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02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42. 전쟁 시대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3.11 | 회차평점 0 |
Chapter 42. 전쟁 시대
이것은 윤혁이 여덟 살이던 무렵의 기억이다.
당시 자상한 아버지의 표상이었던 성한은 하나뿐인 어린 아들을 애지중지 귀여워했다. 윤혁도 슈퍼맨처럼 듬직한 아빠를 동경했다. 아이는 아빠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따라다녔다. 주변 이웃들은 이 부자(父子)의 훈훈한 모습을 볼 때마다 저절로 미소짓곤 했다.
성한은 종종 아들과 함께 동네 목욕탕을 찾아가 아들이 목욕하는 것을 도와주곤 했었다. 물놀이를 좋아했던 윤혁은 아빠와 같이 몸을 씻으러 갈 때마다 즐거움에 콧노래를 불렀다. 그 자체만으로도 정겨운 경험이기도 했지만, 또 무쇠같이 탄탄한 아빠의 건실한 신체를 보노라면 언제든 자신을 안전히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목욕탕에서 아빠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다가 무심코 풀리지 않는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을 느꼈다. 당시 아직 철없던 윤혁은 아버지가 곤란해할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섣불리 질문을 던졌다.
“아빠, 아빠~.”
“응. 왜 그러니, 윤혁아?”
“왜 엉덩이에 검은 자국이 남아있어요?”
순진한 아이의 입을 거쳐 자국이라는 완곡한 단어로 표현되긴 했으나 실상 그 정체는 흉터. 순간 성한의 표정은 우울감에 짓눌린 듯 침울해졌다. 착한 아들은 혹시라도 자기가 못된 말을 해서 아빠가 화난 것인가 걱정되었다. 울상 짓는 아들을 달래주기 위해 성한은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음, 그건 이야기하면 좀 길단다.”
“무서운 이야기에요?”
“아냐, 그게 아니라……, 예전에 아빠가 크게 다쳤던 적이 있거든.”
아빠가 다쳤다는 이야기에 순진무구한 아이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모습에 슬픔도 조금 밀려왔으나 아이의 마음이 몹시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한은 아들의 귀여움을 이기지 못한 채 아이를 품에 살포시 안고 토닥거려 주었다.
“아빠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해줘도 될까?”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아빠랑 윤혁이랑 남자 대 남자로 약속했었지. 아빠도 약속 지킬게. 대신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지도 모르니 용서하려무나.”
“실망하지 않을게요.”
성한은 조심스레 자신의 옛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아빠는 옛날에 몹시 나쁜 짓을 해서 큰 벌을 받은 적이 있었어. 지금이야 벌을 다 받고 반성했지만, 예전에는 정말 몹쓸 사람이었지.”
그는 아이들 수준의 정서와 이해력 내에서 적당히 납득되도록 벌로 자신이 곤장을 받았다는 식으로 무마해서 설명했다. 어린 아들이 너무 겁을 집어먹지 않도록. 그러나 만일 그가 당시의 처절한 현장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묘사하거나 기록 영상으로 보여주었다면 어린아이는 결코 끝까지 관람하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끔찍하고 잔인했으니까.’
혼돈의 시대는 형법 적용이 무자비하기로 유명했다. 세계적으로 기본 치안이 붕괴되어 질서가 무너지는 바람에 고육책으로 각국 당국마다 각종 비인도적이고 인권 감수성 낮은 형벌이 대거 도입되고 승인되었던 시절이었다.
태형(笞刑) 제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큰 정치 범죄에 얽혔던 중범죄자였던 성한은 고된 수감 생활을 겪어야 했고 수차례의 태형도 받았다. 그 무서운 형벌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바람에 하마터면 죽을뻔했던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룸메이트였던 어느 불한당의 자비와 성한 본인의 초인 육체에 담긴 빼어난 재생력이 아니었으면 분명 지금의 아들을 얻지도 못한 채 시신이 되었으리라.
부상만이 괴로움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죄수들과 교도관들이 전부 다 구경하는 앞에서 완전한 나신이 된 채 맞아야 했다. 그 수치심은 상당했다. 내장의 보호조차 제대로 장치되지 않은 탓에 낭심에 정면으로 충격파가 가해져 혼절하기까지 한 일도 수십 번이었다. 이로써 축적된 정신적, 신체적 충격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성한은 사내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이후에 출소하여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지난 날의 죄를 회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그녀와 진지한 만남을 시작하였지만, 연애하던 시절 내내 자신이 불능이라는 사실의 무게감으로 인해 성한은 괴로워해야 했다. 그런 결점마저 품어준 유진이 그를 남편으로 맞아주었다. 이후 기적에 가까운 은혜로운 회복을 잠시 입게 되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 지금의 아들을 얻게 되었다.
“이상해요. 왜 아빠 같은 착한 사람이 그런 벌을 받아야 했나요?”
여전히 윤혁은 예전의 아버지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음, 우리 윤혁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세상이 몹시 시끄러웠단다.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속이고 죽이는 일은 일상사였어. 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나라마다 서로를 너무도 미워한 나머지 상대국을 속임수로 무너뜨리려 애를 썼단다.”
성한은 직접적인 폭력에 가담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외국에서 온 초인인 라일라가 소소히 계획한 한국을 해부하려는 플랜에 간접적으로 동참한 공범. 국가 반역죄 명목이 씌워지기에는 충분했다. 정작 원흉인 라일라는 성한의 이용 가치를 진액까지 모두 취한 뒤로는 그를 헌신짝처럼 내다 버렸고 그와 그의 나라에서 관심을 껐지만.
“지금의 세상이랑은 많이 달랐네요?”
“음, 지금은 세계의 질서를 통제하는 강력한 정부가 존재해서 그래.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자체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우린 누구나 마음속에 커다란 죄의 본성을 품고 있단다. 착해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조금만 환경이 나빠지면 언제든 악해지게 될 수 있지.”
심지어 살육도 서슴지 않고 범할 수 있을만큼.
“서로 죽고 죽이는 건……, 너무 무서워요.”
울쌍이는 아이. 다시 한번 아버지가 소년을 토닥여주었다.
“그래,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만이 유일한 필요라는 증거란다.”
*
꿈에서 아빠와의 추억을 회상한 윤혁은 깊은 그리움에 쓰라려왔다.
‘지금쯤 잘 지내고 계시겠지.’
그는 형에게서 들은 아버지 집의 근황을 떠올렸다. 히어로즈니 뭐니 하는 조직과 얽혔다는 점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다. 히어로들은 신수와 같은 이종족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 전문이라던데 혹시라도 성한이 히어로들과 친하게 지내다가 자칫 위험에 휘말리지는 않겠지.
‘형이나 유성운 회장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뒀어야 할 텐데.’
하지만 고민해도 달라지는 일은 없었기에 윤혁은 걱정을 훌훌 털어버렸다.
‘일단 이곳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순위.’
네 번째로 인형 몸체가 깨어난 이곳 제4구역 역시 근현대 시절의 지구와 배경상의 차이는 크지 않아 보였다. 제4구역에는 일전에 본 역병도, 생체병기도, 반란을 일으키는 기계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환난도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곳인 것 같았다.
“이곳은 별 문제 없이 괜찮아보이는데?”
사방을 순회한 후 윤혁이 조심스럽게 평가했다.
“그래도 경계는 늦추지 마. 이전 일들을 생각해봐. 갑자기 뭐가 튀어나올지 누가 장담하겠어.”
리온은 오히려 더욱 촉각을 곤두세웠다. 평안하다고 여겨질 때, 방심하기 쉬울 때가 도리어 가장 위험한 법이니까. 이 하늘도시를 집어삼킨 정체불명의 점령자는 이미 비인도적인 실험을 세 번이나 선보였다. 다른 음모의 잔흔이 남지 않았으리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리고 과연 리온의 예상은 적중했다.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의 커다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4구역의 사람들은 복음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그러한 배척 자체가 기이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유독 석연치 않은 면이 한 가지 있었다. 제4구역 주민들은 사랑, 자비, 용서라는 단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다.
“증오에 취한 것 같아.”
루디아의 감상평대로 이곳 사람들은 서로를, 인간을 맹렬하게 미워했다. 적극적으로 분개를 드러내기도 했고 소극적으로 혐오감을 나타내기도 하는 등 정도의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이유나 구색은 없었다. 제1구역처럼 역병에 감염될까 봐 무서워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타인을 싫어하는 식이었으니 흡사 증오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악마들이 이들의 증오심을 부추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차츰 네트워크 접속을 통해 현지 자료를 모으면서 일행은 이 혐오의 문화가 그리 단순한 역학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제4구역에 들끓는 증오의 불길을 지피고 있는 원동력은 악한 영들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혐오 심리를 부추기는 정체불명의 메시지가 가득해.”
윤혁의 인형이 해킹해서 추출해낸 네트워크 데이터에 단서가 있었다. 그 증거 자료에서 주민 개개인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고 충동하는 ‘증오의 부추김’을 머금은 메시지가 가득 발견되었다. 발신지는 불명이었다. 하지만 전자 체계에 직접 간섭한 패턴을 보아 사람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악한 영들도 여기에 한몫했겠지만 그들은 직접적인 물리적 간섭이 어려우니 사람을 도구로 활용했을 것이다. 그 도구가 증오를 부추기는 근원지이리라.
“이번에도 그 점령자……, 혹은 그 일행이겠지?”
“의심의 여지가 없네.”
놀랍게도 미지의 그 범인은 이곳 제4구역에 거하는 수많은 주민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접근해온 듯 했다. 그는 각 사람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듣기 좋아하는 말만 은밀히 골라서 들려주어 상대를 조종하고 가스라이팅하는 전법을 즐겼다. 그 의문의 범인이 주민들과 의사소통한 기록을 확인해보니 하나 예외 없이 심리를 교묘하게 충동하는 대화 방식이 나타났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과 정보력이 대단히 탁월하지 않은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기간에 한 사람이 일일이 수천만 명과 대화하는 게 가능하다고?”
리온으로서는 이 부분이 꽤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최상위 초인이라면 능히 가능해.”
진 같은 괴물을 겪어보았던 윤혁이 해명해주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자신의 세포처럼 부릴 수 있는 인공지능 수하들이 무수히 많으니까 그것들의 도움을 십분 활용할 수도 있었겠지.”
실제로 윤혁은 형이 인간이 물리적으로 감당치 못할 여러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동시 시행하는 광경을 제로원에서 몇 번 목격한 바 있었다. 다른 초인들은 카이젤보다야 훨씬 못하겠지. 하지만 지금 이 범인이 벌인 정도의 마인드 트릭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멀티태스킹을 시행할 만큼 뛰어난 초지능을 보유했거나, 아니면 인간의 심리를 자율적으로 파악하여 조종하는 인공지능 체계를 설계했거나. 두 경우 모두 소름 끼치는 일임은 분명했다.
선교팀은 탈취한 메시지 증거물들을 종합 정리하면서 한 가지 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정체불명의 그 메시지들은 단순히 개개인간의 혐오만 조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개인을 넘어 특정 집단을 증오하도록 유도했다. 나아가 여럿의 증오를 한데 모아 군중심리를 유도하기도 했다.
혼자서만 남을 미워할 때는 자신에게도 상처가 돌아오기에 섣불리 미움을 터뜨리기 어렵지만, 여러 명이 같은 대상을 증오한다면 이러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법. 그렇기에 군중심리로 발전한 증오는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동으로 발산하기 쉽기 마련이다.
“대단히 똑똑한 녀석이야.”
“혹은 녀석들이거나.”
그때 잠잠히 듣기만 하던 루디아가 두 친구에게 질문했다.
“그보다는 왜 그쪽에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윤혁과 리온은 그 질문에 잠시 멍해졌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명색이 인류를 수호한다던 인류연합 세력, 혹은 그 일부일텐데. 하늘도시 주민들 사이에서 분열이 발생하면 치안도 불안정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혼란을 수습하느라 비용만 소모되지 않을까.
‘가면 갈수록 이해 불가인 사건 투성이네.’
윤혁과 친구들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두고 근심하였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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