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03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42. 전쟁 시대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3.13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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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전도를 위해 돌아다니며 여러 주민을 관찰한 뒤에야 의문의 해답을 줄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과연 정체불명의 점령자가 여러 수단으로 제4구역 주민들의 군중심리와 혐오 심리를 교묘히 부추기는 데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전까지 일련의 추리들이 필요했다.
의문점의 시작은 다음과 같았다. 기이하게도 이곳 사람들 사이에 뿌려진 증오의 씨앗은 이미 싹을 틔우고 풍성히 자라나 열매까지 맺고 있었지만, 정작 가시적 전쟁이나 무력 분쟁은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아니 사소한 패싸움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리온은 혹시 자신들이 모르는 비밀 치안 시스템이라도 배치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이런 이치에 안 맞는 현상이 설명되겠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추측은 어긋났으니, 해당 지역의 관리 시스템은 지극히 평범했다. 현 지구처럼 폭력과 싸움을 근원적으로 방지하고도 남을 감시 장비나 치안 시스템은 부재했다.
윤혁은 추리의 방향을 조금 다른 쪽으로 돌렸다.
“정신 지배나 세뇌가 작동하는 중인가?”
잦은 경험을 통해 초인들의 지배적인 성향을 목격해온 그가 떠올릴만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상응하는 부분이 아예 없진 않았으나 이 역시 완전한 정답은 아니었다. 주민들에게서는 별다른 세뇌나 최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루디아가 흥미로운 다른 추측을 내밀었다.
“혹시 증오심을 해소할 다른 돌파구가 있는 게 아닐까?”
이틀 만에 그녀가 제시한 가안이 가장 정답에 가까웠음이 입증되었다. 제4구역에는 범 지역적으로 운용되는 공용 전투용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존재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호전성을 해소하는 탈출구였다.
제4구역 내에서 가상현실이란 사람들의 삶의 중요한 축을 차지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지금껏 방문해온 식민지에서 통상 운영되던 경제 시스템, 곧 지구의 자본 포인트 시스템을 맞춤 변형시킨 ‘생명 유착형 자본’ 계열 대신에 가상현실과 접목된 ‘제2 금융’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 유착형 자본 시스템, 즉 제1 금융은 기존에 엄연히 존재했었고 지금도 존재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문의 점령자가 최근 제4구역 내에 별도의 체제를 하나 더 도입하였고 그 바람에 제2 금융이 제1 금융보다 더 성행하고야 말았는데 문자 그대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 격이었다.
문제의 그 제2 금융은 제4구역 주민 전체가 동시에 접속이 가능한 초대형 가상현실 프로그램인 ‘워 게임(War Game)’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 시스템이었다. 누구든 워 게임에 접속하면 실제 전쟁을 하는 듯한 생생한 감각을 느끼며 상대방을 죽일 기회를 얻는다. 처음에는 개인전만 허용되었지만, 나중에는 집단 대 집단, 조직 대 조직, 지역 대 지역, 급기야는 대륙 규모의 전쟁으로까지 확대 적용이 된 버전으로 워 게임이 업데이트되었다.
가상현실이니만큼 개개인에 주어진 목숨도 여러 개였다. 또한 가상현실 내부에는 여러 개의 평행 세계들이 공존했기에 싸우고 또 싸워도 게임은 한 가지 결론으로 결판 나지 않았다. 무한의 투쟁을 즐기다 보니 사람들은 이 무궁한 아수라장에 중독되었다. 무력 싸움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물자 약탈 및 내기 도박 등 각종 지저분한 오락과 경쟁도 여흥을 위한 양념으로 곁들여졌다.
사람들은 승리를 갈구하며 여러 아이디어를 치열하게 창출해내었고 그 과정에서 부산물로써 전쟁 기술을 선두로 각종 테크놀로지와 전술이 발전했다. 실제 세상에서 실험된 적은 없었으나 워낙 현실적인 게임이다 보니 가상현실 내에서 개발된 지식이 현실 세계로 나와 실제적 기술력으로 환원되는 일마저 충분히 가능했다.
사람들에게 강한 증오심을 심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생산력을 도출해내는 시스템, 그것이 바로 제4구역의 경영 방침이었다.
선교사들이 처음 워 게임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직후 윤혁은 본능적으로 시뮬레이션 우주를 떠올렸다. 그러나 추후 좀 더 조사를 해보고 직접 실험 접속으로 확인까지 해본 결과,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점이 있었다. 시뮬레이션 우주는 비록 현실 차원과는 존재의 양상이 다르긴 해도 엄연히 실제로 존재하는 차원이었으나 가상현실은 달랐다.
‘몹시 실감 나긴 해도 그저 가짜 세계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점령자는 과연 무슨 의도로 이런 체계를 도입했을까? 혹시 그는 카이젤이 시뮬레이션 우주 개발을 통해 실질적인 이득과 발전을 창출해낸 일을 보고 감명이라도 받은 것일까?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솜씨를 발휘해 모방해낸 걸까? 혹은 그저 사람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여흥거리로 삼은 것일까?
‘사람의 증오심을 이용하다니, 정말 악질이네.
하긴 1세대 시뮬레이션 우주도 그 시작은 사형수의 뇌를 해부함으로써 발안된 것이라고 했었으니 이쪽이든 저쪽이든 도덕적 논란은 다를 바 없을 듯했다.
다행히 외부에서의 시스템 접속이 차단되었던 제2구역 당시와 달리, 제4구역의 워 게임은 인형들의 해킹 방식의 접근을 강경하게 막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세 선교사는 가상현실에 직접 접속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전쟁에 심취해있는 사람들을 말리거나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악을 근절케 해볼까 하는 발상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몇 번의 접속 만에 이런 생각을 포기하였다.
워 게임에서의 전쟁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과는 양상이나 규칙 면에서 상당히 달랐다. 지구 역사 속에서 있었던 전쟁들은 보통 윗사람들의 사정으로 아랫사람들은 그저 영문도 모르고 총알받이로 희생되는 역할이기 마련이었다. 군인 스스로는 증오 교육으로 세뇌당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적국을 열렬히 미워해야 할 명분이 많지 않다. 그러나 워 게임 세상 속에서의 전쟁은 순수히 구성원들의 증오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사람들은 공공의 적을 공략하기 위해 저마다 팀을 이루어 뭉쳤고 가상 공간 속에서 원수를 학살했다. 얼굴을 가릴 수 있었고 실제로 몸이 죽는 것도 아니었기에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때로는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기도 했으며 그 반대의 일도 비일비재했다.
선교사들은 그 끔찍하고 잔혹하고 현실적인 가상 전쟁 현장의 실태를 보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역겨움에 질려버렸다. 더 무서운 점은 따로 있었으니 제4구역 사람들은 양심에 화인이라도 맞은 양 전혀 껄끄러움을 느끼지 못하였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마 24:7)]
성경 말씀에 기록된 주님의 경고가 실감나게 아른거렸다. 과연 그 예언이 이 현실 위에 생생하게 재현된 것만 같았다. 전쟁의 참혹성. 여기에 더해서 인간 스스로 택한 증오의 길. 전쟁으로 인해 인격체의 존엄성이 살해되는 모습도 비참했지만,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량처럼 증오를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악랄함이 더욱 끔찍하게 피부에 와닿았다.
“보기 힘들어도 눈을 돌리지 마.”
불편한 기색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윤혁을 향해 리온이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충고했다. 멈칫하는 친구를 향해서 그는 계속해서 충고를 이어나갔다.
“우리 세대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전쟁의 참혹함, 그리고 인간 영혼의 잔인한 실상, 이번 기회에 똑똑히 보아두는 편이 나을 거야.”
“그래, 너희는 나와는 달리……, 고통의 실체를 체험해봤었지.”
풍족하지는 못했어도 비교적 평화로운 배경에서 자라났던 윤혁과는 달리, 리온과 루디아는 인간의 증오심과 투쟁을 코앞에서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 윤혁은 말로만 공감해서는 친구들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함을 깨달았다.
“최초의 위버멘쉬와 그가 세운 인류연합……. 21세기는 그들 덕에 태평성대가 되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하지만 그 직후에 도래한 혼돈의 시대, 그리고 투쟁의 연속……, 그 일은 위버멘쉬와 인류연합의 책임에 가까워.”
역사를 향한 리온의 평가는 냉철했다. 그는 탁월한 영적 혜안으로 세태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비평가였다. 고대의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 안에 우상숭배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오를 범함으로써 그의 사후에 나라가 분열되는 비극의 실마리를 제공했듯, 21세기 역사의 흐름도 보란 듯이 동일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래. 그렇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야.”
윤혁은 쓰라린 마음으로 씁쓸히 독백했다.
“강재혁 대표님, 그리고 현재의 인류연합……, 그들도 지금 그들이 앉은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돌이키지 않는다면 동일한 운명을 맞이할지도 모르지.”
친구의 경고를 듣는 윤혁의 마음은 돌을 끼얹은 듯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때 찾아올 새로운 혼돈의 시대는 고작 지구 정도 규모로 끝나지 않은 것은 분명하겠지. 틀림없이 우주 전역을 뒤덮는 끔찍한 대혼란이 될 거야.”
순간 윤혁의 머릿속에는 우주 인류가 서로를 죽이며 대전쟁을 벌이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만약 재혁의 부재로 세상이 분열된다면 어떤 일이 전개될까? 이미 인류는 수십만 이상의 은하들을 정복했다. 그 광대한 영토에서 대전쟁을 벌인다면? 더욱이 워프와 게이트로 인해 지리적인 장벽도 무의미해진 이때이니 누구도 안전 거리에 있노라고 자신할 수 없겠지.
'잠정적 파멸을 평생 머리 위에 지고 사는 격이겠군.'
첨단무기의 위력도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게 강력하니 일순간에 억 단위, 아니 조 단위의 인간이 증발하는 것도 손 쉬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인구가 줄어들면 인류는 이를 보완하겠다는 명분으로 금기시된 기술, 이를테면 인조인간 제작에도 손댈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은 땅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전투할 수 있는 주체는 인간만이 아니야.’
이종족, 기계,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카테고리의 유닛이 이미 창조되었다.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인공 인격들이 서로 격돌을 벌인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운 미래가 펼쳐질까? 항성계와 은하계, 심지어는 상위차원에 세워진 건축물들까지 생명체들의 피로 물들게 되리라.
‘아니, 모조리 증발해버릴 테니 흘릴 피마저 안 남으려나?’
두려운 미래를 생각하다보니 과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신감이 크게 위축되었다. 주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인간 문명이 상호 학살로 몰락하는 비극은 시기의 문제일 뿐 피하지 못할 불가항력의 운명임이 분명했다. 그런 대비극의 기초석을 자신의 형이 놓게 될 것을 알기에 윤혁은 가슴에 비수라도 꽂힌 듯 괴로움을 느꼈다.
‘차라리 그날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네.’
불편함과 교훈을 뒤로 한 채, 제4구역 선교는 20일 만에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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