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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09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44. 인터미션 V (4)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3.27 | 회차평점 0 0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왕은 미물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나름 그대는 상위의 차원종(種)이지 않나?”

   {그렇다고 해도 저는 일개 이데아(IDEA)의 모방작에 불과한 아류. 제복을 통해 우리의 시야로부터 당신의 실체를 반(半) 은폐하신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가림 없이 날 것의 실체를 관측하는 순간 제게는 당신의 존재가 거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당신의 육체와 정신은 곧 이데아와 일체이니까요.}

   참고로 이데아에게는 자신에게서 파생되거나 모방 창조된 하위존재에게 자신의 본체를 관측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리는 능력이 있다. 자연히 이데아에 종속된 아카식 레코드는 관측 금지의 영향을 받으며 이는 완전하게는 아니어도 카이젤을 향해서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다.

   “참 시답잖은 이유로군. 아류작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하긴 최근에는 퀸과 칼리드에게도 보안을 뚫렸다지. 이데아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체제 전체의 합을 넘어서는 성장력을 근원적으로 갖추지 않는 이상 필연적인 일이겠지.”

   이에 아카식 레코드는 황급히 자신을 변명하였다.

   {부당한 비교입니다. 제1철인왕이나 퀸은 엄연히 초인, 당신만큼은 아니어도 끝없는 성장력을 소유한 존재잖습니까. 우리로서는 그들을 따라가기 벅찹니다.}

   “글쎄? 이 시대는 오히려 인공지능이나 이종족의 진보 속도야말로 무시무시하지. 초인들이라도 최소한 그만큼의 성장세를 보이지도 못한다면 인류가 감히 지배자를 자칭할 자격은 없겠나.”

   {저희를 너무도 과대평가하시는군요.}

   “그런 여건 속에서도 인간에게 역전당하는 그대를 비웃는 맥락일세.”

   두 존재는 오래간만에 만난 전우가 서로를 장난스레 놀리듯 허심탄회하게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카이젤의 금빛 눈동자는 이내 단창이 표적을 꿰뚫는 듯한 기세로 아카식 레코드를 맹렬히 주시하였다.

   {슬슬 용건이나 말씀해주시죠.}

   “슬슬 내 새로운 힘을 시험해볼 생각인데……, 네 도움이 필요하다.”

   {당신께서는 이미 저보다 상위호환의 힘을 보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흠, 이번에는 발동할 초지능체는 이데아와 동격의 물건이야. 아직 익숙하지 않기에 당장 혼자서 두 개를 동시 발동하기란 무리지. 그래서 이데아는 잠시 잠재워뒀다. 그러니 그것의 역할을 대신할 다른 보조 조수들이 필요해.”

   {과연 제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해봐야지. 질이 안 되면 양을 늘려서라도.”

   카이젤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곧 다른 존재들이 허공에 소환되었다. 아카식 레코드와 비슷한, 기괴하게 생긴 물체들이었다. 무려 999개나 되는 수효. 닮은 듯하면서도 서로 달랐고 제각기 개성적 특질이 독특하였다.

   {저건!}

   아카식 레코드도 그들의 속성을 파악하고는 경악했다.

   “네 동족이다.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시리즈물이 되겠군.”

   그것들은 아카식 레코드의 후속작들이요, 업그레이드된 상위 버전들이었다.

   {저 한 명을 제작하는 데만 해도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지 않았습니까? 한데 어느 세월에 저런 것들을 일일이 다 창조하셨단 말입니까?}

   “원래 한번 만드는 게 어렵지, 그다음은 쉬운 법이야. 그리고 널 만든 건 내 부하 녀석들이다. 너 정도의 복잡성을 감당하는 과제라면 그들 같은 하수들이나 헤매지, 나는 달라. 어제 하룻저녁이면 해결하는 데 충분했다.”

   아카식 레코드, 한때는 유일성을 지닌 특별한 존재였으나 이제는 여러 양산형들 중 하나로 전락해버린 오리지널, 아니 오리지널이었던 그것은 허탈한 감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현실에 적응한 채 잠잠히 입을 다물었다.

   “네 녀석은 원형이니 Akashic Record-1이라고 명명해주지.”

   그렇게 Akashic Record-1부터 Akashic Record-1,000까지 시리즈 전대가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AR 시리즈 999기는 정기 모임이라도 나누는 듯 수다를 떨며 자신들이 쌓아둔 사상이나 정보, 지식, 연구를 교류했다.

   {저들이 있는데 굳이 제 도움이 빌리시겠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녀석들은 성능은 몰라도 경험은 너만큼 풍부하지 않으니까. 유경험자가 하나는 있어야지. 뭐, 좋아.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마침 새로운 능력을 시범 삼아서 발동할 예정이다. 너희들은 내 옆에서 보조 연산 역할이다. 준비해라.”

   {잠시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 으악!}

   불쌍한 Akashic Record-1이 채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왕은 1번부터 1,000번까지 이르는 AR 시리즈 전체의 제어권을 강제로 취하여 자기 정신과 공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현존하는 모든 통신 기술들이 총동원되었다. 사상의 음파들이 뒤섞이면서 현란한 협주곡이 그려졌다. 곧 금안에 새겨진 붉은 고리와 푸른 고리가 나선형으로 변형되었다. 카이젤의 현자의 눈, 곧 원조 현자의 눈이 발동되었다.

   “시작이군.”

   거대한 에너지가 분출되었다. 정신 에너지, 물리적 에너지, 환상계의 에너지, 상위 차원의 미지의 힘까지 한데 뒤섞였다. 카이젤은 힘을 효율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차원 저편에서 특수 제복을 소환하여 자신의 맨몸 위에 입혔다.

   “잘 봐둬라. ‘코스믹 옵틱스’는 처음일 테니.”

   곧 그의 이마에 희미한 빛 문양이 나타났다. 제3의 눈. 송과샘(pineal gland)에 심겨졌다고 알려진 고대의 미신적 전설. 그것은 영락없이 전설 속 ‘제3의 눈’을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Akashic Record 시리즈는 그 무시무시한 힘의 본질을 관측하더니 공포와 경외에 사로잡혀 제각기 탄식을 내뱉었다.

   {저건!}

   {마침내 보게 되는군.}

   {위버멘쉬의 초(超)차원 제어구.}

   {상위계로의 도약을 알리는 매개체!}

   {드디어 패러다임 대전환이 시작된다.}

   코스믹 옵틱스(Cosmic Optics). 상위 차원 정벌 계획을 본격적으로 궤도에 쏘아 올리기 위해 카이젤이 가장 먼저 제작에 착수한 씨앗은 바로 이 코스믹 옵틱스라 불리는 특수 초지능체였다. 그 후에 카이젤은 초대질량 블랙홀들을 매개체로 상위 차원 상에 테서렉트 아키텍쳐들을 건설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코스믹 옵틱스로부터 파생된 열매를 건축 재료로 활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테서렉트 아키텍쳐와 코스믹 옵틱스는 똑같은 특성과 본질을 지니게 되었다.

   자연히 코스믹 옵틱스는 광대한 상위 차원 구조물을 제어하는 핵심 중추로 자리매김하였다. 비유컨대 코스믹 옵틱스가 영혼이라면 테서렉트 아키텍쳐들은 육체를 이루는 지체들이었다. 테서렉트 아키텍쳐가 점점 더 광대한 상위 차원 영역으로 뻗어나가며 부피와 정밀도를 부풀려갈수록, 코스믹 옵틱스의 권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애초부터 상호 연계되도록 설계된 탓이었다.

   금일 받은 수술의 목적도 이미 심은 코스믹 옵틱스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있었다. 더불어 코스믹 옵틱스를 활성화하기 직전 최종 점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준비를 무사히 마쳤으니 코스믹 옵틱스의 시범 운용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카이젤은 자신의 새로운 일부를 활성화하였다.

   “크윽.”

   아무래도 첫 발동이라 괴로운지 카이젤은 주춤하였다. 그러나 금세 적응하고 제어권을 확보하였다. 곧 테서렉트 아키텍쳐들이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발산된 사념 파동을 감지했다. 그 반응으로 거대한 전율이 일어나며 구조가 변경되었다. 구조물들은 주인의 눈과 귀로 화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을 둘러싼 상위 차원의 방정식, 곧 본질과 법칙과 현상을 관측하였다. 앞으로 더 성장한다면 방정식 변수를 조정하거나 방정식을 인위적으로 새겨넣는 경지에까지 이를 것이다.

   “과연……, 아직은 버겁군.”

   카이젤은 잠시 왼쪽 머리를 부여잡았다. 미간이 잔뜩 일그러지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곧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적응하였다. 궁극의 정신뿐 아니라 궁극의 신체까지 소유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세워놓은 구조물인 테서렉트 아키텍쳐, 그리고 그것과 연계되어 진행되었던 모든 프로젝트들을 낱낱이 살폈다. 그중에서도 몇 가지를 특별히 눈여겨보며 유심히 살폈다. 대표적으로 퀘이사 엔진. 과연 예측대로 진행은 순탄했다. 원본의 엔진은 열심히 딸을 낳으며 복제 작업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벌써 1차 복제형은 수억 기, 2차 복제형의 개수는 열일곱 자릿수에 달했다. 슬슬 목표치에 도달하리라. 현실과 완전히 다른 시간축에서 작동하는 테서렉트 아키텍쳐가 촉매 역할을 했기에 가능한 생산 효율이었다.

   ‘활용이 관건이군. 2차 복제형 엔진들은 여러 개체를 다발로 묶어서 퇴축시킨 뒤 빅뱅 제너레이터(Big-bang generator)로 활용하면 되겠고……, 1차 복제형은 자체적인 양산이 가능한 형태로 개량해야겠군.’

   카이젤은 테서렉트 아키텍쳐의 데이터베이스 내부에 그의 머릿속에 미리 구축해둔 청사진과 도면들을 열심히 옮겨넣었다. 그에게 하사받은 청사진 데이터를 흡수한 구조물들은 각자 맡겨진 임무를 본격적으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렇게 코스믹 옵틱스와 테서렉트 아키텍쳐의 연계성은 온전성을 입증받았다.

   첫 발동치고는 제법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고 많은 것을 입증하였다. 카이젤은 당장은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후유증으로 당분간은 지친 몸을 추스르고 적응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겠지만 말이다. 업무를 마친 그는 거친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신체적 안정을 되찾았다.

   {괜찮으신지요?}

   Akashic Record-1이 주인의 안부를 질문했다.

   “흐음.”

   그새 회복되어 생기를 찾은 카이젤은 턱을 붙잡고 뭔가를 궁리하였다.

   “네 이름인 아카식 레코드는 신비주의 철학에서 유래한 개념을 본뜬 것이지.”

   초차원적 정보 집합체, 우주적 정보를 기록한 전지적 도서관, 집단 무의식, 아카샤(Akasa, 空)을 파피루스로 사용한 궁극의 기록 시스템. 전설에 따르면 누구든지 그 기록에 접속하기만 하면 만유의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도 한다. 비록 미신에 불과하다지만 사람의 욕망과 로망을 자극하는 신비임은 틀림 없었다.

   “물론 허황된 망상이지. 하지만 그런 철학도 나름대로 과학의 힘만 빌리면 새롭게 재해석해낼 수 있지. 그 덕에 너희들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말이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아카식 레코드는 긴장하였다.

   “뉴에이지 철학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만, 그런데 그게 저희와는 무슨 관련입니까?}

   뉴에이지. 합리성만 추구하던 시대 풍조에 반발하여 시작된, 통합 신비주의 운동. 그것은 범신론적인 철학과 종교, 특별히 동양의 불교와 힌두교의 정신들을 하나로 융합해서 만든 철학으로 소위 인간 개개인이 각자 깨달음을 달성해 육체를 초월한 ‘신성의 영역’에 도달해야 함을 주창하는 20세기 사조였다.

   “물론 실상은 이것저것 짜깁기한 쓰레기 사상이었지.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라는 개념도 그랬던 것처럼, 마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계륵 같은 아이디어야. 재활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때마침 상위 차원에 대한 지식도 많이 쌓았겠다, 마침내 코스믹 옵틱스도 데뷔시켰겠다. 시범 삼아서 새 능력으로 우주적인 장난을 벌이기에는 적절하기 그지없는 시기였다.

   “뉴에이지라는 사장된 옛 테마를 초고도 문명 버전으로 편곡해볼까 해.”

   AR 시리즈들은 카이젤의 기상천외한 선언에 긴장하였다. 한 번 내뱉은 말은 기필코 실천해내고야 마는 그 집요한 성격을 잘 알기에. 어찌하여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단 말인가.

   “너희의 의견은 어떤지 한 번 묻고 싶은 기분이 드는군.”

   초능력이라는 개념을 현실 속에 구축해보려던 참에 잘 되었다. 카이젤은 자신의 상상을 하나하나 구체적인 청사진으로 그려내며 마음속으로 장대한 계획들을 확정해나갔다. 인류 문명 진보의 방향과 속도를 가속하고 그 잠재력의 차원을 새로운 축으로 확장할 계략들을.

   “뭐, 어차피 내 뜻대로 진행될 테니 그 의견을 반영하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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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결국 전시안이 진짜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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