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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92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9. 역병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2.17 | 회차평점 0 0

 

 

 

 

 

 

Chapter 39. 역병

 

 

 

 

 

 

 

 

   선베드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중인 한 남자. 햇볕, 아니 햇볕이라는 용어가 합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늘에서는 따스한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기이한 특이사항이 있다면, 첫째는 태양의 개수가 여럿이라는 점, 둘째는 그 태양들이 인공적으로 제작된 건축물이라는 점이었다.

   남자는 무더운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피부에 내열 기능이라도 탑재한 것처럼. 구릿빛으로 진하게 그을린 그의 갈색 피부는 티 하나 없이 매끈했다. 잘 단련된 근육은 한 마리의 야생 늑대 무리 우두머리를 연상시켰다. 잿빛 머리는 반항적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정교한 이목구비는 화려하고 조화로웠으나 어딘지 모르게 사납고 거칠어 보이는, 반항적인 인상의 미남이었다.

   “심심하군.”

   그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들고 총 쏘는 시늉을 하였다. 곧 천장의 센서들이 그 신호를 인식하더니 하늘의 별자리같이 생긴 방대한 영상 자료를 펼쳤다. 남자는 자신이 착용한 선글라스 형태의 특수 관측장비를 통해 데이터를 읽었다. 겉보기에는 건성건성 읽는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하나 빠짐없이 꼼꼼히 확인하고 점검하고 기억에 담는 중이었다.

   사내가 업무를 보는 동안, 그의 곁으로 수영복 차림의 미녀들이 다가왔다. 일부는 인간, 일부는 휴머노이드 로봇이었다. 그들은 교태를 부리며 훤히 맨살이 드러난 사내의 탄탄한 상체 근육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남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여유로이 탐심의 손길을 다 받아주었다. 방탕해 보이는 행동을 일삼는 와중에도 눈과 집중력은 업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여색은 방해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집중력을 극대화하는 매개체였다.

   “요새 일 벌이기가 너무 쉬운걸.”

   그는 오른쪽에 누운 미녀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어머,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큭, 칼리드 형님, 진 형님, 에르샤 누님이 한꺼번에 암약 중이라서 말이야. 최근 감지되는 행동이 전혀 없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중요한 비밀 업무에 따로 불려갔나 봐.”

   {달링처럼 유능한 인재는 쏙 빼놓고요?}

   “뻔한 것 아니겠어? 아빠가 날 못 믿는 거지 뭐. 난 원래 더러운 일과 사고 치는 것을 전담하는 역할, 곧 인류의 ‘백신’으로 선발되었잖아. 그런 인간에게 중요 미션을 알려줄 리가 없지. 사실 나도 별 관심 없어.”

   백신이라고 하기에는 몹시 어폐가 있긴 하지만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가 여태껏 다양한 사고를 벌여준 덕에 인류연합 시스템은 상상 가능한 모든 위험 시나리오에 대해 철저한 대비책을 갖추게 되었으니까. 작은 위험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큰 위험을 예방할 능력을 얻는 전략이었다.

   {아버님께서도 다 당신을 아끼셔서 그런 거예요.}

   “어! 어! 어라? 너 내 편은 안 들고! 상처인걸. 지금까진 늘 내 비위 맞춰주었잖아. 역시 너도 어쩔 수 없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지배를 받는 미물이구나.”

   {내 맘도 몰라주고, 얄미워요.}

   버젓이 로봇과 앙탈을 나누는 모습은 제삼자가 보기에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헌신짝처럼 내다버린, 구역질나는 작태.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아무런 수치심도 알지 못했다.

   “뭐, 착한 막내아들인 내가 이해해드려야지. 불쌍한 우리 아빠는 화끈한 청춘도 모르잖아? 남녀 간의 격정적 사랑도 못 나누는 몸이니까. 아마 여자 손도 못 잡아보셨겠지.”

   {호호. 노코멘트할게요. 저희로서는 신성모독이니까요.} 

   사내의 입에서는 불량한 언어가 숨 쉬듯 흘러나왔다. 눈빛에서부터 음흉함과 불량함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저절로 넘쳐 흘렀다. 건실함과는 수억 광년쯤 동떨어진 듯한 위인이었다.

   “아무튼 형제들이 자취를 감춰준 지금이야말로 위대한 장난을 벌이기에 최적의 기회지. 아빠가 정해둔 ‘컨스티튜션 셋’에 저촉되진 않는 범위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스릴, 그 스릴이야말로 원나잇만큼이나 자극적이지.”

   “위대하다뇨? 위험한 장난이 아니고요?” 

   한참의 즐거움을 깨트리고 훅 들어온 방해의 음성. 묵직하고 엄격한 여자 목소리가 사내 옆에서 들려왔다. 사내는 힐끗 고개를 돌려서 새로 나타난 음성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단정한 양복 차림을 한 검은 얼굴의 여인이었다. 딱딱한 이미지의 흑인 미녀는 사내를 불편하다는 듯 내다보았다.

   “카델라! 너도 수영장 들어와서 즐기지 그래?”

   “사양하겠습니다. 옷이라도 좀 차려입어 주시죠. 보기 흉합니다.”

   비서는 상관을 향해 냉담하게 직언을 내던졌다.

   “딱딱하게 굴지마. 나 서운하려고 그래.”

   “네, 서운해하십시오. 도대체 당신은 사고를 치지 못해 몸이 근질거리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왜 또 우리노폴리스를 300기씩이나 나포한 겁니까? 위버멘쉬께서 추후 큰 징계를 내리실 가능성이 농후할 텐데요?”

   징책이 쏟아지자 사내는 다시금 불량배다운 미소로 응수했다.

   “내가 사고치고 아빠가 혼내는 패턴이 하루 이틀이야? 걱정할 것 없어.”

   카델라는 해답이 없는 이 사내가 고역인지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거만한 칼리드와 에르샤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 아니겠어. 인공지능 시스템들 따위는 내 장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테고. 더구나 마침 하늘도시들이 개방 모드로 전환되려는 시점이잖아. 이 시점을 노려왔지.”

   그야말로 그가 활보하기에 최적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를 넘으셨습니다, 갈트론님.”

   이에 갈트론이라 불린 선글라스를 벗고 사악함 듬뿍 담긴 눈빛을 내비쳤다.

   “그리고 아빠를 들먹일 것 없어, 카델라. 그분께서도 암묵적으로 허락해준 일이니까. 인간을 과도하게 해치지 않도록 선만 지킨다면 내게도 활동의 자유가 있지. 마치 신과 악마의 관계와 같다고나 할까나.”

   “위버멘쉬께서 신에 비유될지는 모르겠지만, 갈트론님은 확실히 악마 같군요.”

   “큭, 아빠랑 아들을 쌍으로 욕하는 솜씨가 제법 일품인걸.”

   갈트론은 다시 거대한 천장에 새겨진 300개의 영상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자화자찬하자니 우습지만 그가 보기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프로젝트들의 향연이었다. 서로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개성 넘치는 작품들이 즐비해 있다. 갈트론은 이 예술성을 제대로 인정해줄 존재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통탄했다.

   “멋지지? 특히나 저건 맘에 쏙 들어. 저기 보여?”

   “뭘 말씀이죠?”

   “저쪽에 있는 열 개.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봤어.”

   “역사적인 의미요?”

   “카델라, 혹시 지구 역사에 대해서 잘 알아?”

   “왜 물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서에 기록된 만큼은 다 압니다.”

   “킥, 단순하긴. 내가 지구 역사 가운데 ‘어두웠던 시대’를 대표적으로 열 개 정도 선발해서 하늘도시에 한 번 재현해봤어. 똑같이 만들면 창의적이지가 않으니 내 나름의 예술적인 재해석을 곁들였지. 박물관이랄까.”

   갈트론은 개구쟁이처럼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아, 당연히 장차 인류의 건설적인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핵심 테마도 큰 그림 안에서 재설정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것도 다 인류의 공공선을 위해 장기적인 유익란 말이지.”

이런 정신 나간 자 같으니! 카델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 줄은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만 이 정도 일줄이야. 오늘따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표를 쓰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

 

 

 

 

 

   인형 몸에서 깨어나기 직전, 윤혁은 잊고 있었던 오랜 기억과 관련된 꿈을 꿨다. 불꽃이 타오르는 대학교 건물. 엔진 폭주 사고의 기억이 의식의 표면 부까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때도 얼핏 불길한 기분을 느꼈으나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겼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안일한 판단이었다.

   3년 전에는 자그마한 건물에서 작은 폭주가 있었다. 그리고 3년 후인 지금은 규모가 훨씬 더 커져서, 솔라 타나토스라는 괴물이 자신을 집어삼키려고 덤벼들었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넘겨짚을 수 있을까? 고의로 그의 생명을 노리는 악의적인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씩 두려움에 젖어 들었다.

   “윤혁아!” 

   루디아가 부르는 소리에 윤혁의 몸, 아니 인형 몸체가 눈을 떴다. 루디아와 리온은 이미 깨어난 상태였다. 윤혁은 찬찬히 일어나 자기 몸을, 정확히는 잠시 빌린 동조화 인형의 몸체를 살폈다. 단순히 겉모양만 모방한 게 아니라 체감각까지 완벽하게 일체화시킨 상태였다. 완벽히 체화되어 자의식까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스스로의 몸 속에서 거니는 느낌과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

   ‘편리하네. 실전에서 사용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그때 리온이 윤혁의 머리를 짚었다.

   “너 자는 동안 힘들어하더라.”

   그는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요새도 계속 악몽을 꾸는 건 아니지?”

   “음? 어? 아, 아니야, 난 괜찮아.”

   “하긴 무리도 아니지. 여섯이서 우주선 채로 별에 타 죽을 뻔했으니까. 트라우마로 남는 것도 이해해. 히어로 분들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큰일 났겠지.”

   리온의 말을 듣는 순간 윤혁은 번뜩 신해가 떠올랐다. 그렇다. 위기의 시절마다 의외로 구원의 손길은 가까이에 있었다. 대학교 화재 때는 찬영이, 기계들의 공격 때는 신해가, 그리고 이번에는 세 영웅이 함께 힘을 합침으로써 아슬아슬하게나마 윤혁과 그 일행을 건져주었다. 위기는 잊을만하면 다시 찾아오지만, 그 위기에서 건져 줄 구원의 힘도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인가.’

   두려움을 이겨낼 보호와 능력이 자신 곁에서 늘 다양한 모습으로 동행하고 있음을 재확인하자 막막했던 마음이 다시금 가벼워졌다. 그는 굳은 믿음으로 불안감을 다스리며 다시 튼튼한 두 다리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행로를 밟았다.

 

 

   일행은 자신들이 착륙한 세계에 대해 기본적 파악부터 시작했다. 먼저 근방 도시을 순회하였다.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전반적으로 지구권 문명을 연상시키는 배경의 세계이었다. 물론 22세기에 건설된 초고도 문명의 중심지인 지구가 아닌, 21세기 중반 정도 수준의 지구 말이다. 과학기술은 제법 발전했으나 아직 자력으로 우주 시대까지는 열지 못한 레벨, 딱 그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숨어들어 옴싹달싹하지 않기라도 한 것인지 거리가 몹시 황량했다. 간혹 보이는 행인들은 하나같이 방독면과 비슷한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얼굴마다 혈색이 나빴고 숨쉬기도 힘들어했다. 피부에 발진이 나있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주민들은 서로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거기까지만 하면 다행인데 그들의 눈에는 타인을 향한 증오심까지 어려있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다른 사람만 지나가면 의심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달아나기 일쑤였다. 마치 지저분한 오물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외부인의 시선에서 보기에 썩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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