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29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40. 기계들의 통치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2.26 | 회차평점 0 |
Chapter 40. 기계들의 통치
외부인들에게 드러나지 않은 사정, 부패의 온상에 대한 진실은 이러하였다.
제1구역은 소속 하늘도시 전체가 어떤 의문의 외부 세력에게 점령당한 이래로, 줄곧 외부 세력 소속 인공지능 서버에 의해 관리당하고 있었다.
물론 기존의 운영 체계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 체계의 통치도 여전히 유효했다. 하늘도시는 여전히 궁극적으로 지구의 왕 발밑에 복속되어 있었고 그곳 주민의 생명 여탈의 제약, 사상의 제약, 거주지의 제약, 그리고 시뮬레이션 우주와 타임필드에 속박되게끔 하는 제약도 변함없이 적용되었다.
다만, 신규 점령 세력의 영향력은 주민들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신규 영향력은 기존에 깔려있던 하늘도시의 시스템을 교묘하게 활용하고 비틀어 주민들에게 몇 가지 불편한 제약을 추가로 심어 넣었다.
불행히도 제1구역은 인류에게 닥칠 가능성이 있는 가상의 ‘바이오 테러리즘’에 대한 영구적인 대비책을 세우기 위한, 일종의 실험장으로써 신규 세력의 선택을 받았다. 점령 세력이 파견한 인공지능은 주인의 대행자 노릇을 하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대대적인 작업을 은밀히 벌였다.
먼저 그것은 시뮬레이션 우주와 가상 현실 프로그램상에서만 존재하던 온갖 가상의 바이오 테러를 현실화하여 끌어왔다. 이론상 물리적 분자 배열로써 허용되는 모든 종류의 악한 유기체들이 방출되었다. 세균, 바이러스, 프리온, 진균과 같은 기존에 존재하던 자연물은 그 무리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가상 생명체란 가상 생명체는 죄다 살포되었는데 심지어 이 중에는 유사 유기체, 무기체 기반 유사 생물, 유사 나노머신은 물론이고 상위 차원 물질계에 뿌리를 둔 나노 병기들도 있었다.
기존에 하늘도시를 관리하던 지역 시스템 인공지능은 점령 세력의 인공지능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안을 세웠다. 제1구역에 살포된 바이오 테러들이 바깥으로 퍼지지 않도록 공간을 차폐하자. 그래서 나머지 구역들만이라도 최소한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자.
아울러 제1구역 주민들에게는 치료 겸 수습 겸 실험 진행의 차원에서 일정 주기로 궁극의 자율 진화형 피코머신을 주입하기로 했다. 그래야 그들을 죽지 않게 하여 왕의 규율을 어기지 않을 수 있으며 동시에 장기적으로 유익한 실험 데이터를 오랫동안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러한 야합도 완벽히 손발이 맞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시뮬레이션 우주에서 실험해도 될 임상시험을 굳이 현실의 차원으로 끌고 와서 벌이는 겁니까.}
기존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점령자 인공지능에 한 차례 더 반문하자.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비록 시뮬레이션 우주가 현실과 99.9999% 이상의 싱크로율을 자아낼 잠재력을 지녔다지만 그 한없이 작은 오차로 인해 현실 대응에 실패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발생합니다.}
{그 부분은 저 역시 압니다만.}
{제게 지시를 내리신 분께서는 최소한 의학 임상시험만큼은 현실에서의 검증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생각하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범위를 정해야 하죠. 그 울타리 안에서 약간의 고통을 허락하더라도 종국에 온 인류가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생각하면 그편이 낫습니다.}
그러자 다시 기존 시스템 인공지능이 물었다.
{파생될 잠정적인 위험성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냉철하게 평가지를 들이밀었다.
{피코머신의 빠른 대처력과 진화 능력으로 획득될 ‘인류의 의학적 역량 향상’, 이것은 이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이나마 제1구역을 오염시킴으로써 나타날 위험성, 이는 손해입니다. 둘을 종합해서 합산했을 때 인류 공공선 향상에 확실한 도움이 된다고 여깁니까? 제 연산력만으로는 확답을 내리기 어렵군요.}
곧 점령자가 파견한 그 낯선 인공지능이 답했다.
{그렇게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미래예측시스템에 자문한 결과, 당신이 신뢰할만한 예측 데이터를 얻어내었습니다. 이 데이터를 보고 판단해주시죠.}
이에 즉각 판단 작업이 개시되었다.
{음, 확실히 이 정도의 증거 수준(Evidence level)이면 신뢰할만하군요.}
인공지능 주제에 인간의 운명에 대해 제멋대로 논의하며 주요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렇다고 인류 자체가 자율권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으니, 이들 두 인공지능을 포함한 우주상에 존재하는 인공지능과 기계는 모두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절대적 중추의 지배를 받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어느 한 사람’의 정신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니 여전히 기계는 인간의 발밑에 있는 셈이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진화 속도는 기계 전체의 합의 진화 속도보다 압도적이므로 앞으로도 이 우열 관계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우위 상태는 거시적인 시점 곧 인류라는 종족 전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고 평범한 개개 인간의 자유와 권리는 점차 인공지능을 위시한 시스템들의 주권 아래에 복속될 위기에 노출된 상태였다. 식민지에서는 이미 이런 현상이 만연했고 지구에서도 가까운 미래에 동일한 흐름이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
윤혁은 무거운 불쾌감을 게워내며 가까스로 잠에서 깼다.
“요새 유독 예전 일을 꿈에서 자주 보네.”
새로운 인형 세트와 연결되기 직전, 윤혁은 잠시 수면에 가까운 무의식 전이 상태를 체험했는데 그때 그의 뇌리에 희미한 꿈이 하나 스쳤다. 새 몸에서 깨어난 즉시 그는 눈을 비비며 직전에 체험한 꿈의 내용을 더듬어보았다. 조각조각 쪼개져 퍼즐처럼 섞인 탓에 선명하게 내용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강은 감이 잡힐 듯도 했다. 분명 예전 기억과 관련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 경찰 로봇에게 공격당했던 일.’
원인 모를 기계들의 습격을 여러 번 반복적으로 당했던 시절. 지금 와서 보면 작은 시련이었지만 그때는 힘들었었지. 언젠가 진이 그 현상에 대해서 언뜻 해명했었던 것도 같은데 워낙 급하게 들어서인지 이해는 하지 못했었다. 에드레이 어르신도 기계들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고 말씀은 해주셨으나 원체 윤혁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전문적인 내용인지라 올바르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헤러틱 이벤트……, 라고 했던가?’
사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는 마당에 괜한 고민으로 골머리를 썩히고 싶진 않았다. 여하튼 이제 인공지능들에 공격당하는 일은 사절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존재들에게 시달리는 고생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너 예전에 기계에게 공격받은 적이 있어?”
리온이 독심술이라도 쓴 듯 질문하자 윤혁은 속으로 놀랐다.
“어, 어? 그, 그게……, 그건 어떻게 알았어?”
“미안해. 우리가 조금 전에 새로운 인형 세트에 연결되는 순간, 네 기억의 파편이 일부분 내게도 흘러들어왔거든. 아무래도 한 세트 내에서는 인형들의 CPU가 얽혀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럼 그렇다고 말해줘야지. 깜짝 놀랐잖아. 무서운 우리 형도 나한테는 독심술을 함부로 안 쓴다고. 뭐, 네 잘못은 아니지만, 자라 보고 놀라다 보면 솥뚜껑 보고도 쉽게 놀란단 말이지.”
윤혁의 항변에 리온은 미안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강재혁 대표님이 동생은 애지중지 아낀다는 말이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나를 마주했을 때는 가차 없이 마인드리딩을 시전하던데.”
“어휴, 그 인간은 왜 낯 뜨겁게 그런 이야기를 다 했대!”
장난스럽게 떠드는 와중에 루디아가 두 사람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저쪽을 주목해봐.”
루디아가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셔틀 비행선처럼 보이는 비행체들이 수백 기 이상이 무리 지어 하늘을 횡단하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현 지구보다는 상당히 뒤처진 수준이어도 제법 발달한 기계문명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로봇들도 비행선과 동행하고 있었다. 마치 엄호 작전을 수행하는 듯.
“저 방향은 사람들 거주하는 지역인데 저것들이 대체 왜?”
“확실히 정상적이지는 않아 보이네.”
윤혁과 리온과 루디아는 황급히 비행선들을 뒤쫓아서 마을로 향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소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로봇들이 인간 주민들을 관리 감독하며 노예처럼 대하는 게 아닌가. 마치 근대 이전의 승전국이 패전국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거나 학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로봇들은 지구의 로봇들과는 디자인이 사뭇 달랐다. 하드웨어 몸체의 정교함은 기껏해야 21세기 중반 정도 수준이었고 실질적 성능은 비교할 수 없이 뒤떨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무력으로 제어하기에는 충분했다.
그곳 사람들은 물건을 구매하거나 상업 활동을 하거나 공공시설을 누리거나 심지어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할 때도 로봇의 감시를 받았다. 로봇들은 사람들의 신체를 수색하기도 했으며 붙잡아서 어딘가로 연행하기도 했으며 종종 폭력을 행사하여서 제압하기도 하였다.
그 지역을 감시하는 주체는 인간 형태의 안드로이드 로봇들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기계문명이 잘 발달한 도시답게 가옥과 건물, 공원과 도로 곳곳에 기계 장치들이 부착되어있었다. 감시 카메라 형태의 로봇, 기다란 팔 형태의 로봇, 촉수가 뻗어 나오는 해파리 형태의 로봇, 건물과 물아일체로 융화된 로봇 등 갖가지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지구에서 본 것만큼의 다양성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도처에 유비쿼터스 체계를 조성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기에는 넉넉했다.
“기계들이 인간 세상을 점령하기라도 한 걸까?”
기괴하고 비정상적인 모습에 루디아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저건……, 인류연합 측의 군대일까?”
리온도 당황한 나머지 이성적 추측에 실패하여 윤혁에게 질문했다.
“아닐걸. 저런 비효율적이고 원시적인 모델을 사용할 리가 없잖아.”
“그럼 대체 누가?”
“모르지. 혹시 이 지역 사람들이 제 손으로 만들어낸 기계가 아닐까?”
윤혁의 말에 셋은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 말인즉…….”
“만일 방금 네 추측이 옳다면…….”
“기계들의 반란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추측이라고는 했어도 윤혁은 이미 이 가설을 속으로 확신했다. 전에 호되게 당해본 이후 기계에 대한 노이로제와 불안감을 극복하고자 21세기 후반 지구에 벌어졌던 기계들의 반란 및 유사 사건들에 관하여 샅샅이 조사해본 그였기에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 구역에서 벌어지는 작태는 예전 지구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기계들의 국소 도시 점령 사건의 기록과 흡사했다.
‘역시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야.’
무언가 보이지 않는 권세가 파묻힌 역사의 그림을 재현하고 있는 듯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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