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32회 하늘위의도시들 Ch 50. 낡은시대와 새로운시대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5.20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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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 주민들의 사고방식은 이러했다. ‘3차원의 물질세계란 저속하고 고리타분한 법에 종속되어 있으며 고통이 가득하고 불완전한 영역, 반대로 상위 차원의 세계는 자유가 넘치고 인류애와 교제가 풍부하며 계몽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스스로 법칙이나 현실도 창조하도록 허락된 신적 영역이다.’
“심히 영지주의적(gnostics)인 발상이네요.”
“그건 또 어떤 사상이오?”
지구 문물과 역사를 모르는 스테판에게 얼른 리온이 덧붙여주었다.
“초대 교회 시절, 올바른 복음을 훼방하고자 나타난 철학이에요. 성경적 가르침에 그리스 철학을 뒤섞어 만들어낸 엽기적인 기독교 이단 사상이죠. 혹자는 과거의 유물이라고 하지만 천만에요. 그 영은 살아남아서 비슷한 레퍼토리로 반복되어 역사를 점철하였죠.”
“지금까지도 저런 모습으로 둔갑해 활보하다니, 참으로 질긴 생명력이오.”
“배후에 역사하는 영들이 아직 살아있으니까요. 한 번 잘 먹힌 비술은 사골처럼 뼛속까지 우려내어서 재활용하는 게 합리적이긴 하죠.”
여하튼 네오테라의 사람들은 사람을 비롯한 만물에는 신성(神性)의 씨앗이 내재되음을, 그리고 깨달음을 통해 그걸 각성할 수 있음을 믿었다. 이 신앙 체계에 따르면, 신성의 씨앗이란 ‘오래된 이들(The Old Ones)’이라고 불리는 근원적 신적 존재들에게서 파생되어 만물 속에 뿌려진 것인데, 이 씨앗을 가꾸고 키워나가 일정 단계에까지 이르러 온전한 자유를 획득하면 껍데기에 불과한 그릇을 깨트리고 온전한 신으로 각성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런 원리로 각성된 피조물 출신의 신을 오래된 이들과 대조하여 ‘새로운 이들(The New Ones)’이라고 칭했다.
요약하자면 네오테라의 신앙과 문화는 각 개인이 진리를 깨달아 자유로움을 얻고 ‘새로운 이들’ 중 하나로 각성하여 신이 되는 데에만 철저히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목표지점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어떤 여정을 택하건 용납되었다. 모든 길은 하나의 목적지, 곧 신성의 각성으로 통한다는 게 그들의 신념이었다.
흥미롭게도 네오테라 신앙에는 ‘사랑’이나 ‘구제’와 같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기독교적인 듯한 요소도 많이 차용되어 있었다. 심지어 신적 존재로 각성해 ‘새로운 이들’이 되어야만 온전한 연합과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는 점도 얼핏 들으면 성경의 교리와 유사성이 엿보였다. 나아가 ‘새로운 이들’의 책무가 아직 각성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하고 그들도 깨달음을 얻도록 가르침과 지도를 내려주는 것이라 믿는 점도. 어쨌든 그렇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만인이 신이 되어서 하나가 되는 것이 네오테라 신앙이 추구하는 사랑의 도였다.
“아무래도 하나님의 가르침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인용된 것 같소.”
“……그렇죠.”
유사품이란 같은 듯하나 결말이 다른 것. 네오테라 신앙은 ‘성도 간의 연합’이라는 성경적 개념을 ‘새로운 이들’ 간의 연합으로, ‘타인을 향한 긍휼’을 ‘신적 각성을 도와주려는 관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추구하는 소망을 상위 존재로의 각성 추구로 치환하여 아주 교묘하게 둔갑시켜 놓았다. 고의로 표절한 것인지 우연적인 산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뜻 보면 정말 근사하게 보일 법도 하네요. 단 한 가지 결정적인 데서 비틀어진 점을 빼면 말 자체는 하나하나 그럴싸해요.”
리온은 스테판더러 그게 무엇인지 알겠냐며 눈짓을 주었다.
“모든 가르침들 속에서 하나님을 배제해버렸소. 그분의 필요성을…….”
하나님 없이 인간끼리 모여서 신성을 이룩하자. 하나님 없이 피조물끼리 위대한 사랑을 구축하자. 하나님의 법 없이 인간끼리 자신만의 법칙을 새로 만들자. 하나님 없이 선한 세상을 짓자.
이것이야말로 네오테라의 신앙이 추구하는 지향점이자 근본적 한계였다.
“혹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더라고요. 진리를 분별하는 지혜란 명백한 참과 명백한 거짓을 분간하는 것이 아니다. 미련한 자도 그 일은 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지혜는 ‘절대적인 진리’와 ‘진리에 한없이 근접해 보이는 거짓’을 올바로 구분하는 능력이다. 지혜와 명철의 영이 필요한 이유가 이 때문이겠죠.”
“옳은 말이오. 차라리 대놓고 주님의 가르침을 적대한다면 최소한 믿고 분별하려는 의지가 있는 자들은 속지 않겠지만, 교묘하게 맞는 말과 거짓을 섞어놓으면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자들마저도 속아 넘어갈 것이오.”
“그 마침이 멸망으로 귀결되기에 더욱 비극이죠.”
비평만 해서는 바뀔 게 없었다. 리온과 스테판은 네오테라에서 얻은 각종 정보와 지식을 총망라해 윤혁과 루디아에게도 전송했다. 물론 전도의 본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둘은 틈틈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어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짓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살폈다. 대다수는 심각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정신적, 영적 충만감을 주는 대용품이 있었기에 구태여 배타적이고 불편한 기독교 진리를 수용할 여념이 없었다.
복음의 걸림돌은 배타성 문제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을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도 주민들에게는 큰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뒤 선과 악에 대해 하나님의 잣대를 버리고 자신만의 기준을 채택해버렸던 것처럼, 네오테라 신앙에 찌든 주민들은 모든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스스로에게 두었고 자연히 하나님의 법도를 인정하기를 싫어했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도덕이건 과학이건 모든 기준은 결국 하나로 융화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팽배했다. 아울러 어떻게 해서든 초월자가 되면 도덕적 규율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실제로 네오테라의 선진들 중 유명한 이들은 하나 같이 초월자가 되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에겐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네오테라 인들도 사랑을 추구하긴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규율 없는 방종의 사랑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사랑을 이룩해낼 수 있다 여기는 점이었다.
“오로지 참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만 올 수 있거늘.”
“이곳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사랑이란 우리가 이해하는 사랑과는 달라요. 자신 먼저 높이고 그다음에 다른 이들을 구제하자는 이기적인 사랑이에요. 그럴 듯하게 들리긴 하지만 그저 자기 충족이자 자기 만족이죠.”
실제로 네오테라의 사상은 이렇게 가르쳤다. 먼저 자신부터 초월자가 되어야만 타인에게 초월의 길로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에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먼저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우선순위였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의 본질은 도리어 자기희생이거늘.”
“네, 그리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인 공의(公義)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랑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죠. 주님께서 생명까지 내버리셨던 그 희생의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해요. 아울러 주님의 길을 함께 따라가지 않는 자는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없어요.”
이렇듯 믿는 그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건만, 현지 주민들에게는 외계의 교훈보다도 낯선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마음에 담아두길 거부했다. 결국, 말씀의 씨앗은 길가에 뿌려진 셈이었다. 처음부터 빈 알맹이였던 ‘신성의 씨앗’이란 이름의 가짜를 신봉하는 풍토가 진정한 생명의 씨를 몰아내 버렸다. 그렇게 참 씨앗은 바닥에 나뒹굴었고, 득달같이 몰려든 사악한 새들에게 남김없이 삼켜져 버려 한 톨도 남지 않았다.
*
한편, 루디아는 레이허브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의 생각 속 빗장을 조금씩 열어나갔다. 처음에는 속내를 숨겨두던 레이허브는 타인의 깊숙한 상처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는 위로와 권면에 경계심을 놓게 되었다. 윤혁도 곁에서 레이허브가 나날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놀랐다.
‘역시 룻에게는 주님과 닮은 상냥함이 있구나.’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흉내 내지도 못하는 부드러움과 따뜻함.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에게는 자신에게 합당한 모습과 역할이 맡겨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모습대로 헌신하되 온 힘을 다하자는 신념이 확고해졌다.
한편 선교사들과 친해진 레이허브는 두 친구에게 다양한 정보, 곧 네오테라의 신앙 체계, 초능력 운용 방식, 문화, 학문 수준 등을 들려주었다. 과연 그녀의 증언은 리온이 전송한 정보와도 정확히 일치했다. 네오테라는 지금까지 방문한 여러 종류의 초능력 기반 세계들의 특색을 모아 완전체로 구현해낸, 최종단계의 역작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는 한 가지 기이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승천과 강림에 대한 설화들이었다. 이따금씩 주민 중 일부가 신적 권능을 각성해서 초월 세계로 올라가는 일들이 이곳에서는 심심찮게 일어난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각성하면 얼마 후 다시 신적 모습으로 현세에 강림해 중생들을 계몽한다고 한다.
레이허브의 증언에 따르면 연간 최소 삼십만 명 이상의 초월자가 네오테라 내부 행성들에 현신했다고 한다. 그런 초월자들은 모습과 아우라는 조금 달라졌을 지언정 대부분은 과거 네오테라에 거주하던 인간 혹은 이종족이었고 이에 대해 확증하는 물증도 많았다.
“정말로 그들이 과거에 이곳의 주민이었을까요?”
혹 위장이나 가짜는 아닐지에 대한 의혹을 윤혁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뇨, 분명해요. 증인이 허다해요. 초월자들이 오로지 당사자만 아는 각종 경험적 정보를 정확하게 증언하여 자신을 입증해보이기도 했었고요. 무엇보다 인품과 인격과 습관이 너무나도 유사했거든요.”
물론 이 말만 갖고는 확증하기 어려웠다. 악령도 얼마든지 사람으로 위장하여 흉내를 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의 케이스에서 대중이 일괄적으로 증거를 보았다고 하니 마냥 악령의 소행으로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인류연합의 수작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석연찮았다. 그토록 많은 인격체를 모방하기란 그들로서도 쉽지 않을 테니까. 당장 단테 같은 실험체만 해도 복제 대상이 된 인격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정말로 주민을 초월자 비슷하게 각성시키기라도 한 걸까?’
나날이 초고도로 발전하는 초능력 테크놀로지를 생각하면 마냥 불가능할 같지는 않았다. 물론 설령 그게 진짜 초월 각성이었다고 해도 대부분은 한나나 하르티처럼 인류연합에게 강제로 종속당하는 결말로 이어졌겠지. 진정한 의미의 승천이 아닌 비참한 속임수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으리라.
며칠 더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윤혁과 루디아는 레이허브와 심리적 거리감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친해지던 중 어느 날, 루디아는 마침내 레이허브의 가슴 속 깊은 고민에 자연스레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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