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34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1. 인터미션 VI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5.25 | 회차평점 0 |
Chapter 51. 인터미션 Ⅵ
우주선으로 돌아온 윤혁은 잠시 혼자서 진과 맞대면하였다. 진은 이제 홀로그램조차도 없이 텔레파시와 음성 통신 장비만으로 말을 걸어왔다. 둘의 관계는 이전의 그 어느 시점보다도 불신으로 가득했다.
사실 이제는 진 입장에서도 칼리드와 반목하면서까지 윤혁 일행을 도와야 할 당위성이 거의 남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게서 기대했던 가시적인 효과는 어느 정도 실험 확인을 마쳤다. 제법 나쁘지는 않았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사람들이 정신적 자유를 얻고 그 자유를 주변에까지 전파하는 경향성은 유발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진이 기대했던 방향의 개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이것을 반쪽짜리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불만은 윤혁도 마찬가지. 애초에 그는 진과는 목표가 달랐다. 우주 인류의 자율성 획득이니 계몽이니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진의 정치적 이상도 애초에 윤혁의 관심 밖이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의 길에 오르게 하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동상이몽으로 시행된 연합이었으니 끝까지 신뢰와 우정이 유지될 리 없었다. 아직까지는 진의 도움과 지원이 필요했기에 윤혁으로서는 손을 내칠 수 없었지만, 더는 진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굳건해졌다.
‘이미 지나온 1차 여행과 이번 2차 여행을 통틀어 총 3년의 기간이 계획되어 있다. 그 계약 기간만 다 채우고 나면 두 번 다시 손잡을 일이 없어.’
만약 그 이후에 윤혁에게 다른 임무가 주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손수 다른 방식을 열어주시고 공급해주실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진에 대한 미련을 깔끔히 내버렸다. 다만, 진의 정보원으로서의 가치만큼은 아직 인정해야만 했다. 그에게는 최상위 초인만이 구할 수 있는 여러 중요 정보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 정보들을 더 얻어내야 앞으로 남은 여정이 수월해진다. 그렇기에 윤혁은 불편하더라도 참고 상대와 대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담판은 나 혼자서 맡는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해도 이 부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진은 윤혁 이외의 팀원과는 정보를 교류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에게는 리온도 루디아도 무의미한 존재. 그가 오로지 관심을 두는 대상은 카이젤의 이복동생인 강윤혁, 그리고 이레귤러인 스테판, 단 두 명뿐이다. 그중 후자는 사실상 실험체 취급이고.
“조금 기분이 상한 상태로 보이는군요.”
“텔레파시로 제 생각을 읽을 수 있으니 그 이유도 알 수 있을 텐데요?”
“원거리에서는 시행하기 어려워서요. 애초에 정신 간섭용 채널이 아니라 일방적인 대화만 나누는 채널이기도 하고요. 설령 능력이 먹혀도 반지의 힘까지 당신한테 있으니 그걸 뚫기란 불가능하겠죠.”
듣던 중 다행이었다. 윤혁도 진에게 생각을 읽히는 건 원치 않았으니까.
“여전히 초능력 시스템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으시군요.”
날카로운 어조로 윤혁이 본질적 문제를 찔렀다.
“물론입니다. 제가 그래야 할 의무는 없죠.”
쇠귀에 경 읽기였다. 진은 양심에 흔들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알겠습니다.”
윤혁은 깔끔히 그 문제에 대한 미련은 포기했다. 정말 범인이 형이고 그 아랫사람들이 죄다 연루되었다면 누가 추궁하고 책망할 방도가 있겠는가. 어차피 윤혁이 이번에 답을 기대했던 부분은 다른 쪽이었다.
“초인들은…, 종종 하늘도시에 내려가 그곳 주민들과…….”
“그곳 주민들과 뭐요?”
윤혁은 조금 말하기 민망한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성관계를 맺기도 합니까?”
“…….”
속으로 작게 툴툴거리며 윤혁은 고개를 돌렸다. 왜 이 따위 것을 묻고 있어야 하는지 자신의 처지에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레이허브의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부부관계를 맺었다던 문제의 초월자, 아니 ‘강림자’, 그는 해당 하늘도시 출신의 인간이 아니었다고 했었다. 루디아가 레이허브를 상담해주고 있었을 때는 잠잠히 곁에서 듣고만 있었지만, 그때 윤혁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초인들이었다. 이제는 따져 물어야 했다. 레이허브와 만난 초월자는 U-society 출신의 초인이었으리라는 확신이 반쯤 들었다.
‘이런 이상한 질문에는 당연히 묵묵부답이겠지?’
하지만 소소한 반전이 일어났다.
“왜 그걸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긴 합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대답이 돌아오자 윤혁은 번뜩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요?”
“네, 그렇습니다. 위대하네 초월적이네 어쩌네 한다지만…, 아무래도 우리도 결국은 인간이니까요. 그것도 엄청난 권세와 부를 지닌 인간들이죠. 그리고 우리에게도 욕정이란 게 존재하고요.”
사실 인류가 아직 지구 밖으로 진출하지도 못했던 시절만 돌아봐도 권력을 지닌 상류층이 많은 파트너와 성관계를 나누는 일은 일상사였다. 대중 앞에서는 갖가지 고상한 척을 다 하면서 뒤로는 그런 문란함을 벌였던 것이다.
하물며 U-society의 초인들은 어떨까. 광활한 초은하단들을 통틀어서 고작 백만 명 남짓한 극소수 정예 엘리트. 한 명 한 명이 이전 시대와 차원이 다른 부와 권력을 소유한 자. 이런 자들의 발밑에 마침 거대한 인구의 식민지까지 밥상으로 차려져 있으니 정욕을 풀어대기에는 안성맞춤이었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
윤혁은 정죄하고픈 욕구를 삭였다. 무작정 도덕적 우열 나누기를 앞세우긴 싫었지만, 이렇게 책임감 없이 아랫도리를 놀리는 자들에게는 도무지 좋은 평가를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시대를 이끄는 자를 자처하던 자들의 실체인가. 그런 주제에 지도자에 합당한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한단 말인가.
“꽤 역겨우신 모양입니다.”
“아니요, 이젠 딱히 더 실망할 구석도 없어서요.”
이미 우주 인류의 역사와 사회를 떡 주무르듯 조작하고 간섭하는 실태를 본 시점부터, 윤혁은 초인이라는 작자들에게 일반적인 도덕 기준을 적용하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들이 정의하는 윤리는 인간의 것과 다른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형이 그런 작자들의 우두머리이니 욕을 먹는다면 그가 가장 많이 받는 게 맞겠지.
‘그래도 최소한 형은 경박하게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리진 않잖아.’
물론 그의 경우는 ‘할 수 없다’라는 표현이 옳겠지. 불쌍하기는 해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덕분에 골치 아픈 괴물 조카는 딱 일곱 명만 상대해도 될테니까. 수천 수만 명보다는 낫지 암.
“뭐,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저는 아직 그런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입양된 순간부터 정략결혼 이외의 모든 만남은 금지되었거든요.”
진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딱히 비난한 적도 없지만, 궁금하지도 않습니다만.”
“상호 간에 역겨움은 덜 느끼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대답은 청산유수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 정말로 정욕만 충족시키고 여자들을 내다 버리는 일이 그렇게 흔하게 발생합니까? 현 초인들도 90% 이상은 우주 인류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엄연히 동포들 아닙니까? 개구리가 올챙이 때 생각을 못 한다더니 우주 태생의 초인들도 그런 겁니까?”
발끈한 윤혁은 다소 차갑고 냉소적으로 쏘아붙였다.
“마냥 즐기다 버리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여러 룰이 있습니다. 그 룰에 따르면 식민지 주민 출신 상대를 한번 수태시키면 반드시 그 혹은 그녀에게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정도로 풍족한 물질적 보상을 해야만 합니다.”
하긴 레이허브도 분명 많은 돈을 받았다고 들었다.
“아니, 이봐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무책임하게 임신시키고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으면 아이를 양육하고 책임져야 할 것 아닙니까? 아무리 문란한 관계였다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잖습니까? 아이에게 불쌍하지도 않아요?”
“어차피 그렇게 생성된 아이는 타임필드 안에 갇힙니다. 책임지고 싶어도 불가능하죠. 초인도 고압축의 타임필드 안에 직접 들어가 연속 200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면 정신적 타격을 받습니다.”
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히 맞받아쳤다.
“뭐, 나중에는 그 문제도 해결되긴 하겠지만, 어쨌건 현재로서는 무한에 가까운 농축 시간을 연속으로 견딜 수 있는 존재는 초인 중에서도 아버지와 그 ‘삼인방’과 그 ‘형제’뿐입니다.”
그 와중에 흘린 정보는 다소간에 흥미로웠다. 잘 기억해두면 훗날 어떤 용도로 쓰일지는 몰라도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윤혁은 슬쩍 기억 속에 그 말들을 새겨둔 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잘난 당신네는 세계 중앙부에서 정치, 경영, 연구 같은 고귀한 일들을 이어나가야 하니 시골 지역에 남겨둔 사생아들은 내팽개치시겠단 말씀이죠. 세상에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왜 애를 만든 거죠? 음란을 못 참겠으면 피임이라도 하셨어야죠?”
“확실히 현시대에는 100%의 피임기술이 존재합니다만….”
여기서부터는 진도 조금 머뭇거렸다.
“애초에 그 행위가 정욕만 풀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라서요. 그것도 부차적이겠지만…, 하늘도시에 내려가서 관계를 맺는 초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애초부터 자신의 씨앗을 최대한 퍼뜨릴 목적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한층 더 어이가 없어진 윤혁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게 말인가 방귀인가.’
기가 막히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 잘나고 우수한 유전자들을 퍼뜨리시려고요?”
“네, 그렇습니다.”
“…….”
농담삼아 비아냥거린 말인데 정확한 정답을 맞춰버렸다. 윤혁은 지끈거리는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윤리야 기대하진 않았으나 최소한 초인들만 아는 어떤 신박한 사정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저 이기적 유전자 때문이었다니.
“초인의 자손은 초인으로 각성할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더 높습니다. 당장 아버지만 해도 2세대 초인 중 상위권이었던 눈의 여왕에게서 태어나셨죠.”
오늘날의 3세대 초인은 백만 이상. 그중 90%는 우주 인류 출신이 후천적으로 각성한 경우이다. 아마 그렇다면 초인은 아니되 초인 후보자였던 자를 센다면 훨씬 숫자가 더 많아지리라.
문득 초인 후보자에 생각이 미치자 궁금해졌다. 후보자를 생성해낼 가장 확실한 비결은 무엇일까. 아무리 우주 인류의 숫자가 많다고 해도 백날 우연에 의존해 기다리기란 효율이 좋지 않다. 우수한 유전자가 우연히 조합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초인이 직접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는 편이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초인은 선천이든 후천이든 오로지 각성이 필요충분요건이기에 부모가 초인이라고 해서 자녀가 꼭 초인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일반인에게서도 초인이 태어나고, 초인에게서도 일반인이 흔히 태어나죠.”
하긴 윤혁도 초인의 육체를 지닌 성한에게서 태어난 일반인이다. 물려줄 천재적 두뇌야 없었다고는 해도 몸은 엄연히 최상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혁의 몸은 일반인의 기준에서 조금 건강한 정도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물리적 유전 법칙이 아예 적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초인이 아이를 낳으면 엄연히 일반인 기준에서 우수한 종자가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 건 일반적인 사실이 맞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장래 세대의 후보자를 얻어보겠다고 일일이 자기 씨를 퍼뜨리고 다녔던 겁니까? 인류애라는 명목으로? 참 눈물 겹기도 하네요. 뭐, 생각보다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보입니다만.”
윤혁의 비판에 진은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토로하였다.
“기본적으로 초인의 육체 고유 특성에는 불로에 가까운 젊음, 완벽에 가까운 항상성, 강한 회복력, 독과 질병과 병원체에 대한 탁월한 저항력만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을 매혹시키는 매력, 미적으로 완전한 신체 비례와 외모도 기본으로 갖춰진 속성입니다.”
“어쩐지 죄다 미남 미녀뿐이었더니.”
“더 나아가 재생산 기능의 우수성도 포함됩니다.”
“네?”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잘못 들은 건가?
“재생산 기능이라면?”
“남성 초인 개체로 예를 들자면……, 본능적으로 상대의 수태 주기를 감지하는 감찰력은 기본이죠. 더욱이 상대방을 함락시키기에 적절한 완벽한 신체조건, 괴물 같은 체력과 정력, 그리고 기하급수적인 수태 성공률을 자랑하죠. 여성 측에 난임 요소만 없다면 99% 이상의 확률로 수태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말하자면 궁극의 번식력을 지닌 종족인 셈이었다. 기본적으로 아무리 체력이 약하고 부실한 초인이라도 여자들의 생리적 조건만 갖춰진다면 하룻밤 사이에 여럿과의 관계로 수백 명 이상의 자녀는 거뜬히 만들 수 있단다. 그것도 한 두 번 성공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높은 재현성을 지닌 능력이란다. 몹시 황당하다 못해 기겁할 지경이었으나 진은 장난기 하나 없이 태연한 어투였다.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거짓말로 제 종족을 모함할 이유는 없죠.”
‘그것참 이상하네. 우리 형은 변종인 건가?’
윤혁은 고민에 빠졌다. 재혁이 부상당하기 이전부터 이미 남성으로서의 기능이 형편없었다는 사실은 본인의 입으로 직접 몇 번이나 들었다. 최고로 우수한 초인의 육체를 소유했으면서 왜 그럴까? 잠시 의아했지만, 윤혁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이므로 신경을 껐다. (훗날의 일이지만 그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기고 간과한 게 심각한 착각이자 실책이었음을 알게 된다)
윤혁은 진에게서는 더 얻어낼 정보가 없겠다고 판단하여 통신을 종료했다.
“뭐, 도덕적 기준이 우리와 다른 것인지, 아니면 욕망과 이익에 충실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임감을 모른다면 염치라도 알길 바랍니다. 종족 전체에 전해주고 싶은 말인데 불가피하게 당신한테 떠들게 되어 미안하네요.”
통신을 끊기 전 마지막 쓴소리로 마무리했다.
“귀담아듣도록 하죠. 제가 듣는다고 의미는 없겠지만요.”
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차피 그와는 상관 없는 문제였다.
(다음 회차에 계속)
이전회
333회 하늘위의도시들 Ch 50. 낡은시대와 새로운시대 (4) |
다음회
335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1. 인터미션 VI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