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9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9. 역병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2.19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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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혹시 이 지역에 대규모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다행히 인형 몸체는 생물학적, 화학적 공격에 일절 영향을 받지 않기에 선교사 본인들 걱정은 전혀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고통스러워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그리 마음이 편한 일이 아니었다.
“전염병인가?”
불현 듯 지구의 어떤 특정 시대가 떠올라 불길했다.
“아니, 생물학적 테러(Bioterrorism)라고 불러야 옳으려나?”
그들은 인형의 기동력을 십분활용해 지역과 지역을 빠르게 왕래하며 상황을 살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정체불명의 각양각색 질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의 특성상 강제적인 규제로 인한 교통 두절도 극심했다. 사람의 이동은 물론 짐승, 식물, 심지어 물과 공기의 이동마저 제한하기 위한 용도의 장벽, 방벽, 실드, 배리어가 겹겹으로 싸여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를 분단하고 있었다.
현 지구 문명에 비해서는 원시적인 수준이라지만, 강력한 안드로이드 로봇들도 감시 강화에 동원되었다. 그것들은 방벽을 감시하며 사람들의 교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현지 기술력을 뛰어넘는 인형 몸체에 담긴 탐지 회피과 기동 능력이 아니었으면 일행도 쉽게 지역 경계를 넘나들지 못했을 것이다.
“가능한 잦은 이동은 삼가는 게 좋겠어.”
리온은 최대한 이동 제약이 덜한 도시 위주로만 돌아다니자고 제안했다.
“비록 인형 자체는 감염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역병의 매개체로 쓰이면 안 되니까. 선교도 좋지만 사람들에게 건강상 피해를 입힐 가능성은 최소화해야겠지.”
루디아와 윤혁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래, 어차피 시간은 제한되었으니까 몇 가지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낫겠지.”
이후로도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황폐한 곳뿐이었다. 도시 문명이 발달했음에도 사람 사는 생기와 구수한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정겨운 만남은 없었고 인공지능 로봇들이 그 일을 대신하였다. 물건을 사거나 직장에 나서기 위한 외출조차도 역병의 공포 때문에 꺼려졌다. 그 때문에 오프라인은 죄다 로봇에게, 나머지 업무도 전부 자동화된 시스템에게 맡겨졌다.
상황이 이러하니 전도는 제대로 시도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사람과의 만남 자체가 꺼려지는 세상이니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몹시 아쉬웠으나 고집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리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야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있을테니.
“다행이네. 본체가 아니라 인형을 이용해서.”
리온은 깊이 안도하였다.
“윤혁 네가 올바르게 잘 판단했어.”
“내가 판단한 게 아니야. 신해 형의 경고를 귀담아 들었을 뿐이지. 그 형은 솔져 시절에 우주 곳곳을 누비면서 온갖 위기 상황을 경험했었던 분이니까. 어른들 말은 허투루 흘려보낼 조언이 없잖아.”
“그래, 하지만 겸손하게 그 사실을 인정한 네 덕도 있지.”
패기와 종교적인 의용심만을 내세워 섣불리 움직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뻔 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상황을 섭리로 인도한 분께 감사함이 들었고, 동시에 어느 누구의 조언이라도 겸허한 마음으로 고려해야만 한다는 교훈도 체감했다.
리온과 윤혁은 앞으로의 대응 전략을 상의했다.
“온라인 연결이라도 가능할까? 인형의 인공 뇌도 일종의 컴퓨터잖아. 양자통신 연결도 가능한데 이곳 자체적인 네트워크에도 충분히 접목시킬 수 있을 듯한데?”
이미 지난 여행 때 인형 몸에 충분히 적응해왔던 리온은 인형 뇌의 작동 메커니즘이 신체적으로 체화된 지라 제 몸의 지체를 다루듯 인형 기술이 익숙했다. 다만, 이론적인 공학 지식은 부족했기에 네트워크 접목 같은 분야는 쉬이 확답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는 공학 전공인 윤혁의 자문이 필요했다.
“나도 컴퓨터 전공은 아니라서 확신은 못 해.”
“역시나 어렵겠지? 힘든 부탁이려나?”
“가능성이 없진 않아. 기본적인 건 나도 익혔으니까. 한 번 해킹 시도는 해봐야지. 이곳에 떨어진 주인 없는 전자기기들을 주워 접촉한다면 가능할지도? 인형 상태로 곧장 네트워크에 침투할 수 있을지 확인해볼게.”
인형 자체에 내장된 프로토콜과 프로그램의 잠재력을 끌어낸다면 단서를 얻을 수 있으리라. 그 실낱같을 가능성을 붙잡고 윤혁은 며칠간 네트워크 접속 작업에 돌입하였다. 자신 본체의 정신과 인형 속의 비밀 프로그램을 접촉시켰고 동시에 현지 기술의 산물들과 인형을 연결하였다.
윤혁이 폐허가 된 도시 한가운데서 홀로 앉아 기계와 씨름을 하는 동안, 리온과 루디아는 현지 정보를 좀 더 수집할 목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쪽의 일이건 만만하지 않은 과업이었다.
*
몇몇 도시에서 힘들게 여러 취재자들을 만나 들은 정보의 파편을 조합한 뒤에야 리온과 루디아는 얼추 이곳 세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작은 바다를 둘러싼 세 대륙으로 구성된 이곳 ‘제1구역’은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화려한 문화와 현대 문물을 이룩하여 부족함 없이 살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95년 전부터 발생한 역병의 재앙이 이 땅을 강타하면서 절망이 시작되었다.
역마는 순차적으로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지역 내 사람들 간 교류는 단절되었고 제1구역 전체가 외부 지역과 공간적으로 완전히 차폐되었으며 기술과 경제 발전 또한 중단되었다. 기계 문물은 가까스로 형태를 유지했으나 병을 치료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물론 기술이 발전한 세계이니만큼 의학 역시 존재했다. 위생 관념도 충분히 계몽되어 있었다. 하지만 95년 전부터 시작된 특수 질병들을 상대로는 그런 것들이 전혀 맥을 쓰지 못했다. 감염원의 정체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기에 대응할 약이나 백신을 개발할 수도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들이 심지어 신이 내린 저주가 아니냐고까지 말합니다.”
혹자는 취재 중 이렇게 말했었다.
“지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다소 어리석은 발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구 역사에서도 병의 기전을 잘 모르던 시대에는 병마를 신의 저주라는 개념으로 보았었다. 현미경의 발전과 현대 생물학의 발달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 바이러스, 진균 등의 미생물이 발견되고 그것들이 감염병의 원인임을 깨달으면서 위생과 현대적 치료 개념이 확립되었고 차츰 질병과 신을 연결 짓는 일은 줄어들었다. 이곳 제1구역의 역사도 다르지 않았다. 95년 전까지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자신들이 쌓아온 과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병원체들이 등장하자 다시금 신의 저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오늘날까지 현지인들은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두려움 속에서 왈가왈부하고 있었다.
리온은 이들을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적절한 대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지?’
우선 당장은 신적 개입이란 주제에 대해 의논할 말이 많았다.
‘질병과 하나님의 징벌이라.’
엄밀히 말하면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질병을 징책의 도구로 사용한 예시가 자주 등장한다. 과거만의 일이 아니고 심지어 장차 다가올 종말의 재앙 때도 질병이 심판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무작정 과학과 배치되는 해석을 내린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나 미생물처럼 병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체들도 결국은 신의 피조물. 인류 타락 이전에는 생명을 해하지 않은채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던 미생물들이 인간의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는 타 생물을 죽이는 방식으로 기생하도록 변질했으리라. 신께서는 타락의 여파를 받은 그런 피조물을 때때로 인류의 징계를 위한 수단으로 섭리 가운데 사용하셨다.
‘어떤 현상의 과학적 원리인 2차 원인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과 1차 원인 곧 궁극적인 원인의 존재 여부를 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지.’
어리석게도 인류가 자연 현상의 기전들의 많은 부분을 밝혀내면서부터 많은 이성주의자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신께서 얼마든지 자연법칙을 이차적인 도구로 사용해서 세상의 현상들을 구현해내실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이성적 진보라고 자처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그런 이들의 사상은 자만함의 문제 이전에 논리적 실수였다.
‘질병이 심판의 도구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신학적으로 보건 과학적으로 보건.’
하지만 직접 질병을 겪는 당사자들에게는 뭐라 말을 해야 할까? 질병들이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할까? 덥석 그렇게 전하자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폄훼하는 뉘양스 같아 조심스러웠다. 그렇다고 그분 뜻과 무관하다고 말하자니 하나님이 무력하거나 최소한 세상에 무관심한 존재라는 말처럼 들릴 듯해서 걱정스러웠다.
사실 이런 딜레마는 비단 질병이라는 주제만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세상에 실재하는 모든 비극적인 현상, 곧 고통과 악에 관하여 하나님의 존재성과 책임을 결부시키는 신학적 문제, 곧 ‘악(惡)의 문제’라는 질문은 가장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마저 흡족한 설명을 내어주기 힘들어하는, 성경적 난제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의 난제였다. 리온에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전에 이 지역을 휩쓸었던 질병이 인재(人災)인지 천재(天災)도 불명확했다. 저 질병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혹은 인간이 간접적인 원인 제공을 함으로써 생성된 것들일까? 아니면 문자 그대로 인간의 활동과는 전혀 무관한 절대자의 천벌인가.
만일 정말로 자연재해라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연재해는 과연 악한 것일까? 절대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가 선하거늘, 어찌 자연재해가 존재할까. 그것은 인간의 악에 대한 징벌인가? 그렇다면 우주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한 인간으로 인해 우주 전체가 연대 책임의 형벌을 함께 받는 것은 무엇으로 합당성을 설명한단 말인가? 절대자께서는 인간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지으신 아름다운 질서를 훼손하신 것인가?
고찰의 흐름이 여기까지 도달하니 머리가 복잡했다. 자연계의 파괴적인 속성들의 귀책 사유를 절대자에게 돌릴 수 없다면,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서 직접 기인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리 여기기에는 인간의 능력이 너무도 미약했다. 인간의 영향으로 자연이 훼손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천재지변을 인간계의 활동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오늘날의 인류연합이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규모를 지녔다지만, 이전 시대만 해도 인간은 작은 행성의 표피 하나마저 스크래치를 내지 못할 미약한 벌레와도 같았다.
그나마 내릴 수 있는 절충안으로서의 결론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최초의 불순종이 인류뿐만 아니라 온 자연 질서에 무질서를 가져왔다’라는 가설이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창조하신 뒤 인간을 맨 마지막에 지으시고는 만물을 다스릴 권한, 곧 청지기로서의 권리를 주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명백한 사실. 그런 관점에서 최초 인류의 타락은 자연히 그 책임 아래에 있는 자연계의 훼손으로 귀결될 수 있으리라.
‘어쩌면 열역학 제2 법칙 역시 그 타락의 결과물일지도 모르지.’
자연계의 무질서는 끝없이 늘어나기만 한다는 불변의 진실. 어쩌면 이런 규칙은 처음부터 정해진 룰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하나님께 자유의지를 통해 순종하고 자연계도 인간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순종하는, 선한 사이클만 잘 유지되었더라면 피조 세계도 질서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방종으로 치닫는 무질서의 자유에 침몰되지는 않았으리라.
리온은 신학적으로 더 깊이 숙고해보았다. 혹자는 세계관이 달라 애초에 기본적 전제마저 인정치 않을지 몰라도, 인간이 죄악으로 인해 청지기의 권리를 박탈당한 것은 엄연한 성경적 사실. 다만, 구체적으로 그 박탈이 ‘피조계 전체의 신음’으로 이어진 구체적이 메커니즘에 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타락 이후 우주를 뒤흔들고 오염시킨 직접적인 주체는 누구인가? 인간의 활동인가? 자연계 법칙들의 자체적인 부식인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길인가? 그도 아니면 인간의 청지기 권한을 강탈한 사탄과 그 왕국의 영적 소행인가?
무엇이 답이 되건 당장은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정답을 들려주기란 요원할 것만 같았다. 특별히 청중이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들이라면 더욱더.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과 재해라는 공통된 현실을 앞에 두고서 하나님을 찾는 선택지를 택하기보다는 그분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길을 택했다. 이는 지구에서나 이곳 식민지에서나, 과거나 현재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장차 다가올 시대에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 눈에 선했기에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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