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7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9. 인터미션 VII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8.31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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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중을 잘 읽어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이렇게 지적설계종 사건은 간략히 마무리되었다. 두 부자(父子)는 굳이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상대의 의중과 함의를 곧장 이해했다. 카이젤은 칼리드가 딱 적절한 범위의 변수를 잘 일으켜준 것을 치하했고, 칼리드는 아버지가 별 탈 없이 자신이 벌인 일의 끝마무리를 지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좌뇌가 오른손을 철두철미하게 지배하듯 둘의 마음과 손발은 이렇듯 척척 잘 맞았다. 두 사람의 심중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명령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칼리드는 말하지 않아도 상관이 원하는 것을 간파하는 데 능숙했고 카이젤도 부하의 생각을 간파하는데 능했다.
아버지와의 회담을 마친 이후, 칼리드는 여태 미뤄두었던 골칫거리에 다시금 신경을 곤두세웠다. 최근 들어서 잠잠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몇 개씩이나 얽혀들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에게 고민을 안겨준 문제의 발단은 지적설계종 : 블라인드-워치메이커의 한 아종 아간렉스(Aganlex), 그 종족 중 한 개체가 보내온 다잉메시지였다. 더 정확히는 아간렉스 개체조차도 아닌, 개체가 쪼개져 생성된 조각, 아니 그 조각이 생성해낸 그림자가 전송한 것이었다. 고작 하찮은 분신 하나였지만 그것의 메시지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아마 위급한 상황이었는지 죽기 직전에 짧은 데이터 하나만을 전송할 여유만 허락되었던 모양이다.
“지적설계종으로부터 파생되는 변수를 인간의 개입 없이 실험해보기 위해 일부러 상부 시스템과의 정신연결의 끈을 느슨하게 해뒀거늘, 하필 그 때문에 전송이 늦어졌어. 발목이 잡혔군.”
덕분에 손실된 정보량이 상당했다. 하늘도시 보안에 이어 마의 경계까지 뚫고 정보를 내보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겠지. 발송 이후로 한참 뒤에야 도달한 다잉 메시지는 엉망진창으로 잡음에 오염된 상태였다. 칼리드는 그 데이터를 원본에 가깝게 재구축하느라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워낙 처리할 다른 중요한 일이 많았던 터라 신경을 많이 쓸 수는 없었고 때문에 해독은 매우 느리게 진척되었다.
그런데 막상 메시지를 원본대로 복원해보니 충격적인 정보가 들어있었다. 아뿔싸. 칼리드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혹시 자신의 예측이 틀렸을까봐 수차례 이중 검토를 반복해보았다. 하지만 도리어 처음 직감했던 바가 옳았음이 더욱 명료해졌다. 초월적인 지능을 활용해 추론해보니 그 데이터 파편들이 시사하는 바는 단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레귤러?”
그 보고서에는 하늘도시 주민 중 하나가 우연히 표식의 제어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도를 획득한 것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표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표식의 스위치를 스스로 껐다 켰다 하면서 제어하는 능력을 얻는 방식으로. 어쨌건 심각한 위기 경보임은 확실했다.
‘골치 아프게 됐군.’
표식이 공식적으로 지워지는 사례는 존재한다.
일례로 공적을 많이 세워 특혜로 지구 시민권을 얻은 퇴역 휴먼 솔져들의 경우, 자유를 얻는 과정에서 표식 자체는 남되 표식의 스위치는 꺼지게 된다. 비록 충성의 표식의 영향력은 평생 남게 되긴 하지만 말이다.
또한 초인으로 각성한 식민지 주민은 온전한 능력 발휘를 위해 표식 전체가 영구적으로 삭제된다. 물론 이들에게도 충성의 표식의 영향력 내지는 후유증은 부분적이나마 남는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아버지가 손을 봐줘야만 가능하지.’
칼리드가 알기로는 카이젤 이외에 표식에 간섭할 권한을 지닌 인간은 없다. 초기 단계의 표식도 그러했거늘, 표식 기술의 정교성이 극미세 차원과 고차원 범주까지 아우를 만큼 개량된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즉 시민으로 승격된 휴먼 솔져도, 초인 각성자도 아닌 자가 자유를 획득했다는 건 극도로 위험한 사례, 말 그대로 ‘이레귤러’ 케이스라 칭할만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가.’
현시대에는 시도가 불가능하다. 어쩌면 아직 표식 기술이 덜 발전했던 초기 하늘도시 시절이라면 누군가가 표식 위에 조작을 시행해볼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쳐도 표식의 조작은 최상위 초인의 재주를 벗어난 영역이다.
‘그런 대담한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잘해봐야 카테고리 분류 불가뿐…….’
성녀와 레이디는 카이젤을 무서워하는 신중한 인물들이기에 절대로 그런 이적 행위를 저지를 위인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둘. 아마도 행방이 묘연한 두 반역자가 한 짓일 터인데.
‘하지만 설령 반역자들이 우주 인류 양육 초기 단계에 운 좋게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지금 데이터에 보고된 수준만큼의 자유도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더 심한 장난을 친건가. 자연계의 현상만으로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용의자를 다른 범주에서 추려내야 한다.
“설마……, 초자연?”
우주 시대 이전 지구 문명권에서 소위 신과 천사들과 악마들의 영역으로 간주했던 미지의 세계. 인간의 모든 관측과 조작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미지의 초월 영역. 지구의 역사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철인왕들은 이 초자연계의 영향력을 무심코 간과하는 경향이 강했다. 칼리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까지는.
하지만 이번에 이레귤러 관련 데이터를 보자마자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위험하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범인은 제4 철인왕인 진, 그리고 그자의 후방 지원을 받아 활보하고 있는 무리였다. 특히 아버지의 이복동생이라는 강윤혁, 겁도 없이 감히 인류연합에 도전장을 내민 파렴치한 작자.
과연 지적설계종의 분신이 보내온 메시지의 근원지를 발본색원해보니, 진의 메시지 데이터가 오간 통신 흔적의 자취와도 어느 정도 일치했다. 즉 이레귤러는 진과의 밀약을, 최악의 경우 강윤혁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 어쩌면 같은 일당일지도 모른다.
‘단지 치기 어린 소꿉장난에 불과했다고 여겼건만, 이건 낭패로군.’
무수히 많은 가설들이 칼리드의 뇌리에서 시뮬레이션을 거쳤다. 모든 경우를 수학적으로 연산해보니 가능성은 하나로 수렴하였다. 진 라흐블뤼크의 사상적 행보와 의중, 아카식 레코드의 메모리에서 빼내온 데이터, 강윤혁과 성녀의 대결 당시 벌어졌던 사건의 기록, 급격하게 확산된 지구의 낡은 영적 유산, 수천 차례의 초능력 실험에도 불구하고 자연 소멸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던 교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레귤러의 발견까지……, 모든 퍼즐이 꼭 들어맞는다.
‘설마 처음부터 이레귤러를 동료로 데리고 다녔던 걸까? 이레귤러 녀석은 자신의 표식을 얼마나 잘 제어할 수 있을까? 이레귤러의 그 기이한 특징은 반역자가 벌여놓은 조작에 초자연적 현상이 더해져서 빚어진 건가?’
이후로도 여러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놈은 과연 어느 시점부터 제어에서 벗어난 것인가? 어느 시기 쯤에 출생했을까? 옛 반역자는 언제 이레귤러에게 접근했을까? 과거의 행방은 어떠하였을까?
그리고 이레귤러 놈은 대체 어느 시점부터 강윤혁 일행과 접촉했을까? 설마 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 분명 그랬으리라. 그자들 일행은 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은하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여력이 없을 테니.
‘그럼 왜 내게는 보고하지 않았지?’
진노가 불 일 듯 타올랐다.
‘아버지께서도 틀림없이 알아차리셨을 텐데?’
그의 눈동자에 새겨진 붉은 불꽃이 장작을 집어삼킨 양 화르르 번져 올랐다. 중요한 이슈에서 자신만 배제되었다는 생각에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진에 대한 얄미움, 나아가 장차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대한 고민, 예측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복잡하게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이레귤러 녀석이 예외적인 사례임은 분명하다.’
그는 차분히 아직까지 다행이라 여겨지는 점을 짚었다.
‘지금까지 관측한 바에 따르면, 초자연적 간섭으로 인해 그 문제의 신앙을 받아들인 자들도 많은 경우 표식의 영향력이 일정 부분 약해진다. 하지만 아예 삭제되지는 않아. 완벽히 자유로워지지는 못하지.’
그는 타산지석을 삼기 위해 지구의 교회사를 조사하였다.
정말 초자연적 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기원후 1세기 당시의 지구 근동에서는 실제로 병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고질병이나 육체의 질병, 현실적 어려움을 평생 간직한 채 살았다. 그나마 변화가 있었다면 어려움을 견뎌내는 정신적 여력이 증가했다는 점뿐이었다.
‘초자연적 영향력이 간섭한다 해도 무조건적인 법칙마냥 신체적 회복이 수반되는 건 아닌 모양이군.’
적어도 기계적으로 받는 혜택은 아닌 모양이다. 병 치료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주민들에게 보편적으로 심어진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산물 ‘표식’, 그것 또한 십자가 신앙을 새로이 소유한다고 해서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 듯했다. 하지만 장기적인 영향력에 있어서도 안심할 계재는 아니었다.
‘만일 혼이 점차 강건해져서 표식의 영향력을 서서히 거부하게 된다면?’
마냥 미신으로 치부할 문제도 아니었고 불가능한 시나리오도 아니었다. 실제로 초인들은 암묵적으로나마 영혼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영과 혼, 곧 인간 속에 포함된 초자연적 요소와 준-초자연적 요소가 외부의 미지 영향력에 노출되어 변화를 겪고, 그것이 자아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아버지가 숙부님의 사역을 평할 때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게 이런 의미였던 거군.’
칼리드로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다루지 못할 초자연적 영향력이 활개를 치도록 방치한다? 그가 보기에는 안일하고 무모한 도박이었다. 물론 아버지 같은 신중한 사람이 무턱대고 판단 착오를 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결국에는 표식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는 것만이 해결책인가?’
평생 인위적 정신 간섭 기술에 의존하여 민중을 다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버지도 이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리라. 그런 이유 때문에 현재 그도 전 인류를 통제할 당근과 채찍을 열심히 준비하는 중이리라. 표식 없이도 인류를 완벽하게 다스릴 비책을.
하지만 카이젤 같은 궁극의 철인이라면 모를까, 칼리드로서는 무한히 증식할 우주 인류를 표식 없이 완전히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만일 끝끝내 그의 무능력함이 입증된다면 부대표가 예언했던 대로 스물네 명의 최상위 초인들의 존재의의도 서서히 희미해지리라.
‘그 위험한 도(道)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고민은 안 했을 터인데.’
사실 얼마 전, 칼리드는 아카식 레코드에서 빼 온 자료들을 직접 재시뮬레이션 해보았다. 아카식 레코드가 처음 시뮬레이션을 했을 때보다 기술력이 상향된 덕에 더 나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결과는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몇 달 후, 어쩌면 짧은 시일 내에 대규모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현재 신설된 1조 개도 넘는 하늘도시, 그곳들에 배치된 인구 집단 가운데 상당수가 곧 감염될 예정이었다.
나아가 단순한 잠복 감염 상태를 넘어 대대적으로 감염이 확장되리라는 예측안도 나왔다. 현재는 그 종교에 감염된 자들이 음지에 숨어있으나 이대로 내버려 두면 높은 확률로 각지에서 발병이 확대되어 급기야는 판데믹(Pandemic) 현상에까지 이르리라.
{판데믹 발생 확률, 99.9999%}
프로그램은 압도적으로 비관적인 수치를 도출했다.
“제길.”
인류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질병을 완벽히 정복해버린 이 마당에, 이제는 제어 불능의 괴이 종교로 인한 초자연적 판데믹이라니. 자조하며 웃을 수도 없는 최악의 블랙 코미디였다.
(다음 회차에 연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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