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77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9. 인터미션 VII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9.02 | 회차평점 0 |
(이전 회차에서 연속됨)
“위험 요소? 아니야, 이건 그 이상의…….”
이제껏 칼리드에게 있어 인류 역사가 남겨온 지식, 경험, 종교, 철학, 사상, 과학이란 그저 활용하기 좋은 조리 재료이자 양념에 불과했다. 그는 실제로 그것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식민지의 역사 흐름을 마음껏 조종하여 숱한 프로젝트들을 완성했었다. 어떤 사태가 일어나건 그의 예측을 벗어나서 확대된 일은 없었다. 종교 역시 그에게는 이용하기 좋은 아편이요 허울 좋은 도구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이런 건……, 종교가 아니다. 완전히 카테고리가 다르다.”
분명하게 실존하는 영적 실체. 그 말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두려움이 점점 더 커져갔다. 이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힘이다. 정녕 저것이 인간의 발명품이란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초자연계로부터 직접 강림한 미지의 외계 권세, 궁극적인 영향력. 정말로 그러하단 말인가!
“그분이 숙부님 같은 범인(凡人)을 높이 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거늘.”
방심한 것은 엄연히 칼리드의 잘못이다. 판데믹이 벌어져 표식의 힘이 전반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뒤에 수습하려면 너무 늦는다. 인류연합의 통치에 훼방 요소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식민지 인류 통치 패러다임을 통째로 교정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설프게 초자연적 바이러스의 진로를 막자니 늦은 감이 짙었다. 이미 너무 광범위하게 퍼졌을 테니 별 효용이 없으리라.
신중한 칼리드는 침착하게 첫 단추부터 교정해보리라 다짐했다. 그는 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시작점으로 돌아갔다. 일단 급선무는 이레귤러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획득하고 그 신변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놈을 역이용해 상황을 뒤엎을 방도를 고안해야 한다.
그러려거든 일단 어떻게든 뒤쳐진 정보의 격차를 뒤집어 우위를 점유해야 한다. 일단 거기까지만 어떻게든 수습한다면, 그다음 단계는 완벽한 일망타진을 위해 계획된 ‘비장의 카드’가 그의 수중에 있으므로 염려할 것 없다.
‘최종 완성 단계의 갤럭시 클래스 바이오스피어…….’
이번 기회에 그 성능을 제대로 확인해봐야겠군.
기대감과 동시에 반드시 실수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굳게 섰다.
목표한 바를 실천하기 위해 칼리드는 즉각 ‘그녀’를 만나고자 미리 잡은 비밀리 회담 장소로 워프했다. 일부러 지구에서 떨어진 요새로 좌표를 잡은 상태였다. 최근 들어 그녀의 통행권이 제한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칼리드 측에서 운송 수단을 보내야만 했다.
“어머나, 웬일로 저를 뵙겠다고 하셨나요, 제1 철인왕?”
“말씀 편히 하시지요.”
성녀는 온유해보이는 웃음을 해사하게 발산하며 칼리드를 한껏 반겼다. 그러나 그녀의 꿍꿍이와 속내가 워낙 깊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칼리드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려 애썼다. 여기서 이익의 주도권을 놓치면 안 된다.
“호호, 전 일개 여인에 불과하거늘 어찌 감히 높으신 분께 편하게 대하겠나요.”
티아라는 능청스럽게 가식을 떨었다.
“세상일이란 모르지 않습니까? 혹시나 압니까, 성녀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위치에 오르시게 될지 말입니다. 게다가 지위상으로는 몰라도 성녀 당신은 분명 우리 스물넷보다 높은 격으로 태어난 초인이셨죠.”
“어머! 말도 참 아름답게 하시네요.”
칼리드는 상대의 능청스러움을 받아 쳐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초지능체와 권능을 배제한, 순수한 역량만으로 비교했을 때는 말이죠.”
가시와 뼈가 실린 첨언이었다. 예전에는 비록 당신이 더 명망 높았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카이젤이 완성한 기술력이 그에게 충성하는 모든 수하들에게 보편화되었으므로 얼마든 태생적 차이는 역전이 가능하다는, 일종의 기선 제압 겸 경고의 선언이었다. 아울러 성녀더러 빨리 카이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U-society와 인류연합 측에 정식으로 소속되라는 권고이기도 했다.
“어머,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정치적으로 철저히 중립을 유지한답니다. 말하자면 일인 NGO에 해당하는 존재인걸요.”
“하하, 제 위에 군림하시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정치적 방도만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도 잘 아시잖습니까. 당신에겐 아직 선택지가 있으시죠. 품격도 충분하고요.”
“호호,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곤란하네요.”
칼리드가 던진 이 말은 넌지시 결혼에 관한 생각을 떠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티아라를 아버지의 정략혼 대상 후보로 간주하고 있었다. 실제로 인류연합 소속의 초인들은 최고 지도자의 배우자로서 간택될 대상으로 두 명의 후보를 고려하는 중이었다. 성녀와 레이디. 사실 격에 맞는 대상이 둘 말고는 없긴 했다. 대체로는 성녀 쪽을 지지하는 자들이 더 많았다.
“인류연합 대표님과는 개인적 친분만 있을 뿐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없답니다.”
“어차피 정략 관계일 테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겉보기에는 시답잖은 농담이었으나 나름 중대한 모략과 의중이 담긴 정치적 발언들의 연속이었다. 칼리드는 그답지 않게 몇 시간씩이나 꾹 참고 티아라에게 맞춰주면서 티타임을 나누었다. 평소 같았으면 일할 시간과 연구할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겠지만, 이번에는 이런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성녀시여, 지금부터는 좀 더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사적인 일인가요? 아니면 공적인 일?”
티아라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면서 칼리드의 불꽃 같은 눈을 응시했다. 칼리드는 자칫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릴까 봐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천천히 의중을 드러냈다.
“관점에 따라 두 가지 모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티아라는 깔깔거리던 웃음을 멈추었다. 칼리드가 사용 언어를 전환하였다. 공용어 대신 고풍스러운 미지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진지하게 나올 작정이나보네.’
이 언어에 관하여 설명하려면 잠깐 역사 이야기를 해야 한다.
초인들에게는 세대별로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일례로 1세대 초인들은 본명보다는 알파벳 코드네임을 선호했다. 또한 그들은 저들끼리 대화할 때면 수학적 퍼즐을 동원하는 암호식 화법을 사용했다.
반면, 2세대 초인들은 각기 자기 자신을 시작점으로 새 가문을 창설하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그 일환으로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라스트네임을 버힌 뒤 별도의 라스트네임을 창조했다.
또한, 이들은 자신 스스로 한 종족의 수뇌가 되었음을 선언하고자 직접 자신만의 언어 체계를 창조했다. 마치 20세기 영국의 언어학자, J.R.R. 톨킨이 평생 요정 언어를 창조했듯. 다만 스케일은 달랐으니, 2세대 초인은 한 사람당 기본적으로 백 개 이상의 새 언어 체계를 만들되 기존 언어의 도움 없이 송두리째 밑바닥부터 창조했다. 심지어 그 언어들은 현실성 또한 우수했기에 사장되기는커녕 실전에서까지 마음껏 응용되었다.
한편, 3세대 초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만의 고유 풍습이 유행하지 않았다. 프라이드가 없다기보다는 그저 그럴 의미를 못 느꼈달까. 그들은 가문을 스스로 창조하는 대신 부모가 물려준 성씨를 그대로 사용했다. 특히 카이젤이나 에녹처럼 초인을 부모로 둔 경우에는 부모의 성씨를 고스란히 간직했다.
대신 그들은 이전 세대의 문화를 흡수했다. 1세대의 유지를 잇기 위해 자신의 미들네임에 알파벳 코드를 새겨넣었고 여기에 일부 초인은 부모 2세대가 세운 가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 위에 덧붙였다.
또한 이름뿐 아니라 언어적인 관습에서도 이전 세대의 특징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었다. 그들은 앞선 2세대 초인들이 만들어둔 언어를 남김없이 학습한 뒤, 1세대가 했던 방식대로 여러 언어를 수학적으로 해부하고 조합해서 퍼즐화하는 기법을 언어 행위 위에 접목하였다.
이러한 고풍스러운 수학적 언어 기법은 널리 상용화되지는 못했는데 3세대 중에서도 최상위 초인들 사이에서나 유행했다. 일종의 귀족적인 풍조였다.
이 순간, 칼리드는 티아라를 상대로 바로 그 귀족의 화법, 곧 수학식과 신식 언어의 향연을 펼치는 중이었다. 한마디로 비천한 자들을 대화에서 배제한 채 오롯이 귀족들만의 독대를 펼치자는 초대였다.
만일 사람이든 인공지능이든 누구든지 그들의 대화를 엿 듣는다면 곧바로 자신들이 천민이 되어 소외되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리라. 아니, 엿 듣는 자가 있건 없건 그들로서는 상관없었다. 그들은 실용성 여부를 떠나 자신들의 존재론적 격을 한껏 드높이는 뽐냄을 무의식적으로 즐겼으니까.
“무엇을 묻기를 원합니까, 제1 철인왕이시여.”
“성녀여, 당신은 예전에 강윤혁 일행을 만났었죠.”
“그 기억은 썩 달갑지 않군요.”
“무례를 범했다면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제 의중은 결코 당신을 향한 조롱이 아닙니다. 도리어 제 의도는 그들을 벌하려는 쪽에 가깝다 할 수 있겠군요.”
“어머, 그러면 당신의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그가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데요. 단지 동생의 갈 길에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절 하늘도시에서 축출했는걸요.”
정확히는 카이젤이 그런 명분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이미 눈치 빠른 티아라는 그의 의중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칼리드의 날렵하고 잘생긴 얼굴에 그윽하고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이런, 저는 숙부님을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이제는 그에게 손대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죠. 제가 추구하는 바는 수습이지 보복이 아닙니다.”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말씀해보시지요.”
“당신이 알고자 하는 것은……, 그들을 뒤흔드는데 필요한 정보이겠죠?”
순식간에 의표를 찔러오는 성녀의 영민함과 놀라운 지혜. 칼리드는 떨림을 숨긴 채 태연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역시 순수한 지혜만으로는 그녀와의 질적 격차를 따라가기 어렵구나.
“내게는 발언권을 제약하는 계약 사항이 있어요.”
티아라는 선뜻 조력하려 하지 않았다. 강윤혁과 맺었던 내기의 조항 때문이었다. 그 내기 계약은 두 사람이 보유한 공통된 ‘신비한 계약 기술’을 매개로 결성된 것이기에 아무리 성녀라도 손쉽게 파훼하지 못했다. 자칫하면 반지의 힘으로부터 구속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우회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교묘하게 귀띔해달라는 말씀인가요.”
티아라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그녀도 입이 근질근질했다. 제자 뻘의 꼬마들을 상대로 옹졸한 복수극을 벌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훈계 정도는 전달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윤혁과의 계약은 티아라 정도의 실력이면 쉽게 우회할 수 있다.
“그러면 궁금한 점을 우회적으로 질문해보세요, 철인왕이여. 그러면 마찬가지로 우화를 통해 대답해드리지요. 당신이라면 충분히 의사소통할 수 있겠죠.”
“감사합니다, 성녀님.”
밀월과 야합이 이렇게 하여 성사되었다.
(다음 회차에 계속)
이전회
376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9. 인터미션 VII (2) |
다음회
378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9. 인터미션 VII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