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48회 하늘위의 도시들 Ch 53. 하이퍼스페이스의 기원 (5)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6.26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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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온은 이들의 이론을 보고 데자뷔를 느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지구인들의 진화론과 똑같아.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론적 체계성이 훨씬 더 우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하이퍼스페이스에는 지구와는 달리 외계 생명체라는 샘플이 무수히 널려있었다. 여러 외계 아일랜드를 점령한 테라 아일랜드 인들은 각 정복지의 화석은 물론이고 여러 진화 중간 단계들을 발견했다. 이는 이론이 정설의 단계로까지 승격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윤혁이 보여주었던 자료대로야. 외계 생명체가 저토록 변화무쌍하고 다양하게 존재하니 진화론이 극한까지 발달할 수밖에 없었겠네.’
과거 지구의 진화론이 노래 한 소절만 하고 끝난 격이라면 테라 아일랜드는 무궁무진한 자료와 실험체들에 힘입어 일련의 ‘오페라 시리즈’를 만든 것만 같았다. 하기야 통상의 DNA 이외의 것을 유전물질로 사용하는 생명체부터 아예 탄소 기반이 아닌 생물들도 발견했고 나아가 전혀 다른 물리법칙을 적용받는 생명체까지 찾아내었으니 이해는 충분히 가능했다.
‘저토록 각양각색의 인공생명체들을 발굴해댔으니, 게다가 그것들을 외계의 존재라고 믿었으니……, 우연의 연속과 억겁의 세월만 주어지면 자연발생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으로 귀결되었겠지.’
이번에도 본의 아니게 인류연합이 식민지 주민들을 미혹하게 된 꼴이었다. 이 경우는 일부러 속인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자기 스스로 넘어진 격이니 미혹이라는 표현은 과장이려나. 한편으로는 정말 고의가 아니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여하튼 테라 아일랜드의 자연발생 이론은 대단히 복잡했다. 갖가지 유형의 생명체는 물론이고 정보 생명체같은 인위적 진화를 유도하는 종마저 동일 세계관 내에 존재하니 이를 해석하려면 이론의 분량이 비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 이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근거 자료도 넘치도록 공급되니 사람들의 자가당착은 피드백 없이 점차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생물 잔해? 실상 인류연합이 실험 실패작들을 폐기한 흔적이겠지.’
한 번 답을 마음 속으로 정해버리고 근거들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쳇바퀴를 도는 법. 과거 지구에서도 인류는 화석을 자연 대진화의 근거로 끈질기게 붙들었다. 조금만 사고의 틀을 넓혀 보면 도리어 홍수에 의한 대멸종을 시사하는 결정적 증거임을 볼 수 있었을 터.
이렇게 보니 인간의 어리석음은 지구에서나 테라 아일랜드에서나 별 다를 바 없다는 감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경우 인위적인 우주에 갇혀 오랜 세월을 보낸 탓에 진리를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점을 감안해야 했다. 리온은 넓은 아량을 품고 대답해주었다.
“당신들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점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이토록 정교한 구조물들인 생명체와 우주가 아무런 지성적 작용없이 순전한 우연으로만 형성되는 것이 가능키나 할까요. 혹시 당신들은 부족한 자료만 갖고 무리한 추측을 한 게 아닙니까?”
잠깐 침묵이 흘렀고 리온은 계속해서 변증을 이었다.
“비록 진정한 신에 대해 듣지 못한 당신들이라지만……, 최소한 마음속 한 구석에는 이런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토록 완벽한 작품들이 우연히 발생할 수는 없다.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창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피조된 존재들이 이를 알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는 무리하게 논쟁을 이끌기 전 가장 기초적인 질문들부터 던졌다.
“저는 그 창조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사는 곳과 제가 살던 곳은 조금 물리적 조건이 다릅니다. 여러분의 조상은 오래 전 우리에게서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하이퍼스페이스와 아일랜드는 인간들이 조물주의 작품을 모방하고 조작해서 구성해낸 인위적 장소입니다.”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진실들을 전했다.
“그렇기에 여러분을 둘러싼 환경과 물리법칙은 원래 인류의 고향과는 조금 다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 애써 탐구해도 헛수고를 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였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들 상황에 놓였더라도 똑같았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꺾기보다는 존중을 보이는 것이 토론의 정석.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진실을 밝힐테니 여러분도 참된 창조주가 누구인지 알 기회를 누릴 것입니다. 그분은 이곳 테라 아일랜드의 인류는 물론이고, 그 뿌리가 되는 지구 인류, 나아가 자연 만물과 존재하는 모든 요소를 오로지 무(無)에서부터 말씀만으로 지어내신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리온은 창세기의 기록, 성경의 하나님, 인류의 타락과 구원,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밝히 설명하였다. 그런데 한참 후 예상치못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생전 듣지 못했던 이야기에 경악하며 충격을 받는 대신 매번 듣던 뻔한 이야기를 상대한다는 투로 학자들이 비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푸하하하하하.”
“난 또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네.”
“창조주 이야기라니, 너무 레퍼토리가 뻔한 것 아닌가.”
“이번 외계인, 아니 자칭 외계인인가? 아무튼 이 녀석들은 해도해도 너무할 정도로 창의성이 부족하군. 최근 10년 간 별의별 기발한 우주 설계론들이 판을 쳤는데 말이야. 식상해도 지나치게 식상해.”
그러자 리온은 당황하여 얼굴을 굳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이어서 들려온 둔탁한 한 마디.
“게다가 저자의 이야기……, 이미 사장되긴 했지만 백년 전까지만 해도 꽤 믿는 사람들이 많았었지. 컬트에 속아넘어간 반지성주의자들. 하긴 지금처럼 문명화된 시대에는 완전히 소멸되었지만.”
결정타를 맞은 리온의 표정이 의연함과 결의를 잃고 당혹으로 흔들렸다.
“뭐라고요?”
이미 성경 이야기가 이 땅에 전해진 적이 있었다고? 분명 윤혁이 하늘도시들은 기독교적 문화와 완전히 단절되어 생성된 세계들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던가? 이건 무슨 조화로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
다른 곳에서도 심문이 진행 중이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우리는 외계인들이 테라 아일랜드의 생태계 진화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학자들이오. 혹은 최소한 외계인이 우리 문명 발전 과정에 여러 번 간섭했다고 믿고 있소. 아직까지 그런 일을 할 급수의 외계 문명과 조우하지는 못한 점이 아쉽지만 말이오.”
학자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루디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저기……,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니까 혹시 그대들도 외계에서 우리를 현혹하려는 목적으로 파견된 사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대의 종족이 테라 아일랜드 자연발생 진화의 미싱링크를 설명해줄 단서인지 묻고 싶습니다.”
한층 더 복잡해진 설명에 루디아는 머리가 핑글 도는 기분을 느꼈다.
“아도나이.”
“……네?”
익숙한 용어가 들려오자 루디아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당신들이 어떻게 히브리어로 된 주님의 존함을 아시죠?”
“이성주의의 시대가 이르기 전 우리 사회에도 많은 신화가 있었소. 대부분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장되었지. 특별히 하이퍼스페이스의 개척과 함께 말이야. 하지만 외계 생명체가 실제 발견되자 학계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소. 혹시 우리보다 더 고도로 진화한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이 머나먼 과거, 우리의 생물학적 조상들과 어떤 상호작용을 나누지 않을까 하고 말이오.”
한 과학자가 이렇게 증언했다. 그러자 다른 동료도 덧붙였다.
“과거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출처를 모르는 사교(詐敎)가 유행한 적이 있었지. 누가 퍼뜨렸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산불처럼 번져나가 테라 아일랜드를 거의 잠식했었어.”
의미심장하고 의문스러운 이야기.
“내가 알기로는 그런 종류의 사교(邪敎)가 천 가지도 넘게 있었지만 대부분 금세 없어져버렸지. 하지만 외계 종족이 발견되면서부터 일각에서는 다시 재평가의 의견이 나왔어. 혹시 그 종교를 만들어낸 주체가 외계인은 아닐까? 그들이 말하는 ‘신’이란 혹시 인류 문명이나 인류 진화에 관여한 외계인이 아닐까하고 말야.”
“참고로 아도나이라고 불리는 전지전능적 존재를 섬긴다는 사교도 있었지.”
난데없는 말들에 루디아는 바쁘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거지? 물론 지금껏 인류연합 측에서 하늘도시에 기괴한 종교를 퍼뜨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과거의 이곳에서도 아마 어떤 형태로든 거짓 종교는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도나이, 그러니까 주님을 섬기는 종교가 있었다니. 하늘도시는 히브리적 문화와는 단절된 세계 아니었던가?
“혹시, 그들이 예슈아(Yeshua)의 이름을 부르던가요?”
“흐음,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그런 이름도 언급되었던 것 같군.”
환희와 의혹과 두려움이 동시에 루디아에게 임했다. 이곳 기준으로 수천 년인지 수만 년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최소한 한 번 이상 기독교 내지는 그 유사한 영향력이 거쳐갔던 곳임이 분명했다. 여행을 하면서 이 같은 일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인류연합 측에서 복음을 전할 리는 없다. 그리고 식민지들은 지구와 단절되어 있기에 문화 교류가 존재했을 여지도 전혀 없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출발한 선교팀들 중 하나……, 혹은?’
혹 우리팀이 거쳐갔었던 세계 중 하나가 이곳일까?
‘수십 번씩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 확실히 세계의 모습이 달라지겠지. 못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하지만 통계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후원자의 정보를 증언해준 윤혁의 말에 따르면 우주에 존재하는 하늘도시의 개수는 억 단위가 넘는다고 했다. 선교팀을 다 끌어모아봐야 수천 팀 밖에 안되고 윤혁 팀이 거쳐간 장소도 기껏해야 두 자리 수에 지나지 않는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같은 하늘도시를 중복해서 방문할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떻게 된 거지?’
한편, 윤혁은 진중한 표정으로 폭탄 발언을 내뱉을 준비를 했다.
“저는 제 친구들처럼 신사답게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재주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고자 합니다. 당신들은 수백 년간 속았습니다. 그대들이 자랑하는 우주와 생명의 역사에 대한 이론들은 전부 모래 위에 쌓은 성이며 헛수고이고 거짓부렁입니다. 저 위의 교활한 관리자들에게 속으셨습니다.”
거침없이 발언을 쏟아붓는 윤혁 앞에서 홀로그램 형상들이 술렁거렸다.
“정 불만이시면 증거도 말씀드릴까요. 쉽게 안 믿으려 하시겠지만.”
윤혁은 여유롭게 팔짱 낀 채 웃으며 말했다.
“무슨 근거로?”
“하아, 근거요? 저희가 증인으로 직접 말하는 데 뭘 더 증명하라는 거죠? 당신들은 지금껏 초자연적 영역을 아예 배제한 채 만물을 설명했잖습니까. 그게 얼마나 논리의 비약인 줄 아시죠?”
그는 부드러운 설득보다는 충격 요법으로 불특정 다수를 공략했다.
“혹시 당신들이 우주의 전부라고 믿었던 하이퍼스페이스가 한낱 인공물에 지나지 않는걸 아십니까? 당신이나 나와 같은 인간들이 지금 이곳보다 몇천 배 이상 발전된 기술력을 이용해 인공 공간을 여럿 만들어내었습니다. 창조주의 피조물을 짜깁기해서 만든 모방작이자 아류작에 지나지 않긴해도 대단한 솜씨인건 맞죠.”
“아니 그게 무슨!”
“더 충격적인 점을 가르쳐드릴까요? 그 인간들께서 자신과 같은 동족을 양식장의 물고기처럼 배양하기 위해 거대한 감옥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시간과 공간은 물론 사람들의 정신마저도 조작해버렸습니다.”
“그 피해자가 우리란 말이오?”
윤혁은 못 믿겠으면 어쩔것이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들이 자신을 쉽게 해치지 못하는 것을 알았기에 더욱 거침없게 행동했다. 사실 호응과 동의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거기에 집착할 의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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