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19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47. 니르바나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5.11 | 회차평점 0 |
흥미로운 소설을 하나 추천드립니다.
세기말 배경에 대체역사를 다룬 현대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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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7. 니르바나(涅槃)
(주의 : 불교 교리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함유할 수 있음을 경고드립니다.)
리온은 사부의 평가를 받고자 사원을 방문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의 그는 갓 열네 살이 되던 소년이었다. 사찰에서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을 때 그를 시험할 평가 단원이 찾아왔다. 푸른 눈을 띤 젊은 승려였다. 그의 사부, 티아라는 항상 중간평가 때면 제자의 수준을 고려해 제자와 동급의 지혜를 가진 존재를 파견하곤 했다. 고작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 리온 입장에서는 이러한 눈높이 교육이 일종의 자비처럼 느껴졌다.
“소승(小僧)은 게이브리얼 승려입니다.”
“…….”
이미 그 당시부터 티아라의 엉뚱한 작명 센스는 악명이 높았다.
그 시절은 이미 종파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종교가 멸종 위기에 처한 때였다. 오로지 성녀 티아라만이 과거에 존재했던 종교의 시스템과 종사자를 그럴듯한 모습으로 재현시켜낼 수 있었다. 그녀는 승려도 창조했고 무슬림도 만들어내었으며 뉴에이지 사상가도 빚어낼 수 있었다. 그녀가 지어내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 자기 부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뿐이었다.
“반갑습니다, 게이브리얼 씨.”
리온은 상대를 종교인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하며 인사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불교와 기독교의 가치관을 두고 변증의 논박이 시작되었다. 반나절 내내 토론은 끊기지 않고 쭉 이어졌다. 둘 다 종교적으로 박식하긴 마찬가지였다. 대결은 정중하게 진행되었지만, 결코 타협점은 없었다. 불교 측에서는 끝없이 타협을 시도했으나 매번 리온은 선을 그어버렸다.
“소년께서는 무아(無我)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
무아. 이 세상에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내 생각, 내 자아, 내 소유라는 카테고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니 자아에 대한 집착을 온전히 버려야 한다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것은 불교의 핵심이었다.
“무아……, 자신이란 게 없다면, 어찌 ‘개인’을 정의 내릴 수 있죠?”
“나와 타인, 모든 개별 개체는 실상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외부의 존재들과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정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관념을 버리고 우리 모두가 만물의 일부로써 하나라는 생각을 품는 데서부터 깨달음의 첫 시작점이 발생하지요.”
“제법 그럴듯한 표현이나 당신이 간과하신 점이 있습니다.”
리온은 상대를 스님이라고 부르기를 일부러 의식적으로 거부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옳습니다만,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만물을 정의하려는 사상은 무신론적 발상에서 나온 그릇된 사상입니다. 절대자께서는 분명 실존하십니다. 인격적인 절대자이시죠. 모든 만물은 그분의 창조물이며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진정한 본질이 정의됩니다. 그리고 인간 각 개인은 창조자 앞에서 각자 책임을 지닌, 개별적이고 구분되는 존재입니다. 그 존엄성을 뭉뚱그려 무마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게이브리얼 승려는 혀를 내차며 리온을 꾸짖었다.
“어허, 소년이여, 그대는 스스로가 ‘좋다’고, 혹은 ‘옳다’고 여기는 것에 과하게 집착하고 있구려. 신에 대한 당신의 사고방식은 ‘동굴’이나 마찬가지요.”
“동굴이라뇨?”
“그렇소. 무언가를 ‘좋다’라고 생각하고 계속 거기에만 머물려는 집착 말이오. 물론 그것 자체가 틀렸다는 뜻은 아니오. 하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고집하며 타인의 생각을 비난해서는 안 되오.”
소년은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궤변이군요. 어떻게 인생의 본질적인 해답, 곧 만물의 본질에 대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식이 적용된단 말입니까? 본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절대적인 것이어야만 합니다. 한 가지가 옳다면 다른 것은 틀려야 합니다.”
“소년 그대는 저도 모르게 최고를 정해두고 그것에만 집착하는구려. 그런 가운데서 모든 고(苦)가 튀어나오는 셈이오. 삼라만상은 끝없이 변화하오. 그러니 어찌 절대적인 최고가 존재할 수 있겠소.”
그럼에도 리온은 이번에도 굴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시간축에 갇혀있는 우리에게는 그럴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 그 자체도 지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로지 영원한 현재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영원(永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까?”
“어허, 불변의 차원이라, 그대는 설마 인간에게 시간의 굴레를 벗어난 진정한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물론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지으신 영혼이 있습니다.”
승려는 곰곰이 고민한 후 다시 대답했다.
“영혼이라니. 그야말로 자아, 곧 내 것에 집착하는 생각이구려. 당신 영혼에 진정으로 당신의 본체라 부를만한 부분이 있을 것 같소? 영혼이란 그저 업(karma), 즉 우리가 쌓아온 행위의 합일뿐이지 실체는 없소. 과거의 업이 누산되어 현재의 나를 빚었고, 현재의 업은 쌓여 다시 미래의 나를 구성하는 식이오. 무한히 순환하는 굴레일 뿐이오.”
“종교의 탈을 썼을 뿐 형이상학적인 형태로 빚어진 유물론이군요.”
“소년은 참으로 남 비판하기를 좋아하는구려.”
“그저 진리의 말씀에 비춰 거짓을 진단하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릇됩니다. 첫째, 영혼은 순환하지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 혹은 영원한 심판 둘 중 하나에 처합니다. 회색 지대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윤회의 허상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소년의 강직하고 또렷한 언변은 차분히 지속되었다.
“둘째, 업이 쌓여 자기 자신이 만들어진다니, 그 주장은 행위가 어떤 사람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말씀 같군요. 죄송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도리어 본질이 행위를 낳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모두 창조 질서에서 떨어져 타락된 상태입니다. 그 사상누각 위에 백날 업이니 행위니 하는 것을 쌓아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죄악된 본질을 끊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사람의 ‘행위’가 아닙니다.”
언뜻 보면 무례해 보일 정도로 상대의 사상을 재단하는 어투였다. 그러나 소년은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되 옳고 그름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는 ‘다르다’라는 말 대신에 ‘틀렸다’라는 용어를 일부러 선택했다. 여타의 문제라면 모를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만큼은 그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이런! 가치판단이란 상대적인 법이오. 불행이 있을 때는 행복이 공존하기에 위로를 받을 수 있고, 행복할 때는 불행을 대비함으로써 준비하는 법이오. 양극단이란 언제든 공존할 수 있소.”
“서로가 생각하는 악에 대한 정의가 다른 모양이군요. 악은 절대선에서 떨어져 나간 부재이자 분리의 개념입니다. 당신은 선악이 음양(陰陽)처럼 공존하는 것처럼 여기지만 영원히 그렇게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최후에는 극명히 분리될 것입니다. 절대자와 연합된 쪽에는 영원한 선만 존재할 것이고, 분리된 쪽에서는 악과 고통만 영속될 것입니다. 불완전한 혼합 상태는 한시적일 뿐입니다.”
그러자 게이브리얼 승려는 무릇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가르쳤다. 불행에 대해서 인지체계를 바꾸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 그의 논지였다. 그러나 리온은 불행을 대하는 가치관 또한 상대와는 전혀 달랐다.
“사고의 전환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다고 해결책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만유를 하나님의 시선에서 바라보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불행에 대한 의미 부여를 멈춘다? 그런다고 해서 불안과 낙망이 사라집니까? 도리어 절대자께서 그 불행을 통해 어떤 뜻을 실현하려는 계획을 품고 계시는지 그 뜻을 묻고 따라가려는 순종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소년과 승려의 대화는 거듭 쳇바퀴만 돌며 평행선을 달렸다. 시작점부터가 완전히 다른 종교였으니 화합의 여지가 있으려야 있을 수 없었다. 이날의 대화는 소득 없이 종료되었다.
이후 티아라는 이와 같이 몇 차례 더 시험관을 파견해 리온을 시험했다. 그러나 소년은 쉬이 넘어가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중간평가는 이렇게 마무리되었고 최종 평가는 모종의 이유로 먼 훗날로 미뤄졌다.
*
은하계 한구석에는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세계가 얹혀진 우라노폴리스가 존재했다. 그 인위적으로 기획된 세계에는 순환 속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세계를 구성하는 인종, 문명을 이루는 기반, 그리고 문명의 수준, 이 세 가지 요소가 여러 단계 사이를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기나긴 세월 동안 순환했다. 이러한 역사적 특성 때문에 수천 년간, 니르바나의 주민들은 세계란 본래 순환하는 것이 본질인 줄로만 인식했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은 자신들 개개인의 운명 역시 순환의 굴레에 갇혀있노라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무한한 횟수의 환생을 믿었다. 실제로 그곳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전생에 대한 기억을 소유했다. 그 전생은 마냥 허상이 아닌 역사적 데이터와 상보성을 지닌 기억이었다. 즉 실제 과거에 살았던 사람 혹은 이종족의 삶과 상당 부분 동일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불편한 진실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었고 주민들은 그것을 계산 변수에 넣지 못했다. 바로 외부 세계의 기획자들이었다. 외부 관리 세력은 니르바나의 각 인간 개체로부터 인생, 경험, 지식, 인격 데이터를 인위적으로 추출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두는 시스템을 확립했다. 이들은 이 데이터를 ‘karma’라는 이름의 매질에 녹여 담음으로써 형태 변환을 하였다.
Karma라는 물질의 정체는 사실 22세기 지구 인류의 첨단 기술이 낳은 산물 중 하나였는데 그 속성이 매우 기이했다. 첫째, karma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중간 성질을 지녔다. 그것은 물질인 동시에 정보였다. 정작 그걸 다루는 세력도 karma가 이런 본질을 지니는 이유는 꿰뚫지 못했다. 둘째, karma는 물질과 정보에 동시다발적으로 다중 결합하는 게 가능했다. 예컨대 사건 기록이나 지식과 융합하는 것도 가능했고 동시에 원자나 소립자 자체에 결합하기도 했다.
이 기이한 매질은 차세대 컴퓨터를 제작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재료로 활용되었다. 그러던 중 혹자가 특이한 아이디어를 한 가지 창안했다. 인공지능 컴퓨터들에도 karma를 이용하는 마당에 어쩌면 사람이나 생명체에게도 karma를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이내 많은 지식인이 사람 신체와 karma의 결합이라는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졌다.
종국에는 이를 현실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본격적인 임상 시험까지 도입되었다. 그 시험장이 바로 ‘니르바나’, 아니 우라노폴리스-200,866,487호라 불리는 하늘도시였다. 지구 권세자들의 실험장으로서 채택된 식민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철두철미하게 속아 억겁의 세월을 이용당했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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