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33회 하늘위의도시들 Ch 50. 낡은시대와 새로운시대 (4)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5.22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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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허브는 지난날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정직하게 고백했다.
“강림자…, 그러니까 초월자 중 하나가 내게 다가온 적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본래 네오테라의 존재가 아니었어요. 그는 아예 외부 세계에서 온 존재였죠.”
윤혁과 루디아는 의외의 이야기 전개에 흠칫 놀랐다.
“많은 이들은 그가 ‘새로운 이들’이 아닌 ‘오래된 이들’, 즉 근원에 가까운 신적 존재라고 믿었어요. 본인도 그걸 부인하지 않았고요. 확실히 우리와는 급이 다른 강력한 권능이 느껴지긴 했죠.”
둘은 귀를 쫑긋 세우고 숨을 죽인 채 이어지는 설명에 집중했다.
“그자는 처음 왔을 때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었죠. 하지만 나와 만난 이후로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항상 내게 얼굴을 보여주었답니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남성이었죠. 저는 곧 그에게 매혹되었어요. 그도 내게 사랑을 속삭였답니다. 그렇게 우리는 상대방에게 깊이 빠져들었어요.”
그 뒤의 이야기는 썩 아름답지 못했다. 두 사람은 치기 어린 욕정에 빠져 하룻밤을 나누었다. 그 후에 정체불명의 강림자는 다시금 원래 세상으로 귀환했다. 땅에 버려진 불쌍한 레이허브에게는 아이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서 떠난 겁니까?”
윤혁이 분을 차분히 다스리며 질문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는 않았어요. 떠나가기 전에 내게 많은 재물을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내 마음은 칼로 도려낸 듯 아프고 허무했어요. 책임을 떠난 사랑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깨닫게 되었죠. 아니,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 임신 직후 레이허브가 신의 아이를 뱄다는 소문이 스멀스멀 돌았단다. 그 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은 더욱 비참해졌다. 사람들은 그녀의 모성애와 어미로서의 존엄성과 수고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의 관심사는 신의 아이가 자라나 그들을 더 높은 영역으로 이끌어주는 것이었다. 출생 직후 레이허브의 아이는 공공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녀는 애증으로 점철된 어린 아기를 안아보지도 못했고 어미로서의 자격을 잃은 채 내버려졌다.
이후로도 그녀의 수모는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신의 아이를 낳은 그녀를 향하여 이러쿵저러쿵 다양한 소문을 떠들었다. 개중에는 미신화도, 질투도, 매도도, 원치 않는 음담패설과 중상모략도 있었다. 그녀는 마음과 명예를 처참히 짓밟혔다. 수치감과 죄책감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된 레이허브는 사람의 이목을 피해 도시 외곽에 숨어들었다.
루디아는 레이허브의 억울함과 비통함과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따뜻하고 신중한 위로를 전하였다. 둘에게는 형태는 달라도 각자만의 고통과 상실의 추억이 있었기에 공감의 끈이 쉬이 형성되었다. 절망적일 정도로 큰 상실을 겪어본 적 없었던 윤혁으로서는 그저 지켜보는 것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레이허브 씨는 분명 이 지역의 문화가 가르치는 책임 없고 실체 없는 허망한 사랑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그나마 윤혁이 도와줄 길이라면 레이허브에게 진실한 사랑의 본체를 발견할 방도를 제시해주는 게 전부였다. 다행스럽게도 그 도움의 가치는 한 사람을 살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많은 거짓과 싸워왔고 미혹들을 파훼하는 일을 하나님께 훈련받아 왔기에 사람을 진실과 직면시키는 데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믿음이야 들은 이의 의지에 맡길 문제지만 적어도 기회는 줄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윤혁은 레이허브로 하여금 ‘참된 사랑’에 대해 올바른 관심을 두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렇게 대화의 끈을 확장해나간 뒤, 적기가 이르렀다는 판단이 서자 몸사림을 잠시 접어두고 과감하게 일을 개시했다. 그는 네오테라가 가르치는 사상들이 뿌리부터 잘못되었음을 넌지시 암시해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을 의심하도록 유도했던 것과 정반대로, 이번에는 윤혁이 레이허브로 하여금 자신들 세계의 거짓을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과연 전도자에게는 뱀과 같은 지혜 또한 중요한 덕목이었다.
“혹시 인간들에게 초능력과 권능, 지혜와 초월적 지식, 심취를 유도하는 정신적 감각을 제공해준 자들, 소위 오래된 이들이라 불리는 무리의 진짜 정체가 무엇일지 한 번이라도 논리적으로 고민해보셨습니까?”
레이허브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가르치는 우주의 원리가 실제와는 전혀 다르며, 누군가가 당신들에게 기획된 실험이나 모종의 조작을 가하는 중이라고 의심해보신 적은 없으세요? 당신이 알던 모든 것이 거짓 위에 세워진 탑일 가능성은요?”
그 불안한 진실과 마주한 레이허브는 순간 너무도 놀라,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이에 윤혁은 레이허브가 갑자기 너무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세계를 둘러싼 의혹과 그 증거를 밝혀주었다.
레이허브는 기존의 신념 체계가 산산이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하였다. 자신의 요람이 되었던 세계가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속였다는 생각에 배신감에 휩싸였다. 아울러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그 기초부터 혼동되었다. 사랑했던 초월자에게 배신당한 아픔의 기억마저 사소한 것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윤혁이 겸손히 가르쳐주었다. 사랑이란 욕정도 아니며, 무절제한 관용도 아님을. 나아가 그는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를 소개해주었고 그분의 ‘자기희생의 사랑’을 가르쳐주었다. 아울러 사랑을 논할 때는 온전한 규율과 도덕, 곧 공의의 원칙도 함께 조화되어야 함을 상기시켰다.
또한 그는 종종 네오테라에 초월자가 직접 강림하거나 ‘가이드’를 파견하는 현상의 본질도 새로운 관점에서 재고하게 했다. ‘그것들은 진정한 신적 존재가 아니다. 단지 인위적인 힘을 획득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주께서 언제든지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자 인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조무래기다.’ 윤혁이 제시한 새 관점은 레이허브를 충격의 연속으로 몰아넣었다.
정말로 저 사람이 소개해준 하나님이야말로 상천 하지(上天下地)에 단 하나뿐인 유일자일까? 레이허브는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그녀의 입은 며칠간 굳게 닫혔다. 받은 충격인 너무도 커서 아무런 사고 활동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껏 행해온 초능력 수련마저 모조리 중단하였다. 내면에 끓어오르는 답답한 갈등을 해소하고 싶었다.
불안감이 극에 달한 그녀는 끝내 성경을 펼쳐야겠다는 생각에 빠졌다. 예수님이라는 분에 관한 이야기에 뭔가 단서가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그녀는 루디아와 윤혁이 선물해준 성경책을 펼쳐서 처음부터 읽어내려가며 영적인 씨름을 벌였다. 심령 속의 불안감은 점점 가중되었다. 결국, 그녀는 절대자께 매달려보기로 작정했다. 아직 만나보지도, 알지도 못한 존재를 향해 그녀는 외쳤다.
“좋아요. 저는 당신이 제 소리를 듣고 계시는지, 아니 그곳에 계시는지조차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껏 믿어온 것들이 완전히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워요.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가감 없이 솔직한 마음속 외침을 말했다.
“저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따르고 싶습니다.”
레이허브는 속으로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저에게 참된 진리를 알려주세요.”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골방에서 그녀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간간히 눈을 뜰 때마다 성경책을 펼쳐 읽으며 고뇌하고 씨름하였다. 그 싸움은 질기고 버겁고 무게감이 실린 투쟁이었다.
“제발 저에게 알려주세요.”
어느덧 밤이 깊었다. 레이허브는 지쳐 쓰러질 기색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기 바로 직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실 지금껏 그녀는 초능력을 수련해오면서 내면에 뭔가를 받아들인 경험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그렇게 지금껏 평생 심령에 쌓아놓은 모든 축적물들이 갑자기 스멀스멀 사라지는 게 아닌가. 마치 청소부가 오물을 싹 씻어내는 느낌이었다. 쌓아온 힘의 상실, 그러나 기분은 말끔했다.
‘따뜻해.’
눈을 들고 보니 어떤 따뜻한 힘이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형체는 뚜렷하지 않았지만, 존재감은 선명했다. 전에 그녀가 받아들여 온 힘들은 대체로 자기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가온 힘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치고 들어 오는 외현적인 힘이었다.
‘아냐, 이건 인간이 만들었다던 초능력도 아니고 악령들이 준 힘도 아니야.’
근본부터 다른 존재였다. 따뜻한 존재감이 레이허브의 몸을 덮었다. 순식간에 내면에 웅크리던 쓰레기들이 싹 반출되었다. 더는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것은 시작이요 예비 과정에 불과하다.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을 도우시는 인도하심. 마치 지시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즉시 그녀는 성경을 펼쳐 읽었다. 두려움만 주던 말씀들이 놀라운 위로의 말씀이 되었다.
레이허브는 인간이 왜 죄로부터 구원이 필요한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째서 그녀와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는지, 그분의 부활 사건이 왜 그토록 위대한 사랑의 증거인지 깨달았다. 인간적인 이해나 철학적인 깨우침을 보탤 필요는 없었다. 말 그대로 마음으로 믿어졌다.
‘우리는 지금껏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해내려고 노력해왔어. 그게 이토록 부질없고 헛된 짓인 줄 알았다면 진작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을 텐데.’
레이허브는 영혼의 치유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레이허브의 회심은 윤혁 일행에게는 큰 감동과 위로를 주기에 충분했다. 더 깊은 교제를 나누고는 싶었으나 시간 제한으로 인해 그녀의 가정에만 오래 붙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 일행은 축복과 작별 인사를 남긴 뒤 다시 길을 재촉했다. 레이허브는 큰 선물을 받았음을 고백하며 감사를 표하였다. 그녀가 선물로 보답하려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물질적 성의는 정중히 거절했다.
“정말로 그 기쁨을 주님께 갚고 싶다면 이곳 사람들에게 레이허브 씨가 발견한 사랑과 진리를 널리 알려주세요. 또 대대손손 후손들이 주님께 돌아와 회개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계승해주셨으면 해요. 저희가 바라는 것은 그게 전부에요.”
“물론이에요. 약속할게요.”
이후 윤혁과 루디아는 다른 팀원 둘과 다시 합류하여 며칠간 네오테라 전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레이허브와의 만남은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었음이 분명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지역에서는 썩 만족스러운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기독교의 배타성을 싫어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구원의 필요성을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 그들 스스로 얼마든지 각성과 계몽, 깨우침과 초월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구원이란 게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레이허브에게 하나님께서 손수 내려주신 은혜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둘은, 그리고 그 간증을 전해들은 동료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이르지 않았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곳에도 남은 자들을 세워 믿음을 선물해주시리라는 굳은 확신이 섰다.
44일의 여행 일정을 성실하게 채운 뒤, 선교사들은 활기 넘치는 마음으로 귀환했고 당당히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영혼의 숫자는 더는 중요치 않았다. 한 영혼의 가치도 무한하기에 그 무한한 값 위에 어떤 유한한 숫자를 곱하건 기쁨의 크기는 동일한 무한대일 수밖에 없었다.
후일담으로, 네오테라가 자리한 하늘도시 내부 시간을 기준으로 한참 뒤의 일이긴 하지만, 레이허브의 유산은 견고한 영적 진영을 허물어뜨렸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여러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웃들은 하나둘씩 감화되어 자신 주변에 동일한 은혜 현상을 퍼뜨렸다. 비록 희미했지만, 이러한 회심의 연쇄는 하늘도시 심장부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레이허브의 유지는 대를 이어 꾸준히 전승되었다. 그 영향력은 꾸준히 축적되었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시나브로 바꾸어나갔다.
그리고 네오테라 기준으로 좀 더 먼 훗날, 마침내 세월이 흘러 하늘도시의 초능력이 일시에 사라져버리는 날이 도래하고 말았다. 그때 레이허브의 믿음을 계승한 후손들은 세상 밖으로 당당히 출정하였다. 끝내 인간이 발명한 신앙의 거짓됨이 들통났다. 처음부터 진실은 한 가지뿐이었음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그제야 위축되었던 진리의 권세는 모두 앞에 시대의 증인으로 떳떳하게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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