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55회 하늘위의 도시들 Ch 55. 공중부양하는 촉수물체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7.13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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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공우주 저편의 다른 곳에서는.
“융숭한 대우에 감사드립니다, 총사령관님.”
“아닙니다, 저야말로 훌륭한 동무를 만나게 되어 기뻤습니다.”
외계인처럼 생긴 인공생명체 종족에 소환당해 실험체처럼 묶여있었던 윤혁과는 달리, 리온은 휴먼연맹 소속 총사령관 닐이 호령하는 이동 요새에 소환된 덕에 나름대로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아무래도 외관상 유사한 종족이어서 그랬으리라 추측되었다.
때마침 휴먼연맹도 대대적인 연합군을 구성하던 참이었다. 조만간 역사상 최초로 휴먼 계열 종족 전원이 한 뜻 하에 연합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 구현되리라는 기대에 대원들과 군인들은 몹시 들떠있었다.
“축제 분위기네요. 전쟁을 앞두고 있다면서…….”
“공공의 적이란 두렵지만, 동시에 분열된 세력을 하나로 뭉치도록 해주죠.”
닐은 오히려 이 상황이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공중부양하는 촉수 물체, 외계인들에게서 전해 들은, 소문의 그 사악한 우주적 존재……, 놈이 우주 역사에 간섭해 분란과 파괴를 줄곧 조장해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끝내 우리는 연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닐 총사령관은 휴먼 계열 종족들이 걸어온 기나긴 역사에 관해 들려주었다.
별을 보고 깨어났다는 식의 신화 식 역사가 전승된 이종족들과 달리, 휴먼 족은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 명료하게 아는 바가 없었다. 대체로 천년 이내의 짧은 역사를 소유한 외계인들과 달리, 휴먼 계열 종족은 유독 역사가 길었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 중간중간 뭉텅 잘려나가거나 조작된 부분이 많았고 사람들의 기억도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되고 변형되는 바람에 미싱링크가 상당히 많이 존재했다. 특히 최초의 기원이 무엇이냐의 문제는 더더욱 오리무중이었다.
휴먼 족이 수천 년 전부터 몇 차례씩이나 우주에 진출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여럿 있었다. 몇 차례라 표현한 이유는, 소위 ‘미싱링크’라고 불리는 의문의 사건에 의해 종종 문명이 리셋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셋으로 말미암아 기껏 이룬 우주로의 진출은 백지화되었고 휴먼 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재도전해야 했다. 대체로 리셋 시점 부근의 역사는 고고학적 기록 자료가 공백 상태였다.
어떤 천체물리학자는 미싱링크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주 전체의 구조도 같이 변질하였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물리학적 관측 자료를 발표했지만, 학계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여하튼 역사적 패턴을 요약하면 이러하였다. 보통 미싱링크 사건이 일어나고 백여 년이 지나면 휴먼 족의 리셋된 문명 수준은 충분히 회복되어 행성 하나를 통째로 관리할 만큼은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나면 우주로 진출할 만큼 기술력과 세력이 향상되었다.
이렇듯 잦은 리셋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하리만큼 빠르게 회복되는 문명 굴곡 패턴에 관해 일부 역사학자들은 의심을 품었다. 그들은 문명을 관리하는 모종의 우주적 존재들의 개입을 의심했다. LTO는 그 대표적 용의자였다.
“LTO라고 부르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리온이 질문하였다.
“만일 그걸 알았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단서를 찾아다니지는 않았겠지요.”
닐은 고개를 저으며 타들어 가는 심정을 내비쳤다.
“아무튼, 휴먼 족은 여러 차례의 미싱링크 사건을 거듭 반복하면서 우주 전역의 행성들로 흩어지고야 말았죠. 잃은 터전이 워낙 많고 새로 얻은 터전도 많다 보니 우리의 진짜 고향이 어딘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기야 역사가 지워져 버렸으니 그렇겠네요. 기껏 우주로 진출해 거주지를 넓힌 뒤 또다시 미싱링크 사건이 벌어지면 기존에 뿌리내렸던 곳의 역사는 지워지고 새로 이주했던 행성에 토착민으로 남아 재시작하게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이런 일이 수차례 반복되어 지금의 떠돌이 족이 탄생했죠.”
지난 수백 년 사이에 전개된 휴먼 계열 종족들의 역사는 상당히 복잡했다. 행성 내에서 연합이 형성되어 외계로 진출하였고, 그러다가 영토가 넓어지면 다시 분열하였다. 때로는 분열되었던 세력이 다시 손을 잡아서 하나의 연맹을 만들기도 했지만, 반대로 연합된 세력의 분쟁도 빈발하였다.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승자는 패자의 세력을 흡수하여 덩치를 키웠다.
이렇게 화해와 통합의 분위기가 나타나다가도 금세 분열과 다툼이 벌어지며 지리멸렬한 역사가 거듭되었고 여기에 백여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리셋과 회복도 역사의 복잡성에 양념을 더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부 세력은 자연선택에서 밀려나 멸종하였고 일부는 기를 쓰고 세력을 재건하여 부흥하였다.
“그런데 멸종이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군요.”
의문점이 경청하던 리온의 뇌를 스쳤다.
“휴먼 족은 하나의 종이 아니란 말입니까?”
다른 의문도 들었다. 분명 하늘도시의 주민들은 마음대로 죽을 권한이 없다고 알고 있거늘. 멸종이란 어떻게든 개체가 죽어야만 성립되는 개념 아닌가? 무덤 가의 사건을 통해 ‘동면’이란 시스템을 알게 된 리온 입장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닐이 알 리가 없으니 우선은 한 가지만 질문하였다.
“흠, 설명하기 곤란하군요. 사실 휴먼 ‘계열’이라는 용어에서 대강 짐작하셨겠지만, 사실 우리 휴먼 연맹을 이루는 종족들은 겉모양만 비슷하지 하나의 단일 종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랍니다.”
닐 총사령관은 휴면 계열 종족들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지 기나긴 역사를 들려주었다. 단순한 ‘민족의 분화’ 같은 개념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아예 근원부터 다른 종족들이 서서히 서로를 닮아간 끝에 하나의 복합 군집체를 이루게 된 것에 가까웠다.
이 이야기를 듣고 리온은 즉각 이전에 사부와 재회했을 때 보았던 하이테로 대륙의 이종족들을 연상했다. 그들도 분명 인간, 이종족, 인공생명체, 기계 등 다양한 근원에서 시작되어서 모종의 이유로 동질성을 띠게 되었었지.
차이가 있다면, 휴먼 연맹은 하이테로 대륙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게다가 이미 서로 간의 혼합이 심하게 진행되어 있었다. 리온은 가정법으로 생각해보았다. 만일 일행이 티아라를 막지 못해 그녀의 종교 통합 정책이 잘 먹혀들어서 하이테로 대륙 전반에 대대적인 연혼(連婚)이 발생했더라면 어땠을까. 여기에 더해서 그 근방에 있었던 알즈바툴 대륙의 왜곡된 성 체계의 영향까지 녹아들었다면?
필시 그 결과물로 온갖 끔찍한 혼종들이 출현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휴먼 연맹의 역사 속에서도 유사한 시나리오의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휴먼 계열 종족들의 기원을 나누면 크게 두 부류입니다.”
첫 번째, 기존 휴먼 족과 접촉한 낯선 외계 종족이 휴먼 속성을 서서히 흡수해 휴먼을 닮아간 경우이다. 이렇게 변모한 종족은 기나긴 세대에 거쳐 발전했고 끝내는 휴먼 족과 혼인이 가능한 개체들을 낳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휴먼화된 종족들은 본 종족에서 따로 떨어져서 휴먼 족과 어울려 지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이들은 유사휴먼 종족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이들은 나중에 혼혈까지 창출해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현재 정통 휴먼을 자처하는 자 중얼마만큼이 정통이고 얼마가 혼혈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지경이라고 한다. 뿌리가 외계인임에도 자연스럽게 섞여들어 간 이들도 워낙 많았기에 현재의 휴먼의 유전자 풀(pool)은 혼잡 상태라고 한다.
“휴먼 계열끼리의 갈등이나 분열은 없었습니까?”
“당연히 처음에는 이런 이질성 때문에 서로를 인간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심지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던 경우도 있었죠. 자기들야말로 더 우수하므로 진짜 인간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다행히 지금은 화해와 통합의 시대로 접어드는 추세이지만 말이죠.”
그나마 위에서 언급한 외계인의 섞임만 존재하면 다행이려니와, 두 번째 경우는 더욱 끔찍했다. 2차 선교 여행 첫 선교지의 제3구역에서 보았던 것처럼, 혹은 지구에서 펼쳐졌던 혼돈의 시대 때처럼,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생체 실험 결과물들이 아예 새로운 종족을 이루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과연 역사는 반복되었고 인간이 품은 죄악의 본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휴먼 족들은 정통 출신이건 이종족 출신이건 너나 할 것 없이 생체 실험을 범하여 온갖 작품을 지어내었다. 유전자 조작, 클로닝, 세포 단위 재구성, 분자 변형, 이종족과의 융화, 인조인간 실험, 호문쿨루스, 사이보그 제작 등 갖가지 기괴한 악업들이 폭주하였다.
그 결실로 태어난 실험체 중 일부는 폐기물이 되어 비참히 버려졌고, 일부는 실패작 취급을 당하며 사회적 차별과 편견 속에서 평생을 보냈다. 일부는 치열하게 싸워서 권리를 쟁취한 끝에 사회 속에 녹아들었지만, 반대로 일부는 인간 세계에 반역하여 큰 반목을 낳아버렸다.
차차 자체적인 생식기능을 획득한 이들이 늘어났고 심지어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방법을 익힌 유사 휴먼들도 탄생했다. 이 같은 일들이 축적되자 존엄성은 땅바닥까지 떨어졌으며 혼돈은 극한에 달했고 싸움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결국, 다툼이 진정되고 화합의 추세로 이어져 상처가 봉합된 현재에도 휴먼 연맹에는 불명예의 흔적으로서 세 부류의 스펙트럼으로 나누인 계층화가 영구적으로 남게 되었다.
스펙트럼의 첫째 카테고리로, 먼저 휴먼으로 인정받는 종족들이 있다. 물론 이들 가운데에도 정통 순혈 휴먼만 있지는 않았다. 기원을 알 수 없는 무리, 최근 외계 혹은 실험체 출신으로 합류했으나 정식 인권을 획득한 자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어쨌건 이렇게 휴먼으로 인정된 자들은 정신, 육체를 포함해 모든 측면에서 이미 휴먼과 구분이 어렵게 된 자들이었다.
반면, 이질성이 아직 커서 울타리에 섞이지 못한 이들은 ‘유사 휴먼’으로 분류되었다. 이들이 둘째 카테고리였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 기계, 전투 병기, 박테리아 조립체, 실체화된 유령, 실체화된 사이버 캐릭터 등은 워낙에 이질성이 크고 기원부터 명료하게 달랐기에 비(非) 휴먼으로 분류되어 노예로써 부려졌다.
‘심각할 정도로 추락했군.’
모든 사정을 듣고 리온은 이렇게 평을 내리며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그는 지구의 인간들이 행해온 실책들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악하다고 믿었다. 아울러 이러한 생체 실험과 인공생명체, 인공지능 제작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시켰던 제3구역의 점령자나 그를 일부러 풀어놓아 활용했던 인류연합의 비겁함과 교활함도 미워했다.
그런데 인류연합이나 여타 초인의 간섭이 없는데도 식민지 인간들 스스로 그보다 훨씬 더 악한 역사를 재현할 줄이야. 하다 못해 인류연합은 인간 관련 실험에 금기 규칙이라도 세워두었지, 휴먼 연맹은 아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는지 완전한 혼돈의 역사를 창조해내고 말았다.
‘훗날, 현 우주 인류가 분열한다면 저런 전철을 밟게 될까?’
어쩌면 그때에는 이보다 훨씬 더 악랄한 일들도 자주 보게 되리라. 영토도 기술력도 모두 휴먼연맹보다 압도적으로 강대하니까. 인간의 추악함이 얼마나 짙은 잠재력을 지녔는지 다시금 느꼈다. 휴먼연맹이 분열을 딛고 융화한 것도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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