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15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45. 크로스솔져 I (6)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4.10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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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게임엔 벌칙이 있어야 흥미롭겠죠?
신수들로서는 딱히 히어로들에게 육체적인 손상을 입힐 계획은 없었다. 히어로도 엄연히 인류연합의 전력이니만큼 몸을 훼손시켰다간 분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히어로들도 엄연히 인간이니 이종족에게는 함부로 죽일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타격을 입혀서는 안 된다는 말은 없었지.
수치심, 굴욕, 절망 같은 감정들을 극한까지 심어주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철저히 망가뜨려서 두 번 다시 스스로를 영웅으로 여기지 못하도록 짓밟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벌이겠지. 인간으로서 죽지는 않겠지만 영웅으로서는 사실상 죽게 되리라.
-크큭, 인간들은 여전히 나약하군요.
그렇게 119번은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도덕적 딜레마 게임을 전개하였다.
한편 그 시각, 다른 장소들에서도 수백 개의 영웅팀이 동시다발적으로 똑같은 류의 시련에 휘말렸다. 각기 구체적인 내용은 달랐으나 펼쳐진 게임들은 하나같이 잔학했고 끔찍하고 교활했다.
단순히 인명의 무게를 두고 냉혹한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받는 상황 하나만으로도 고통스러웠으나, 더 무서운 것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어느 시점부터 가짜가 현실이 될 것인지, 현실이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솔져 출신 영웅들은 무참히 공략당했다.
이후로도 혹독한 시험은 점점 높은 강도와 난이도로 반복되었다. 히어로들은 자신들의 섣부른 실패가 곧 민간 세계의 위험으로 이어지리라 믿었기에 싸움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알면서도 강제적으로 판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반복되는 도덕적 딜레마 시험의 후유증으로 인해 그들의 정신은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상대는 그런 그들을 배려하지도, 편히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무너지고 또 무너져 마침내 영웅의 존엄성이 완전히 상실될 때까지 괴롭혔다.
“히어로즈라는 조직, 겉으로는 강해 보이나 의외로 내면은 말랑말랑해. 성운이 제법 잘 조직하긴 했지만, 급조 탓에 부실 공사투성이지. 약점 없는 이종족이 아닌 인간으로 구성되었다는 점도 치명적인 약점이고.”
일라이저는 여유롭게 체스판을 관망했다.
“지금은 기껏해야 다양한 버전의 딜레마로 괴롭혀주기 방식이지만, 차츰 창의성을 높여 육체적인 싸움과 정신적인 싸움을 병행토록 하는 것도 괜찮겠어. 그래야 최대한 많은 영웅을 재기불능으로 만들 수 있겠지?”
일라이저가 사소한 심심풀이 유흥으로서 구상한 히어로즈의 수난 플랜. 현 단계는 그가 구성한 그 큰 그림의 첫 단추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안겨줄 더욱 고차원적인 시련과 시험은 그의 패 중에 수도 없이 남아있었다.
“물론 단순히 영웅들을 상대로 개인적인 분풀이만 하는 것은 귀족답지 못한 일이지. 명예를 희생하는 대가로 실리는 얻어가지. 나도 이번 냉전으로 나름대로 현실적인 수익을 톡톡히 챙겨야겠어.”
그가 생각하는 이득의 카테고리에는 영웅의 신체나 무장을 파헤쳐 특수 기술들을 분석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목표도 있었다. 영웅들을 나름의 방법대로 성장시키되 성운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양으로 진화하도록 유도하는 것. 즉 영웅을 변질시켜 ‘반(反)영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만일 그 계략을 성취한 후에 반영웅과 신수끼리 치열한 격전을 부추긴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신수의 영향으로 영웅이 반영웅으로 변질할 수 있다면 거꾸로 신수도 반영웅의 속성을 받아들여 독특한 양상으로 진화할 수 있으리라. 그 반전을 활용하면 더 고차원적인 카테고리의 이종족을 발명할 수 있으리. 이것이야말로 일라이저가 이번 내기에서 진정 얻고자 하는 바였다.
*
평소처럼 문을 열고 제집에 들어선 고동색 머리카락의 청년은 의외의 방문에 곧 눈이 휘둥그레졌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존재감,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고고함에 역설적으로 덧입혀진 무거운 불편감. 청년은 움찔하였다.
“혀, 형님? 어쩐 일이세요?”
“반드시 별일이 있어야 올 필요는 없지.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손님은 여유로운 자태로 웃으며 자기 형제의 표정을 살폈다. 전처럼 움츠러들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항상 자신의 존재감에 움츠러들던 아우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번에는 미묘하게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되돌아왔다.
“그럴 리가요.”
되려 지현은 활짝 맑은 웃음을 머금고 큰형을 자기 집에 맞이하였다. 형님의 존재감을 직감적으로 무겁게 느끼는 것은 여전해 보였으나 뒤따르는 반응은 달라졌다. 성운은 상냥한 동생의 태도가 영 어색한지 눈 마주침을 일부러 피했다. 최근에 부쩍 막내의 태도가 부드럽고 달콤해졌다. 얼음장 같은 자신도 잠시 그 평범한 따스함에 홀려 무장해제당할 정도로.
‘저런 캐릭터였던가?’
그때 예쁘장한 여자가 성운을 발견하고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 오빠?”
“이런, 현아도 있었구나.”
원래부터 스스럼없었던 현아는 늘 그러했듯 친오빠 앞으로 달려 나가서 반가움의 표시로 포옹하였다. 그녀는 지현과는 달리 성운이 주는 위화감에 둔감했다. 한 명쯤은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하는 사람 사는 맛이 나는 법. 가족 간의 스킨십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한 성운은 꼼짝없이 받아주며 어색하게 몸을 굳혔다. 옆에서 또 그것을 기쁘게 바라보는 지현의 표정을 보니 더 난처했다, 성운은 고개를 일부러 반대쪽으로 돌리며 따스한 불편감을 외면했다.
‘어울리지 않는 일에 자꾸 장단 맞춰주게 되는군.’
성운은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지현이 돌봐 주려 온 모양이지?”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현아는 마침 막내 지현에게 맛있는 것이라도 해주겠다며 동생의 자췻집에 들렀던 참이었다. 귀여운 막내 남동생을 챙기는 책무의 전문가는 과연 형들보다는 누나였다. 그날 갑자기 성운처럼 귀한 몸이 납실 줄은 몰랐지만.
“식사는 이미 다 끝났는데, 아쉽네. 오빠랑도 같이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차라도 마실래? 바쁘지만 않다면 잠시 쉬다 가.”
“그래, 고맙다.”
평소 같았으면 일을 핑계로 미안하단 말만 남겼을 성운이 의외로 오늘은 동생들의 여유에 맞춰주었다. 그는 차를 대접받는 대신 직접 허공에서 공간 틈새를 열어 최고급 와인을 꺼냈다. 군사 용도로나 쓰이는 최첨단 공간 압축 기술을 일상의 도구로 낭비할 정도의 여유는 그 정도 되는 인물들에게나 허락되는 사치였다.
“우와.”
현아의 감탄에 성운은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히 굴었다.
“신기해. 꼭 마술 같아.”
“마술보다는 현대 과학이란 표현이 옳지.”
성운은 다과가 놓인 테이블에 세 개의 잔을 놓고 와인을 부었다. 그때 그는 막내 쪽을 의식하더니 살짝 눈길을 흘리며 질문하였다.
“지현아, 너는 술 안 마시지?”
“네, 저는 제가 직접 다른 음료로 가져올게요.”
“무알코올이면 된단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지.”
지현이 부엌 쪽으로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성운의 민첩한 손가락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사업가다운 영민한 신속함과 몸에 익은 행동의 자연스러움이 일상적 작은 습관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지현은 아주 미약하게 놀랐다.
“향미는 나쁘지 않을 테니 마음 놓으렴.”
손짓은 그저 신호. 지현의 잔에 부어진 음료 쪽으로 무형의 기술력이 발동되었다. 현대판 보급형 연금술인 화학 염동력(Psycho-chemistry)이었다. 곧 액체의 성분 분자는 변환 과정을 거쳐 다른 물질로 바뀌었다. 술은 순식간에 제법 괜찮은 맛의 무알코올 음료로 바뀌었다.
순간 성운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아주 살짝 스친 동생의 미묘한 온도 변화를 감지하고는 애써 양심을 억누르는 기색으로 대꾸했다. 자존심과 체면을 보존하면서도 가책을 최소화하려는 이기적인 어투로.
“미안하다. 이해해라. 내가 사소한 부분에서 무신경한 사람이라서.”
지현의 신앙을 염두에 두고 한 사과였다.
“괜찮아요.”
“불량한 버릇을 배웠거든. 직속 보스에게 말이야.”
하수처럼 품격 없게 으스대지 않고도 은연중 자신을 드러내며 높이는 기술은 최상위 초인들의 기본 소양이었다. 특별히 신이 된 양 위업과 표적을 자랑하되 정정당당하게 과학의 힘을 들먹이는 과시의 퍼포먼스는 초인들에게 있어서 말초적인 자기 충족감을 채워주는 고질적인 습관이었다.
“하지만 난 적어도 분수를 아는 사람이지.”
“…….”
착한 막내는 묵묵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큰형을 용서해주었다. 물론 이 짧은 찰나에 스파크를 일으킨 영적 기류의 문맥을 파악하지 못한 현아는 성운이 왜 느닷없이 사과를 했는지 그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고 별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간 별 탈 없이 지냈니?”
“네, 형님.”
큰형이 자상한 목소리로 관심을 가져주자 지현은 기뻐하는 기색에 최근의 근황을 알려주었다. 어느 순간 그 다정한 기류에 또다시 휘둘리는 자신을 인지한 성운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군. 보스도 강윤혁 씨에게 이런 식으로…….’
평생 형님을 불편하게 여겼던 막내 녀석이 언제부터인가 소박한 진정성을 무기로 삼아 자신의 심리적 벽을 허물고 있었다. 이렇게 내버려 둬도 좋을까?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형?”
잠깐 현아가 형제 둘만 거실에 남겨둔 채 부엌일을 보러 자리를 비운 틈에 지현이 조심스럽게 형에게 물었다. 심기가 어지러울 때마다 왼쪽 눈을 미약하게 찌푸리는 성운의 습관을 포착해낸 것이었다. 대인 관계에 뛰어난 현아 정도는 되어야 관찰할 수 있는 포인트인데, 그새 지현도 학습한 모양이었다.
“고민이라……, 부인하지는 못하겠네.”
성운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리듯 탄식을 내뱉었다. 동생 앞에서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으로 곤란했다. 하지만 지현의 사려 깊은 태도가 거짓은 아닌지라 누군가에게라도 하소연하고픈 생각에 입이 근질거렸다.
최근 일이 잘 안 풀리긴 했다. 대뜸 냉전 초반부터 히어로즈가 신수들에게 농락당했으니 말이다. 일라이저의 계획이 무엇인지 뻔히 보이기는 했으나 막을 방책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도 이참에 강력한 군대를 보유해버리면 쉬우나 그런 접근법은 자신의 취지를 부인하는 꼴이니 곤란하다.
지난 며칠간 신수왕과 치열한 심리전을 벌이며 전략을 세워왔으나 자신의 미학을 충족시키는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도움을 드릴만큼 영리하지 못해서 안타깝네요.”
어느새 형이라며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는 지현. 사실 평상시에도 그렇게 부르라고 권유했으나 스스로 거리를 두었던 동생이었건만, 이제는 진지하게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우습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일개 일반인이 최상위 초인에게 도움이라니. 하지만 형을 도우려는 동생의 태도는 진실해 보였기에 외면하기에도 양심에 거슬렸다.
‘나 같았으면 저런 순수함을 보일 수 없었겠지.’
지금껏 성운이 구상하고 실행해온 인생은 철두철미한 계산과 계획에 기반한 것뿐이었다. 늘 그는 이중 삼중의 일거양득을 염두에 두고 일해왔다. 인류 전체의 유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명예욕이나 권력욕도 잊지 않았다. 공공선과 사적 이익이 하나로 합치되는 방향으로 삶의 흐름을 몰아왔다. 그의 행동 모두는 늘 경쟁자를 누르고 상급자에게 인정을 받는 두 목표를 충족시키는 도구였다.
“타인을 돕는 행위가 네게는 행복으로 다가오는가? 무조건적으로?”
성운은 저도 모르게 부하들을 추궁할 때 쓰는 어투로 지현에게 말을 던졌다. 순간 그는 당황하며 멈칫했다. 왜 그랬지? 말을 꺼내고서야 그는 후회하였다. 왜 하필이면 날이 섰을까? 자신과 다른 순수한 친절에 신경이라도 거슬렸던 건가?
“형, 저는 단지……, 죄송해요. 주제넘게 굴어서.”
“아니다, 아냐. 미안해, 신경 쓰지 마. 내가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변명한다고 꺼낸 말이 저가 보기에도 참으로 궁색했다.
“그래도 힘드실 때는 속으로 앓지만 말고 함께 나눠요. 가족이잖아요. 아니 가족이 아니더라도 이웃끼리 서로를 돕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해요.”
가족. 이웃. 그렇군. 저 아이는 자신 이외의 모든 타인을 소중한 형제처럼 생각하는 건가? 인간의 본성으로는 쉬이 품기 어려운 생각이다. 특히 경쟁의 논리에 지배받는 성운 같은 인간이라면 더욱더.
혹시 일라이저의 계획을 깨트리고 역이용해낼 수 있는 파훼 계책도 여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와중에도 타인의 친절을 승리를 위한 무기를 창안할 모형으로 보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괴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성운의 생각은 새로이 떠오른 아이디어 위에 고정되었다.
‘강성한 씨를 만난 이들 중 상당수가 지현이 같은 변화를 겪었지.’
만약 그들이 하나로 묶인다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려나 궁금했다. 이렇게 한 아이가 베푼 친절의 한 마디, 그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예상 밖의 나비효과로 이어질 운명에 처했다. 지구 패권 경쟁의 궤적을 넘어 장차 우주 인류의 역사에까지 한 획을 그을 변화의 첫발이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잉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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