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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94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39. 역병 (3)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2.21 | 회차평점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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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좀 슬슬 감이 오네.”

   나흘째 골머리를 앓아가며 부족한 두뇌로 힘써 고민한 끝에 윤혁은 겨우 인형의 CPU와 이곳 현지 문명이 이용하는 네트워크를 연결할 방도의 실마리를 찾았다. 동료들은 기뻐하며 축하의 반응을 보였다. 윤혁 자신의 입장에서는 썩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찌저찌 해결을 보았다는 생각에 조금은 뿌듯했다.

   ‘그런대로 굼벵이 구르는 재주는 갖추게 된 셈인가.’

   대학 시절 배운 여러 첨단공학 지식, 랩에서 일하던 동료들에게 배운 것, 그리고 1차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독학으로 익힌 테크놀로지, 에드레이에게서 종종 배웠던 과학 관련 요령이 더해진 덕에 턱걸이로 성공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유용한 도움이 된 부분은 제로원에 머물던 시절 형이 가르쳐준 기술들이었다. 당시의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네 수준에서 써먹을 수 있는, 난제를 헤쳐나갈 요령들을 몇 가지 알려주지.”

   그는 손수 윤혁의 개인 연구 프로젝트들을 봐주는 와중에 은근슬쩍 유용한 팁들까지 알려줬었다. 지식 자체가 아닌, 지식을 활용하고 교묘하게 운용하는 지혜를. 그에게서 전수된 가르침이 이런 데서 유용하게 쓰일 줄은 미처 몰랐다.

   ‘형만 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니었네.’

   역으로 윤혁 역시 재혁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아왔음이 이제야 명료하게 드러났다. 지식 측면에 있어서 특별히 그러했지만, 정신적인 성장의 궤적도 그러했다. 공유해온 추억의 시간이 형제 각자의 삶을 상당히 바꾸어놓았다. 형에게는 동생의 흔적이, 반대로 동생에게는 형의 입김이 닿았다. 이를 선한 변화로 보아야 할지 좋지 않은 징조로 보아야 할지 혼동되었다.

   ‘아무튼 슬슬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겠어.’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리온과 루디아도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사람과의 접촉을 기피하고 증오하는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전도는 하지 못했지만, 대신에 여러 가지 정보는 얻어왔다. 둘은 지난 수십 년간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질병들이 얼마나 넓은 영역을 휩쓸며 끈질기게 사람들을 괴롭혀왔는지 알아내었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과 역사 기록으로 추측건대 근 일 년 사이에만 1만 종류가 넘는 질병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 것 같아. 최근에는 그나마 역병이 완화된 편이라고 했으니 과거에는 훨씬 더 심했겠지.”

   윤혁은 그 이야기를 듣고 적잖이 당황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그 정도 규모라면 아예 하늘도시 내 인구 전체가 몰살당할 법한 수준인데? 인류연합이 버젓이 이곳을 감시하는 마당에 그런 질병 하나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부터가 모순적이긴 하다만.”

   이에 루디아는 불편한 진실을 하나 더 알려주었다.

   “그게 말이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하나 있어. 이곳 사람들은 질병으로 인해 끝없이 고통은 받을지언정 죽는 일은 결코 없대. 비록 현지 문명의 의학으로는 해결하지 못하지만 적당히 시간만 지나면 이유를 알 수 없이 질병과 그 후유증이 모두 자연적으로 완치된다고 하더라고.”

   정작 진정 무서운 부분은 이것이었다. 병에 걸려도 죽지 않는다. 병에 걸렸다가 완치되고 다시금 새로운 병에 걸리는, 고통의 윤회 지옥과도 같은 수난이 끝없이 반복된다. 이것이 이 세계의 주민들을 가장 괴롭히는 점이었다.

   “그건 마치 그것과 비슷한…….”

   “그래, 나팔의 재앙이지.”

   리온도 마침 윤혁과 같은 내용을 연상한 모양이었다.

   “계시록의 아홉째 장에 기록된 무저갱의 재앙……, 아폴뤼온(Apollyon)이 이끄는 악마 군단, 황충(locust)들이 다섯 달 내내 인간들을 죽이지는 않고 끝없이 고통만 주는 재앙이었지.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곳과 비슷한 측면이 있어.”

   지금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고통은 정말로 악마가 준 재앙일까 아니면 사실상의 인재(人災)일까? 그도 아니면 어떤 의도적인 음모로 인함일까? 이것이 계시록의 재앙을 직접적으로 성취한 사건은 아니겠지만,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장래에 있을 일들의 향기를 미리 맡게 해줄 모형은 될 듯했다.

   전에는 대체 죽고 싶어도 사람이 마음대로 죽지 못하는 상황이란 게 어떤 것인지 리온도, 윤혁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릇된 일이긴 해도 원하면 자살 정도는 할 수 있는 게 인간 아니던가. 하지만 이제 발전된 과학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었다.

   “내가 추측하는 바로는 역시 정황상…….”

   고민 끝에 윤혁이 개인적으로 도달한 결론을 밝혔다.

   “저 위에서 이곳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세력이 벌인 장난이라고 생각해.”

   그러자 리온이 심히 불쾌해하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아무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그자들이 설마 이런 일까지?”

   그로서는 사람들이 그 정도까지 선을 넘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 머리로는 와닿아도 아직 가슴으로는 깊게 와닿지 않았다. 심증이야 있으나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윤혁이 그렇게 추측하는 데는 몇 가지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첫째 근거는 이거야.”

    만일 인류연합조차 감당치 못할 생물학적 테러 혹은 역병이 발병한 것이라면 그들은 감염 확산의 두려움 때문이라도 그 하늘도시를 폐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유지해 두었다는 건, 인류연합에게는 충분히 이 질병을 통제하고 치유할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일부러 제1구역을 철저하게 공간봉인 비슷한 류의 기술로 외부와 차단했다는 건 그 바깥의 지역에는 아직 질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통제 불가의 재난이 구역 너머로 확산되었더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으리라. 방벽을 누가 미리 알고 설치해둔 것일까? 과도한 추측일지도 모르나 어쩌면 제1구역은 처음부터 질병을 실험하기 위한 용도의 실험장으로 선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셋째, 치료제로 예측되는 무언가가 실존할 가능성. 정체불명의 병원체들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완벽히 완치된다는 건 자연상태의 인간 면역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위적으로 치료를 집행하는 무언가가 이미 광범위하게, 어쩌면 모든 주민들의 몸에 심겨져 있을 확률이 크다.

   ‘이를테면 피코머신처럼.’

   이미 인류는 불로불사와 회춘마저 가능케 할 피코머신이라는 기술을 오래전에 얻었다. 아직 드러내놓고 상용화시키지만 않았을 뿐. 짐작컨대 피코머신의 용도는 어쩌면 노화를 극복하는 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미래에 등장할 가능성을 지닌 이론상의 모든 생물학적 위협을 미리부터 모두 예측한 뒤 사전에 박멸하는 것도 발명 목표 가운데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제1구역 전체가 신종 질병을 실험하고 치료하는, 일종의 초거대 규모 임상시험 현장일 수도 있다고 봐.”

   윤혁이 도달한 추측성 결론에 리온과 루디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인류가 같은 인간에게 그런 흉악한 짓을 벌인단 말인가. 이미 현존하는 모든 병을 치료할만한 기술을 보유했으면서, 아직 등장하지도 않은 미래의 질병을 일부러 실험 삼아 만들고 그것을 정복하는 행위를 거듭하다니? 그것은 뒤틀린 인류애조차도 아닌 탐욕이 분명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루디아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상한 일은 아냐. 지구는 이미 한 번 혼돈의 시대 때 대규모 생물학적 테러로 고초를 겪은 역사가 있어. 아마 그래서 노이로제에 가까운 염려가 생겨났겠지.”

   윤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을 이었다.

   “현재 자연계에 관측되는 질병만 막아서는 안 된다. 물리적으로 존재 가능한 가상의 병원체 분자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물색해서 죄다 정복해야 한다……, 뭐 이런 생각이었겠지.”

   한 번의 저주받은 시대를 통해 크게 데이고 상처를 겪었기에, 그에 대한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근원적으로 극복하고자 했으리라. 그래서 현존하는 적뿐 아니라 미래에 등장할 적까지 죄다 찾아서 대비하려는 것이겠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질병을 도구 삼아 인간을 징계하시는 것이 두려웠겠지. 끝내 인간들은 지긋지긋한 그분의 징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려는 갈망을 실천에 옮기기에 이른거야. 더 이상 초자연의 힘이 인간에게 간섭하지 못함으로써 인간들이 제멋대로 살아도 될 시대의 개막을 추구한 거지.”

   드디어 인류연합의 심리적 뒤틀림의 배후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게 된 윤혁. 이는 카이젤의 심리를 이해하게 된 덕분이었다. 그가 일하는 방식은 시종일관 한 가지 사상을 기반으로 했었다. 초자연을 인간의 지혜로 완벽히 극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인간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쟁취하는 것.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명목 아래에 인간 스스로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양새가 펼쳐졌지만 말이다.

   “강재혁 대표님이 그런 끔찍한 짓까지 벌이셨을까?”

   리온이 이를 악물며 심각히 묻자 윤혁은 고개를 저었다.

   “사상적 공통분모가 없진 않겠지만……, 이 방식은 형의 방식이 아니야.”

   그는 친구들에게 한 위험인물의 존재를 넌지시 전해주었다. 진이 알려준 사람,소위 ‘막내 철인왕’이라는 자에 관하여. 식민지 인간들을 대상으로 숱하게 위험한 짓들을 벌여온 인류연합의 ‘자칭 필요악’, 마치 광기라는 개념이 사람으로 화한 듯한 자, 정체불명의 위험한 위인.

   “지난번에 카뮈네라에서 나와 스테판 씨가 카뮈네라에서 보았던 무덤 속의 네필림과 실험체들, 그리고 알즈바툴 대륙에서 본 온갖 기괴한 성(性)들을 지닌 사람들, 그것들 모두 비인도적인 실험의 결과물인데 하나같이 그자의 손을 거친 작품이라고 들었어.”

   믿기 힘든 참담한 소식에 루디아는 자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리온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격렬한 의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그 광인. 얼굴도 모르는 그 악인의 행태를 떠올리자니 분이 치밀어올랐다. 더욱이 그를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이용하는 재혁에게도 조금씩 분노가 치밀었다.

   ‘이게 당신이 주님을 조롱하는 방식입니까?’

   분노의 화살이 재혁을 향하는 와중에도 리온은 냉철하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재혁은 분명히 저 나름대로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사탄을 잠시나마 내버려 두고 자유로운 활보를 허락하셨던 것처럼, 재혁도 자신의 악랄한 부하를 일부러 버려둔 뒤 그 부하가 남기는 결과물을 취해 공공선을 위해 역이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일 “왜 악한 부하를 제어하지 않느냐?”고 무턱대고 재혁을 징책 한다면 자칫하면 리온은 논리적 딜레마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하나님께 침을 뱉는 꼴이 될 위험성이 컸다. “왜 신께서는 사탄과 악을 진작에 없애지 않았습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오래전부터 무신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비꼴 때 즐겨 사용하던 단골 질문이 아니었던가.

   ‘대표님도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비판하고 있군.’

   차이가 있다면 입만 살아 떠벌리는 보통의 무신론자들과 달리 치밀한 두뇌를 지닌 천재 중의 천재, 강재혁은 자신이 직접 교묘하게 신의 방식을 모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신을 비판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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