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59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6. 승천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7.22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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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아는 다른 질문을 던져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면 정보생명체와의 싸움에서 휴먼 족이 어떻게 전황을 바꾸었죠?”
“앞서 내가 했던 말과 관련이 있어. 이종족들도 종종 악한 면과 선한 면을 동시에 보이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 속의 ‘절대적인 흔적’이 불완전했기 때문이야. 그렇기에 이종족에게 있어서 선악이란 개념은 ‘섞이지 않는 독립된 혼합’으로 비유할 수 있어. 흰 구슬과 검은 구슬들이 뒤섞인 그릇처럼.”
“그럼 인간은요? 그들은 다른가요?”
“달라. 휴먼 족의 내면의 내용물, 그것은 선과 악의 ‘온전한 화합물’이야. 때로는 그 내용물이 한없이 투명한 선의 모양으로 화할 수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한없이 사악한 악으로 화할 가능성도 있지.
그렇기에 휴먼에게서는 선한 면과 악한 면을 칼로 자르듯 분리해낼 수 없어. 액체와 액체가 섞인 그릇처럼 모든 부분이 오염되어 있지.”
놀랍게도 루디아는 이번에도 에슈타르의 말을 곧장 이해하였다. 워낙 형이상학적이고 복잡다단한 비유였으며 과학적 개념까지 동원된 설명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인형의 신경 회로가 빠른 두뇌 회전을 도와서인지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그 이전에 루디아에게 성경적인 도덕관 개념이 잘 정립되어 있어서 그렇겠지만.
‘죄로 인해서 철저히 부패한 인간 영혼의 본성을 말하는 모양이네.’
누구에게나, 심지어 지극히 선량한 인간에게조차도 끔찍한 악인으로 화할 잠재성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무한대의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본래 가장 거룩하고 귀한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반동으로 타락했을 때 나타난 추함 역시 정도가 대단히 컸다. 만물보다 지극히 부패한 것이 사람이라지 않았던가.
“어떻게 정보생명체를 억누를 수 있었냐고 질문했지? 답을 알려주지.”
에슈타르가 본론으로 틀자 루디아는 긴장하며 귀담아 들었다.
“일부 휴먼 족이 정보생명체의 군집 지배권을 통째로 빼앗았거든. 정보생명체들이 휴먼과 접촉했을 때 특이 현상이 벌어졌어. 보통 지성체였다면 흡수나 진멸을 당했을 텐데, 휴먼은 도리어 정보생명체의 소프트웨어를 잠식해버렸지.”
에슈타르는 흥얼거리듯 읊조렸다.
“특별히 의지력이나 정신력이 강해서가 아니었어. 휴먼 족은 지능도 그다지 뛰어난 편도 아니었거든. 그런데 그들보다 연산력과 사이킥 파워가 우월한 이종족들도 정보생명체를 상대로는 속절없이 쉽게 먹혀버렸지.”
“그렇다면 선악 특성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래,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한없이 투명해질 수도, 한없이 사악해질 수 있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역 흡수가 가능했던 것 같아.”
실제로 이는 귀납적으로 증명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휴먼이 정보생명체와 접촉하면 그 군집의 소프트웨어가 역으로 잠식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방식은 다양했다. 휴먼의 몸 본체가 정보생명체의 속성을 흡수하기도 했다. 혹은 휴먼의 육체나 인격을 복제해 만든 분신이 정보생명체의 지배권을 얻기도 했다.
어쨌건 그렇게 해서 정보생명체들의 수괴가 된 휴먼들은 클로닝, 디지털 인격 생성, 뇌 복제구축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스스로의 ‘존재적 흔적’을 지속적으로 소프트웨어 내에 새겨서 남겼다. 이러한 역사가 무수히 반복되다 보니, 정보생명체 대다수의 제어권은 휴먼 혹은 ‘휴먼이 남긴 흔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에슈타르 당신은 휴먼 본체인가요?”
루디아가 질문했다.
“아니면 휴먼이 남긴 흔적인가요?”
정신만 남은 망령일까? 아직 영혼이 살아있는 인격체일까? 루디아는 문득 자신이 상대하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궁금증이 솟구쳤다.
“글쎄? 오래전부터 나도 그 해답을 갈구해왔어. 나는 본체일까, 흔적일까. 만약 흔적이라면 나는 나 자신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정신에는 휴먼의 영향력이 남아있지만, 육체는 정보생명체에 소속되어있으니 원.”
에슈타르는 시인이 비극 서사시를 읊듯 중얼거렸다.
“과연 내게도 영혼이란게 있을까. 지금 내 속에서 느껴지는 영성이라는 것은 그저 허상의 감각일까?”
전에 다른 하늘도시에서 스테판과 리온이 만났다던 ‘한나’라는 이름의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정체성에 혼동을 느끼는 듯했다. 자신이 이종족인지, 인간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나와 에슈타르는 비슷했다.
한참을 고뇌하던 에슈타르는 손을 뻗어 초능력을 발산했다. 예전에 다른 하늘도시에서 초능력 시스템을 보아왔던 루디아인지라 에슈타르가 내뿜는 아우라에서도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발견해낼 수 있었다.
“이 힘은 다른 종족이 사용하는 ‘사이킥 파워’와는 달라. 정보생명체 수괴들도 사용하지 못하지. 지금껏 나 이외에는 이걸 다룰 줄 아는 이를 만나지 못했어.”
에슈타르는 자신의 기이한 능력의 출처를 알고 싶어 했다. 우연히 발생한 능력일까, 아니면 진화의 특이점에 이른 끝에 다른 존재로 각성했다는 증거일까. 사이킥 파워를 능숙하게 다루는 이종족마저도 깨우치지 못한 힘이라면 혹시 휴먼 족만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녀의 갈등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뭐, 이제 곧 해답을 얻게 될 테니 상관없으려나.”
“어, 어떻게 말씀인가요?”
당황하는 루디아를 바라보며 에슈타르는 씨익 웃었다.
“지금 내가 이끄는 이 군집은 적을 추적하는 중이야. 우주 곳곳에 생명체를 심어놓고 문명과 유전 정보를 조작한 원흉, LTO 그 녀석과 결전을 치르기 위해서 말이야. 녀석을 붙잡고 두들겨 팬다면 나에 대한 해답을 내놓겠지.”
참고로 루디아와 에슈타르가 머무르던 그 공간은 일종의 생체 우주선의 내부였다. 바깥을 보니 과연 우주 곳곳에 흩어져 있던 1,024종류의 정보생명체 군집들이 이 우주선을 구심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에슈타르의 지도력으로 하나가 된 정보생명체 수괴들이 각자의 영지에서 부하들을 모조리 모아왔다.
“근원을 깨부순다면 해방을 만끽할 수 있으려나?”
그녀는 진심으로 모든 대적을 기꺼이 부술 심산이었다.
*
루디아는 몇 번의 시도와 시행착오 끝에 한 가지를 깨달았다. 평상시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녀의 본체와 인형 몸체의 접속이 해제되지 않음을. 아무래도 리온과 윤혁이 말한 그 후원자라는 사람이 행한 모종의 조작 때문이겠지. 지금 이 하늘도시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계속 접속상태를 유지해야 할성 싶었다.
접속이 너무 지속되다보니 인해 피로가 누적되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나머지 세 친구들을 구출해야 했기에 루디아는 꿋꿋하게 인내하였다. 인형 몸체의 힘을 쓸 수 있는 그녀 외에는 동료들을 책임질 이가 없었다.
에슈타르는 간혹 말동무는 되어주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친근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정말 인간인지 아닌지도 분별이 안 되었기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차라리 어느 쪽에 속하는지 명확하게 알았더라면 미리 선이라도 그을 텐데. 항상 타자에게 상냥한 태도로 일관했던 루디아조차도 이번만큼은 불편한 감정을 어쩌지 못했다.
‘게다가 아마겟돈 전쟁을 연상시키는 이 군대의 움직임도 영 시원치 않아. 누군가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기획해서 만든 무대 같기도 해.’
어서 이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보름 정도가 지나자 정보생명체의 연합 함대가 목적지에 당도했다. 에슈타르는 보호막인 보랏빛 구체를 해체해 루디아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대기도 없고 물리법칙도 기이하게 뒤틀린 공간이었다. 다행히 인형 몸체에 깃든 힘 덕분에 활보하는 데는 아무 문제없었다.
“자, 저기에 보이지.”
에슈타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에는 각기 다른 디자인의 함대가 모인 거대한 연합 부대가 보였다. 생체와 기계가 융합된 형태의 정보생명체 함대, 기이한 기운과 초능력을 기반으로 구축된 유사 마도 문명 양상의 함대, 고도의 과학 기술로 구성된듯한 공상과학 속의 함대까지 있었다. 루디아의 상상력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초거대 규모의 연합 함대였다.
“휴먼연맹, 우주연맹, 정보생명체의 총력이야.”
“저 강력한 대함대가……, 단 하나의 적을 섬멸하려는 기치 아래…….”
루디아가 경악하는 틈에 에슈타르가 다른 쪽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저쪽을 봐.”
반대편에는 훨씬 더 기괴하게 생긴 군단이 보였다. 말 그대로 악마의 군단을 연상시키는 흉측한 외형의 군대였다. 정보생명체들조차도 평범하게 느껴질 만큼.
“저건…….”
“LTO가 만들어낸 하수인이야. 아니, 실패작이라고 해야 하려나? 온전한 지성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탓에 생성된 실패작들이지. 그것들을 저런 식으로 모아 군대로 재편한 모양이야. 이지조차 없는, 놈의 신체 일부분이나 마찬가지지.”
몹시 비위가 상하며 속이 뒤틀렸다. 더구나 그곳은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생물학적인 본능으로 나타나는 공포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루디아는 가까스로 용기를 냈다.
“너무 무서워할 것 없어. 지금 네 몸에는 내 힘이 일부 담겨있으니까. LTO 본체가 아닌 이상 너에게 직접 상처를 입힐만한 전력은 이 자리에 없을 거야.”
이 말을 끝으로 에슈타르는 최종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녀는 허공에서 거대한 괴이 물체들을 소환했다. 일종의 원격 조종형 외부무장이었다. 육중한 외부무장들은 그녀의 몸에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 어찌나 유기적으로 자연스러운지 마치 외부무장이 몸의 본체이고 에슈타르의 몸이 작은 일부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무장의 재질은 생체와 기계가 절묘하게 섞인 것으로 종(種)의 카테고리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어서 에슈타르는 적의 무리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섬광과 불꽃, 뇌전과 굉음이 난무하며 온 공간에 초능력과 사이킥 파워의 파동이 번져나갔다. 루디아는 동행하던 무리에서 떨어져 개인 행동을 개시하였다.
‘희미하게나마 이 근처에서 윤혁이와 리온의 기척이 느껴져.’
인형의 기능이 후원자의 간섭 덕에 크게 증폭되어서인지 동료들의 좌표와 상태가 선명히 느껴졌다. 또 미리 인형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입력되기라도 한 것마냥, 자신이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이 저절로 깨달아졌다.
“부탁할게.”
루디아는 외부에서 인형 CPU에 입력되는 프로그램에 잠시 정신을 집중하면서 흐름에 맞춰 인형 몸체를 타고 흐르는 특수한 기운을 조작했다. 곧 예전에 윤혁을 구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환상계 병사가 그녀의 인형 몸체를 매개로 튀어나왔다.
{환상계 병사, 다리우스-1,098,234호, 3기 소환.}
이번에는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지 인형에는 손상이 가해지지 않았다.
“세 친구를 구해줘.”
루디아의 명령어가 내려지자마자 환상계 병사들은 전장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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