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91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8. 불구덩이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2.14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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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 관측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내린 종합 연산 결과가 심상치 않아. 앞으로 정확히 30초 이내에 솔라 타나토스 경계선 아래 5000km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사건의 지평선에 끝내 갇히고 말 거야. 이 함에는 그 갇힘을 상쇄할 능력이 내장되어 있지 않아.”
케리가 신속히 보고했다.
“캡틴, 어떻게 할 건가?”
무디가 신해에게 의견을 물었다. 신해는 잠깐의 고민 후 답했다.
“근거리 내에 임시 워프 경로를 생성한 뒤 강제로 연다. 경계선 이하 5000km 위치라고 했었나? 29.999초에 해당 지점을 향해서 워프한다.”
함선 인공지능들의 연산력을 빌린 지금, 그의 계산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했다.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 그러나 문제는 안정성에 있었다.
“제정신인가?”
“위험한 짓이야. 워프 장비를 그런 식으로 운용하면 99% 이상 확률로 함 기체가 붕괴한다고!”
메카닉에 대해 박식하고 능통한 동료들은 적극적으로 만류했으나 어차피 신해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나마 이 전략이 성공 가능성이 가장 큰 탈출 방법이니까. 어차피 제 시간 내에 탈출하지 못하면 솔라 타나토스의 먹잇감이 되어 타 죽는 것은 기정사실. 워프로 붕괴하건 항성에 타 죽건 뭐든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부탁할게!”
신해의 결연한 의지에 반신반의하던 두 동료도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위험한 계획이 공지되자 인공지능 몇몇이 반기를 들었지만, 신해는 강제로 그들을 정지시킨 뒤 수동 조종으로 시스템 운영 방식을 대체했다.
“간다.”
“부디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혼연일체가 된 세 조종자의 연합된 조종으로 함이 마침내 최후의 힘을 끌어냈다. 그것은 장애물들을 차례차례 직선으로 관통하면서 목표된 지점을 향해 질주했다. 계산된 지점에 도달하기 직전에 함은 워프를 발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거대한 충격파가 함을 흔들었고 실드의 불안정도가 급증했다.
‘한 번에 완벽히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다!’
‘제발!’
콰과과과광.
솔라 타나토스의 초집적(超集積) 에너지빔이 함을 흔적도 없이 태울듯한 기세로 파도처럼 질주해왔다. 중력파와 시공간 진동, 극렬한 열기와 빔, 물리적 초압력의 파동이 한 점에서 교차했다. 함이 붕괴할 절체절명의 순간, 마침내 공간의 문이 개방되었다. 워프 현상으로 인한 광채가 빛을 흩뿌리며 흑암의 불구덩어리를 두루마리를 찢듯 뒤흔들었다..
*
순간적인 충격파로 의식을 잃은 선원들.
“크윽.”
“헉, 죽는 줄 알았네.”
“어떻게 된 거지?”
다시 깨어난 영웅들은 자신들이 현실 속에 있음을 인지하고는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직전까지 그들의 전신을 사로잡았던 거대한 긴장감의 여파가 아직 뇌리와 뼈에 새겨진 채 생생한 잔상을 일으켰다.
그들은 의아해했다. 도무지 성공할 수 없던 상황이었거늘. 극단적 상황에 몰리자 그들 자신도 모르던 초월적인 잠재력이 발휘되었던 걸까? 하긴 보통 사람도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 맞닥트리면 괴력을 발휘하거늘 산전수전 다 겪은 전쟁 전문가들이라면 이상할 이유도 없겠지. 물론 그것만으로 다 설명될 턱은 없었다. 그러나 찬찬히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어이, 어떻게든 달아난 것은 좋은데 말이야.”
광역 센서를 확인한 케리가 불길한 감에 표정을 굳혔다.
“문제가 다 해결된 것 같진 않은데?”
솔라 타나토스로부터는 어찌어찌해서 탈출했다. 하지만 케리가 지적한 대로 새로운 위험이 목전에 닥쳐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함이 낯선 공간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계기판의 물리학 분석 결과를 보아하니 통상 공간이 아니었다.
“상위차원 같은 건가?”
“아니, 아공간이야.”
아공간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옷 위에 기운 헝겊과 같은 공간. 인간이 흔히 통상의 우주라고 부르는 검은 색 공간이 식탁이라면 그 위에 덮인 아공간은 헝겊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버랩 월드와도 유사한 개념이었다. 차이를 말하자면 오버랩 월드가 자연 상태의 피조계에 존재하는 구조물이라면, 아공간은 인위적으로 통상 공간 곧 우리 우주가 속한 멤브레인 위에 헝겊처럼 덧대어 놓은, 인공 제작된 공간이었다.
“저 멀리서 우주 괴수 여러 마리가 관측돼. 내게 검색이 허락된 데이터베이스들에는 관련 개체에 관하여 변변한 데이터조차 없어.”
케리는 어렴풋이 먼 곳에서 관측되는 괴물들의 준동을 홀로그램 계기판 상에서 발견했다. 괴물들은 아직 명백한 공격 태세는 갖추지 않은 채 그저 배회만 반복하는 중이었다. 자연계의 존재는 분명 아니었다.
“아마도 신규 제작된 이종족들이겠지.”
무디가 허탈해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하필이면 괴물들과 맞상대라니…….”
“그래도 조금 전까지 우리를 집어삼키려던 항성 지옥보단 낫지 않겠나.”
한편 이렇게 둘이 고민하던 중 신해는 조종실로 다시 올라왔다. 그는 헐떡이면서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함과 융합하여 너무나도 많은 양의 연산을 시행한 데다 오른팔의 힘을 과도하게 사용했던 탓이었다. 충분하게 몸을 회복하기 전에는 다시 임무에 투입되기 어려워 보였다.
“괜찮나?”
“……잘 모르겠어.”
“넌 잠시 회복하면서 대기해라.”
무디가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걱정하는 기색은 은은히 드러났다. 그는 로봇들을 시켜 신해의 몸을 회복용 캡슐로 옮겼다. 지친 신해는 저항 한번 없이 얌전히 따랐다. 그는 치료실로 실려 가는 와중에 어렵사리 입술을 들어 마지막 부탁을 전했다.
“무디, 통상 공간으로……, 하늘도시가 있는 곳으로 항로를 재검색해줘.”
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눈은 스르르 감겼다. 무디는 그 말의 의미를 곧장 알아들었다. 단순히 생명을 구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뜻. 영웅으로 헌신하겠노라고 작정한 이상, 맡은 임무는 최후까지 완수하기 전까지는 편히 쉬어서는 안 되리라. 지금 그들에게는 책임져야 할 승객이 셋이나 있었다.
“알겠다.”
그 후 며칠 동안 케리와 무디는 함을 이끌고 미로처럼 얽힌 수많은 아공간의 네트워크를 헤매며 통상 공간으로 나갈 출구를 찾아다녔다.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미로 같은 곳인지라 탈출구를 찾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게다가 한 아공간에서 다른 아공간으로 좌표를 전이할 때마다 물리적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는 통에 우주선의 장갑(裝甲)을 붕괴 현상을 방비하기 적합하게 적응시키는 데만 해도 대단한 골머리를 썩혀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체불명의 이종족, 곧 괴물들의 거듭된 습격이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일행의 우주선을 한입에 삼킬 정도로 무지막지한 크기의 소유자였으며 그에 어울리지 않는 미칠 듯이 현란한 민첩함을 지니고 있어서 맞상대조차 어려웠다.
“망할 초인 녀석들은 왜 저런 괴물들을 만들고 난리야!”
“원래부터 그놈들은 제정신이 아닌 녀석들이었지.”
“그건 그렇고, 왜 괴물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이 안에 인간이 있음을 감지하지 못할 턱은 없을 텐데? 이종족들은 원칙적으로 시민을 해치지 않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던 것 아닌가?”
심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케리의 투덜거림에 무디가 대답했다.
“아마도 우리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납치하려는 의도겠지.”
“납치? 무슨 목적으로?”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보아하니 저 괴물들은 함을 침몰시키려는 게 아니라 멀쩡한 상태로 집어삼켜서 나포하려는 행동 패턴을 보인다.”
“허어.”
배후나 내막이라도 있단 말인가? 의문스러웠다. 이유가 무엇이건 괴물들에게 순순히 잡혀줄 생각은 없었기에 케리와 무디는 맞서 싸웠다. 둘은 환상의 콤비를 이루었다. 생사 혈투를 공유했던 경험 덕인지 전보다 협동력이 현저히 늘었다. 그들은 포격으로 괴물에게 부상 입히거나 마비시키면서 요리조리 그들의 입을 피해 달아났다. 흰고래와 결투하는 고래잡이배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그들은 괴물들의 위협과 낯선 아공간의 두려움과 더불어 힘껏 대결하였다.
그렇게 고된 여정을 끝낸 후, 23일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주선은 통상 공간에 착륙하였다. 신해는 때마침 회복을 마쳤으며 윤혁 일행도 동면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무사히 위기로부터 살아남은 사실을 몹시 감사하며 기쁨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어느덧 케리와 무디도 자신들의 생존과 위기 타파가 초월적이고 신적인 은혜에서 비롯되었음을 어렴풋이나마 믿게 되었다.
한편, 함의 메인 인공지능은 주변을 탐색하여 근처에 있는 하늘도시를 물색했다. 워프 사고만 아니었다면 손쉽게 검색할 수 있었겠건만, 하필이면 뜻하지 않은 난관의 여정을 겪는 바람에 여러 장비가 손상되어 당초 계획보다 탐색이 힘들어졌다. 이틀간의 검색을 거친 뒤에야 우주선은 하늘도시가 자리한 항성계에 발을 디뎠다.
“저곳이군.”
창밖으로 보이는 기괴한 인공천체, 하늘도시 본체를 보며 케리가 중얼거렸다.
“우리의 고향이 떠오르는군. 거긴 요새 하늘도시보다는 낡은 형태겠지만.”
무디는 솔져가 되기 이전의 기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비상경보!}
그때 인공지능이 경보를 울렸다.
{‘봉인의 막’이 감지됩니다! 위험 권역에 들어왔습니다.}
두 영웅의 뇌리에 불길한 직감이 엄습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보고에 따르면 지금 당도한 저 하늘도시를 중심으로 반지름 1.2AU 크기의 권역이 통째로 정체불명의 에너지 필드에 의해 봉인되어 있다고 하였다. 들어올 때는 감지가 불가능하며 안에서만 감지할 수 있고, 일단 들어오면 빠져나올 수 없는 특수한 필드. 필드를 제작한 기술보다 우위의 기술로 파훼하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함에는 그 정도의 능력이 내장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다, 케리.”
“함정? 인류연합 측의?”
“그보다는……, 아마도 말썽부리는 일부 초인이겠지.”
케리와 무디는 함이 거대 규모의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신해와 선교사들에게도 공지했다. 그들은 심려하며 고민했다. 당장은 벗어날 길이 없었기에 진이 구조해주러 오거나 조력자를 파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동안은 별달리 시도해볼 탈출 전략이 없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신해가 윤혁에게 질문했다.
“지금 바로 하늘도시로 들어갈 수 있나요?”
“맨몸으로 가게? 가능이야 하겠지만 나라면 그러지 않겠어. 하늘도시가 어떤 불한당들에게 점령당한 것 같아.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어.”
하늘도시를 둘러싼 권역 전체를 포박한 세력이 하늘도시 내부에는 조작을 가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가까스로 살려낸 선교사들이 허무하게 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영웅으로서는. 그러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앙의 동포로서는 어떨까. 조언과는 별개로 신해는 일행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마음먹었다.
“차선책이 있잖아요.”
“차선책?”
“인형 말이에요. 저와 리온과 루디아, 우리 셋이서 각기 인형 몇 기와 정신을 연결한 뒤 인형들만 하늘도시에 들여보낼게요. 저희 본체는 함에 남고요. 그렇게 하면 만약의 경우에도 형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괜찮겠죠?”
신해는 될 수 있으면 아예 모든 것을 내려놓고 푹 쉴 것을 권고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열정이 얼마나 진정성 넘치고 뜨거운지를 잘 알았기에 군말 없이 허락해주었다. 선교사들은 진이 미리 준비해서 함에 실어놓은 인형 중 각자 다섯 기씩을 본체의 정신과 연결했다. 더 많이 연결하고 싶었으나 윤혁이 아직 인형 조종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다섯이 한계였다.
“무운을 빌게.”
신해가 인형 조종용 캡슐에서 잠드는 세 일행을 응원하였다.
“우린 이 근방 공간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으로부터 함을 지킬게.”
그는 아직 조금 염려를 떨치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믿고 맡길게요.”
함이 하늘도시로의 도킹을 시행하자 셋씩 다섯 묶음으로 총 열다섯 기의 인형이 입구로 사출되었다. 세 선교사의 정신과 그 속에 담긴 영혼의 역동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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