뿌리가 줄어들었으며 인간에 대한 불신이 희석되었다. 더욱이 어떤 이들은 고결한 임무, 더 높은 가치, 고차원적 사랑에 관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도 시작하였다. 영웅을 영웅답게 만드는 일이 이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굳이 그 사람을 필요로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공지능 비서가 대뜸 성운에게 질문했다.
“음, 역시 기계는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아둔한 모양이네.”
성한의 성품은 단순히 ‘선하다’라는 표현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에게는 타인의 아픔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고 나아가 타인을 변화시키는 재능이 있었다. 심리상담사나 정신과 의사, 교사 따위에게서 찾아볼 법한 흔하디흔한 재능과는 미묘하게 본질이 다른 능력이었다. 명료한 이성적 설명은 어렵지만, 강윤혁이라는 인간이 보여주는 기묘함도 일정 부분 부모인 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리라. 주목할 가치는 충분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활용할 가치는 있다.’
한편, 성운이 성한을 이용하려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자존심 강한 솔져 출신 영웅들은 평범한 일반인의 간섭을 쉬이 따르지 않으리라. 그들을 다룰 내담자에게는 ‘강제적 권위’ 또한 필수적이었다. 성한은 그 자격 역시도 충족시켰다. 완전한 초인이 아니기에 지나치게 두려움과 반발을 일으키지도 않되 반쪽짜리라 적당한 위엄도 있고 무엇보다 ‘그 인물’의 부친이기에 적당히 존중할만한 인물로는 제격이었다.
크리슈나는 히어로들더러 여러 차례 엄하게 경고하였다. 성한에게 편안히 상담받되 그를 결코 가벼이 대하지 말라고. 실상 만만히 볼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크리슈나는 성한이 대단히 높으신 분의 부친임을 넌지시 암시해줬다. 그 높으신 분이 세계의 제왕이라는 사실까지 아는 이는 드물었으나 어쨌건 히어로들은 긴장감을 갖췄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막연한 부담감을 안고 찾아갔다가 의외로 소박하고 털털한 한 가정의 가장을 발견한 뒤 그 갭에서 오는 느낌을 어색해하는 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대개는 오히려 그러한 점이 성한의 매력으로 작용하였고 적잖은 영웅들과의 관계에서 호감으로 작용하였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성운은 본격적으로 다음 단계를 구상하였다.
“슬슬 2차 선발된 영웅들도 훈련 과정을 거의 다 수료하였군.”
체스판의 다음 말들을 기획할 때가 되었다.
“다음번에 벌어질 냉전 때는 그들까지 실전에 투입할 수 있겠어.”
(다음 회차에서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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