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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69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8. 이치죠우지 카가미 (1)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8.16 | 회차평점 0 0

 

 

 

 

 

 

Chapter 58. 이치죠우지 카가미

 

 

 

 

 

 

   뇌리에 남은 마지막 기억의 잔상, 그것은 마치 만물을 집어삼키려는 죽음의 입처럼 섬뜩했지만 동시에 순백의 빛보다도 창백한 밝음을 머금은 섬광이었다. 물리학적으로 빛보다 빠르게 번져나갔으니 섬광이라고 말하기에는 과학적 어폐가 있긴 해도 분명 그것은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했다.

   잠깐 의식을 잃었던 윤혁. 그는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즉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사방에는 흰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뿌리라고 불렸던 태고의 덩어리, 곧 함대원들이 근원이라고 믿었던 물체가 흉흉한 자태를 자랑하며 배경을 수놓고 있었다. 함선들을 집어삼킨 뜨거운 섬광의 구체는 더 이상 안 보였다. 이글거리는 어둠 덩어리 같았던 거신도 간데 없이 사라졌다.

   문득 왜 우주 공간에서 자신의 몸이 타버리지도, 얼어붙지도, 피가 증발하지도 않는지, 또 왜 숨은 잘만 쉬어지는지 의문이 들었다. 대기권도 아닌 우주, 심지어 통상 우주와도 전혀 다른, 변질된 물리 법칙의 공간에 놓여있는데.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가슴 쪽에서 희미한 빛이 분사됨을 뒤늦게 발견했다. 반지가 금빛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동일한 금빛 색깔의 반투명한 빛의 구체가 윤혁의 몸 주변 10m 반경을 감싸는 중이었다. 구체 안쪽에는 기온, 빛, 습도, 중력, 방사선, 대기 조성 등 물리 환경이 인간에게 알맞게 조성되어 있었다.

   ‘뭐지?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설마 소유권자의 신변을 자동 보호하게 되어있나? 그것 말고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매번 저 꺼림칙한 물건의 혜택을 입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이제는 의지와 관계 없는 수동 보호까지라니.

   ‘레벨업한 함선들을 일순간에 쓸어버릴 만큼 강력한 섬광이었는데?’

   방어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때도 반지가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윤혁은 꼼짝없이 하늘나라에 갔으리라. 뿌리 공략이 이토록 위험한 여정이란 사실을 친구들이 미리 알았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드러누워서라도 못 가게 막았으리라. 무모한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같이 온 동료 대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생사도 모른다. 애초에 그 섬광 구체가 죽이는 용도인지 봉인하는 용도인지도 불명이지만 말이다. 확실한 것은 지금 이곳 근처에는 윤혁 이외에는 인간이 없는 듯했다. 돌아가기도 막막하고 그렇다고 이곳에서 비밀을 파헤치자니 황금빛 구체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

   “난처하네.”

   {무엇이 말인가?}

   갑작스레 어떤 물체가 윤혁 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우와아아악!”

   {넌 누구지?}

   섬뜩한 기계질의 물체가 출현하여 다가왔다. 특이하고 기괴한 형태였다. 로봇 같기도 했지만, 어쩐지 기계가 아닌 별개의 개체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녀석에게서 거대한 존재감과 에너지가 발산되는 것이 은연 중 느껴졌다.

   {왜 너는 처분되지 않고 남은 것인가?}

   윤혁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비록 모양은 달라보여도 섬광 구체를 발산해서 연합군을 처치한 거신과 지금 나타난 녀석이 동일한 개체임을. 실제로도 느껴지는 기운이 꽤나 비슷했다.

   “누, 누구시죠?”

   떨리는 목소리로 섣부른 질문을 던졌다.

   {그 물건은 뭐지?}

   “……네?”

   놈은 목걸이에 매달려있는 반지를 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만일 그 신체 부위를 손가락이라 부를 수 있다면. 여하튼 잘 살펴보니 놈은 황금색 구체 바깥에만 머무르고 있을 뿐 그 안쪽으로는 침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분…, 인류의 지배자의 물건을 네가 갖고 있는가.}

   다소 이상한 상황. 왜인지 녀석은 유전자를 잘만 감지하던 다른 이종족 개체와는 달리 윤혁의 유전자와 그 의미를 읽지 못하는 듯했다. 만약 읽었더라면 대강 카이젤과의 혈연 관계를 눈치챘을 텐데. 놈보다 덜 떨어진 발명품들도 손쉽게 유전자를 읽어내곤 했음을 생각해보니 의외였다.

   ‘아, 혹시 황금색 방어 구체가 감지를 차단하는 중인가?’

   이렇게 생각해보니 말이 들어맞았다. 별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었다. 아마도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지만, 바깥에서는 진입은 물론이거니와 간섭이나 관측조차도 불가능한 듯했다. 방어력도 그렇고 차단력까지, 형이 선물한 반지가 생각 이상으로 굉장한 작품이었음이 자명해졌다.

   어쨌건 상황을 미뤄보건대 녀석이 감지 가능한 것은 반지의 존재, 그리고 어떤 인간이 반지를 소지한 채 그것과 접촉하는 중이라는 사실 정보뿐인 듯했다. 어쩌면 윤혁의 얼굴조차도 읽지 못하는 상황일지도 모르지.

   “당신이 먼저 말해주세요. 당신이 누구신지를요.”

   {그러면 너도 답을 줄 텐가?}

   “일단 생각해볼게요.”

   {꽤 대담한 녀석이군.} 

   다행히 놈은 갑을 관계를 의식한 것인지 제안을 받아들였다.

   {TUNER, 즉 조율 프로그램이 나의 모체이다.}

   그 단어에 윤혁은 잠시 멈칫하였다.

   {TUNER는 인간이 살아가는 ‘통상 공간’에 1천 개의 아바타(AVATAR)를 현현 시켰다. 그리고 현재 우주에 사출된 1천 기 전부가 모여 하나의 몸체로 융합하였지. 이른 바 메타-아바타를 형성했다.}

   윤혁은 TUNER, 아니 조율 프로그램이라는 익숙한 이름을 듣자마자 알리엔이라는 괴생명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생체 실험의 결실인 인공 생명체에게 몰래 접근한 비밀스러운 존재. 알리엔 말고도 모든 이종족에게 간섭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 이종족이 겪은 인위적 진화 현상을 운명 조율자마냥 배후에서 조정했다는 그 정체불명의 존재!

   “당신이 그렇다면……, TUNER, 아니 그것의 메타-아바타 입니까?”

   {나는 메타-아바타의 일부, 100억분의 1 크기의 파편이다.}

   “100억분의 1이요? 세상에!”

   고작 그 정도만큼으로도 방금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위력을 낸단 말인가.

   ‘설마 저 녀석과 같은 분신이 식민지마다 일일이 파견된 것은 아니겠지.’

   상식을 넘나드는 이야기에 윤혁은 기가 찼다. 저런 괴물이 최소 100억 기 이상 활보한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려왔다. 아니, 메타-아바타란 것 자체도 일개 분신의 융합체에 불과하다면, TUNER라는 실체의 본체는 또 어떻단 말인가.

   “그 문제의 TUNER라는 거,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존재죠?”

   {네가 알 것 없다. 자, 약속대로 네 신분을 밝혀라.}

   녀석이 강압적으로 재촉하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서 빨리!}

   “아, 제 이름은 강윤혁입니다.”

   다그침에 휘말린 윤혁은 순간 긴장하여 순순히 실토하였다.

   {말도 안돼! 그 이름! 설마! 네 녀석!}

   이름을 인지하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을 메타-아바타의 100억분의 1짜리 조각이라고 소개한 물체는 정지 주문에 걸린 듯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누군가가 관절을 봉쇄한 것만 같았다. 놈은 긴장감에 몸을 떨며 윤혁 뒤로 물러섰다.

   윤혁은 녀석이 왜 그러는지 도통 영문을 몰라 의아해했으나 몇 초 만에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허공에서 유령 같은 기계질 물체들이 튀어나오더니 딱딱하게 고형화된 뒤 뚜렷하게 형상화되었다.

   ‘이젠 또 뭐가 튀어나올 셈인가?’

   새로 나온 존재들은 TUNER의 메타-아바타의 조각과 대략 비슷한 외양이었지만, 덩치는 더 컸으며 구조는 더 정교했다. 놈들은 삼각형 진형대로 배열을 이루었다. 세 개체씩 삼각형의 꼭짓점에 배열되더니 정중앙에 좀 더 큰 개체가 자리 잡았다. 하나를 둘러싼 셋은 각기 다른 색의 빛의 끈을 방출하여 가운데의 하나에 칭칭 감아 연결 고리를 생성하였다.

   이후 셋에 둘러싸여 가운데 놓인 하나, 그 같은 중앙점들이 다시 세 세트씩 모여 더 큰 하나의 개체에 동일한 끈을 뻗었다. 이 같은 연속 프렉털 패턴이 한 번 더 반복되었다. 그렇게 정중앙에는 최상위 개체로 보이는 하나가, 그 주변에 행성처럼 빙빙 도는 아래 단계 개체 셋이, 그들 주변으로 총 아홉 개의 하위 개체가, 그리고 가장 외곽에 총 스물일곱의 최하위 개체가 배열되었다.

   그런데 잘 보니 맨 처음 나타난 조각, 그리고 추가로 나타난 마흔 마리의 얼굴에는 공통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육망성이었다. 흡사 이스라엘 국기에 새겨진 ‘다윗의 별’을 연상시키는 무늬였다. 작은 동그라미 형태의 점들이 블록처럼 차곡차곡 쌓여 커다란 육망성을 그려내었는데 육망성의 크기에 따라 그 내부에 배열된 원의 개수가 달랐다.

   처음 나타났던 메타-아바타의 조각의 얼굴에 그려진 육망성은 그저 선들으로만 되어있었다. 그런데 새로 등장한 놈들은 달랐다. 그중 최하위로 보이는 것들의 육망성은 13개의 원이 첩첩 쌓여 된 것이었고, 그다음 레벨의 것들의 얼굴에 새겨진 육망성은 37개의 원, 그다음 레벨의 것들의 육망성은 73개의 원이 쌓여서 만들어져 있었다. 맨 가운데 위치한 대장처럼 보이는 놈은 총 151개의 원이 쌓인 육망성을 보유했다.

   {내가 직접 대화하겠다.}

   새로 나타난 무리의 대장이 조각에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조각은 서열이 낮아서 그런 것인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윤혁은 한 명에게 셋씩 엮인 놈들의 진형 패턴을 보고 별안간 요가플레임의 괴이한 신화가 떠올랐다. 힌두교를 참고해 만든 신화여서인지 변질되고 왜곡된 삼위일체 개념을 유독 많이 사용했었지. 혹시 그때의 신화도 저것과 관련이 있으려나?

   ‘베낀 건가? 그렇다면 어느 쪽이?’

   아무래도 원전은 오히려 저쪽이라고 보아야겠지.

   {강윤혁.}

   가운데 놓인 대장 같은 존재가 호명했다. 윤혁은 잠시 긴장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내뱉은 뒤 신중한 어조로, 담대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만약 상급 관계자와 대화를 요청한다면 들어줄 의향이 있습니까?”

   {맹랑하군.}

   대장 개체는 윤혁의 제안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저는 당신의 주인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는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것인가?}

   “당신을 다스리는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까? 온전한 인격체끼리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를 나눌 때는 문명의 창조물이 그 중간의 경로를 가로채지 않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래, 우리의 주인은 인간이다. 하지만 초인과 일반인은 엄연히 궤가 다른 존재이다. 내가, 아니 우리가 섬기는 존재는 오로지 단 두 명뿐이야. 너 같은 하찮은 일반인이 아니라. 그러니 설령 인간이라 해도 네 말을 들어줄 필요는 없지.}

   “하찮다라……, 그럴지도 모르죠.”

   영혼조차 소유하지 않은 발명품들이 인간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모양새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괜히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윤혁에게는 더 빠르고 간편한 해결책이 있었다.

   “그러면 제가 직접 상급자께 대화를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목걸이에 걸린 반지를 빼내어 손가락에 끼워보려는 시늉을 보였다. 그러자 예상대로 대장 개체는 멈칫하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녀석들은 이 물건이 무엇인지, 그걸 손가락에 끼는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아는 듯했다.

   {멈춰라.}

   “싫습니다.”

   {어차피 너는 그 힘을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이 괴이 공간에서 평생 갇혀 지내는 편보다는 낫겠죠.”

   상황이 역전되어 아쉬운 입장이 되자 녀석은 제의를 바꾸었다.

   {좋다. 상급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지.}

   승낙을 받아낸 윤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곧 대장의 복부 즈음에서 차원 문처럼 생긴 기계가 형성되더니 거기서부터 연기 같은 물질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아니 물질이라기보다는 에너지 덩어리 혹은 환영에 가까웠다. 연기가 엉키더니 딱딱한 덩어리가 되었다. 덩어리는 곧 사람 정도 크기로 수축하여 구체적인 형상을 입기 시작했다. 이 프로세스가 끝나자 한 사람 형체가 튀어나왔다. 그는 자신을 덮은 연기를 탈탈 털어내었다.

   ‘사람 같은데?’

   그는 제복을 입은 인간이었다. 슈트에 더해 가면과 장갑까지 둘러쓴지라 살갗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색 머리카락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곳은 우주 공간이었으니 바람이 아니라 초능력 같은 것이리라. 가면의 구멍 사이로는 푸른 색 눈동자가 보였다.

   ‘형의 제복과 비슷하다?’

   이전보다 기술력이 발전해서인지 느껴지는 위력 자체는 우주여행 때 보았던 카이젤의 제복보다는 훨씬 더 우위였으나 디자인은 그보다 단순했다. 대신 전반적으로 짙은 위압감이 녹아있었다.

   ‘최상위 초인?’

   카이젤만큼은 못 미쳐도 상당히 높은 지위의 인물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곧 푸른빛의 아우라가 사내의 몸에서 연하게 발산되더니 윤혁의 반지가 만들어낸 황금 구체 배리어를 깨트렸다. 그 남자는 안쪽으로 당당히, 흐트러짐이나 조바심 없이 차분히 침투해 들어왔다. 넘어지면 닿을만한 거리까지 이르자 윤혁과 사내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상당한 카리스마네.’

   본능적으로 몸이 식은땀이 흘렸다.

   “처음 뵙는군요, 강윤혁 군.”

   이윽고 수수께끼의 사내가 입술을 열었다.

   “누, 누구십니까?”

   “…….”

   사내는 윤혁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인류연합 부대표, 에녹 아담즈입니다.”

   전에 형에게서 들었던 그 사람의 이름. 윤혁은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무게감의 대면이 찾아왔다. 어렵사리 고생한 소득으로서 제법 나쁘지는 않았으나 긴장감 때문인지 몸이 뻣뻣이 굳는 기분이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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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운명적인 중요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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