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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79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59. 인터미션 VII (5)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9.07 | 회차평점 0 0

 

 

 

 

 

 

*

 

 

 

 

   한 가녀린 고양이가 사내의 넓은 어깨 위로 올라탔다. 이미 습관이 되었는지 검은색 고양이는 자신의 앞발로 두텁고 널찍하고 탄탄한 대흉근을 꾹꾹 눌렀다. 옆에 있던 회색 아기 양은 사내의 선명하게 파인 쇄골을 발굽으로 살살 긁었다. 사내의 고운 미간이 찡그려졌다. 작은 동물들이 옷을 어지럽히자 그는 일부러 꽁꽁 싸맨 단추를 몇 개 헐렁히 풀었다. 탄탄한 근육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태원, 레날도……, 온종일 그렇게 만져대면서 힘들지도 않나?”

   동물들 주제에 웃긴 습관이었지만, 워낙 즐기는 통에 말릴 재간도 없었다. 재혁은 나직이 한숨 내쉬며 반려동물들이 멋대로 즐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눈썹 한쪽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면 그만의 치명적인 마성과 온 몸에 밴 짙게 아로새겨진 매력에 움찔하며 자리를 피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동물들은 그런 데는 무감각했고 천진난만했다.

   “맘대로 하려무나.”

 

   딩.

 

   정적을 깨트리는 음율의 발원. 커다란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재혁은 피아노 앞에 다소곤히 몸을 숙여 앉아 건반을 몇 개 두드려보았다. 그는 평소 악기 연주라는 행위를 그다지 문화로서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일을 모든 사람보다 우수하게 잘했고, 한번 시작하면 반드시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흐음.”

   그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동생이 처음 그의 집을 방문했던 시절, 아우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찬양을 드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로 흥미가 생긴 것인지 재혁은 전에는 관심에도 없던 피아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가끔 그렇게 실컷 두드리면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그 아이가 풀어내었던 곡이 이거였나?”

   재혁은 한 음도 빠짐없이 정확한 순서로 그날 윤혁이 연주했던 곡의 원 형태와 소리를 재현해보았다. 박자, 강세, 하모니, 심지어 그 아이가 건반을 잘못 터치한 실수까지도 그대로 모방했다. 음절을 넘어 음파의 파형까지도 똑같게.

   ‘완벽한 기억력이란 게 이럴 때는 또 편리하군.’

   사실 악기 자체와 공간의 형태가 달라졌기에 과거 그 순간의 원래 음색을 재현한다는 건 불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재혁은 마술이라도 부리듯 아무런 초능력이나 기술력의 도움도 없이 솜씨만으로 그 불가능을 이뤄나갔다. 태연스럽게.

   “의미는 잘 모르겠군.”

   그 음악 자체에 깊은 심령이 담긴 것인지 왠지 마음 한구석에 짠한 느낌이 전달되었다. 과연 세속의 곡조와는 풍기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원래 음악 안에는 연주자의 마음과 신앙심 또한 담기는 법인데, 워낙에 완전히 모방한 탓인지 재혁 자신은 아무런 마음도 담지 않았음에도 추억 속에 담긴 원 연주자의 심령이 복원되어버렸다.

    그는 잠깐 멍하니 멈추다가 다시금 손을 들었다.

 

   Rrrrrr~

 

   이번에는 조금 전 두드린 음조를 조금 변형하여 새로운 변주곡을 빚어낸 그. 그 후 같은 멜로디에 계속 변조를 가하면서 풍성한 반주를 더하였다. 이내 멜로디는 색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더니 무궁무진한 색채를 덧입었다. 손가락은 점점 초음속에 가깝게 가속되었다. 무예의 극한에 이른 검성(劍聖)처럼 손은 현란하고 아름다운 춤사위를 그리며 교향곡을 발전시켜나갔다.

   악보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냥 의식의 흐름 대로만 흘려보내면 인류 전체가 축적해온 음악적 기량을 가뿐히 뛰어 넘고도 남았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다가도 사이렌처럼 빨아들일 듯, 음악은 천계의 카멜레온처럼 변신하였다. 슬슬 88개의 건반만으로는 그가 상상하는 세계를 구현해내기 벅찬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이런, 이건 물리적 세계의 한계인가.”

   재혁은 왼쪽 손으로 부드럽게 허공에 가상의 선을 여럿을 그었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제 몸처럼 다루듯이 유려한 동작이었다. 단순한 제스쳐는 아니었고 현실 위에 가해지는 간섭이었다. 곧 그를 둘러싼 시공간이 송두리째 개편되었다. 무한에 가까운 거울상 공간이 펼쳐졌다.

   이윽고 재혁의 소환에 응하여 수천억 개의 건반 형상이 실체화되었다. 손만 쓰기에는 아쉬웠는지 그는 초능력과 눈동자의 움직임을 함께 동원해서 건반들을 휘젓고 조종하였다. 기존 물리력의 한계를 벗어난 초정교 구조물의 건반. 한치의 부조화도 없이 완벽한 무한의 화음 연쇄가 섞여들었다.

   교향곡은 점점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로 진화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을 빨아들일 듯 마력을 내뿜는 음악이었다. 마치 하늘의 악마와 천사들이 격렬하게 마법에 홀려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재혁은 손과 건반의 접촉만으로는 미처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해 성이 안 찼는지 소리를의 매질인 공기 입자 하나하나를 염동력으로 섬세히 조종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동함수를 그려내며 진동하는 입자 위에 정교하게 연산된 수학적 묘미를 덧입혔다. 이에 코스모스와 카오스, 혼돈과 질서가 찬란한 춤사위를 그리며 혼연일체로 화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물리적인 소리만으로는 흡족해하지 못한 그는 자연계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파동을 모조리 소환했다. 빛과 소리, 시공간 틀의 진동, 중력 파동, 확률 파동, 이 모든 것들이 서로의 규칙성을 상호전달하면서 마술을 부렸다. 공간을 수놓는 공감각적인 오케스트라가 광활히 펼쳐졌다. 흡사 거대한 오로라의 형태로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심는 것만 같았다.

   연주를 넘어 실체화된 황홀경을 재창조해낸 카이젤.

   그는 이내 자신과 일체를 이루는 궁극의 정신력들을 활동시켰다.

 

   ‘Deus Ex Machina. 기계론적인 질서를 강요하는 폭군.’

 

   인공지능과 기계, 시스템과 기계를 제어하는 모든 기계들의 신. 기계 율법을 쥐어틀던 중추. 현재는 기계 율법 대신에 기계 신의 본체가 직접 현신하여 모든 시스템마다 스며든 상태였다.

 

   ‘IDEA. 소원들의 실체이자 모든 상상의 본질.’

 

   환상계, 곧 시뮬레이션 우주를 창조해내는 핵. 지식과 정보의 핵.

   이미 이것 역시도 실체화되어서 여러 은하계와 융합한 상태.

 

   ‘Cosmic Optics. 만물을 벌거벗겨 해부하는 감찰자.’

 

   상위차원을 침식하고 장악하는, 섭리 조작 장치, 제3의 눈.

   그의 숙원인 ‘높은 차원으로의 도약’을 실현해줄 무기.

 

   그리고.

 

   ‘Invisible Mind. 통치의 중심체.’

 

   표식의 원리에서 착안하여 창작해낸 발명품. 정신이나 의지를 지닌 인공물이라면 무엇이든 모조리 장악하는 중추. 장차 나타날 인간의 발명품과 지성체들을 지배할 절대 지배력이다. 그것은 초미세 단위의 유기체부터 인조 공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

   카이젤만의 언터쳐블 경지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제작된 이 네 개의 메이저급 초지능체는 주인이 연주하는 초거대 규모의 교향곡 위에 선율들을 내뱉으며 함께 공명하였다.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합작하여 저 나름대로 4중주 합주를 시작했다. 방대한 정보, 지식, 초능력, 물리력이 정교한 직물처럼 짜여 하나의 연합된 패턴을 그려내었다.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4중주 합주. 자연스럽게 네 초지능체는 서로를 보완해 주면서 공진화(Co-Evolution)를 일으켰다. 분리되어 있을 때는, 따로 따로 존재할 때는 엄연히 부족한 점이 존재하지만, 다 같이 한자리에 모이면 대부분의 약점이 상쇄되어 지워져 버린다. 이렇게 보완된 4중주의 지배력으로부터 자유로울 물질과 물체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이어서 재혁의 손에 끼워진 네 개의 반지가 작동했다. 반지들은 정신계 차원에서 벌어진 화려한 춤사위를 현실 차원으로 끌어올려 현현시켰다. 오른손 약지에는 동생과 공유한 반지, 그 옆으로 중지에 끼워진 것은 에녹과 계약한 반지, 왼손 중지와 검지에는 두 명의 중립자와 계약하면서 나눈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COVENANT-rings.’

   그것들은 모든 신비한 권능 가운데서도 가장 궁극이자 으뜸인 것을 압축해놓은 핵이요 열쇠들이었다.

   이윽고 다음 순서이자 마지막으로 재혁의 소유물이자 신체의 일부인 것이 활도하였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지닌 눈을 개화하고 각성하여 완성해낸 ‘오리지널’의 현자의 눈이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발현된 붉은 색과 푸른 색의 빛의 고리가 나선형으로 전개되어 동공 속 금빛 섬광과 뒤섞였다.

   “부족하군.”

   카이젤은 불만족스러움에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거의 완벽했었건만.” 

   완벽주의자인 그의 기준에는 어딘가 한 끗 못 미쳤다.

   “인비저블 마인드……, 이것은 아직 미완성인가.”

   실망감에 그의 맹렬함이 잠시 주춤해졌다. 재차 성찰해보고 사고 실험을 가동해보니, 당장 최종 단계로 발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했다. 보완 작업이 필요했다. 결정적인 데이터나 샘플을 확보해서 특이점을 몇 번 더 넘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메이저급인 만큼 한 번 완성할 때 심혈을 기울여 정성껏 완공해야 하리라.

   “좀 더 기다리면서 때를 지켜봐야겠군.”

   숨 막힐 듯 장엄하게 펼쳐지던 교향곡의 진노가 얌전히 잦아들었다.

 

 

   어두움의 목소리는 인간의 뒤에서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그래.>>

   더욱 위대해지거라. 권세의 찬탈자는 새로운 권세의 시작자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부적을 향해서 비는 무당처럼, 기우제를 드리는 인디언처럼. 그 염원이 미련한 것으로 밝혀질 지라도 상관 없었다. 그저 자신의 탐심을 무한히 충족시켜줄 수만 있다면, 대리만족의 승리를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리고 확정된 예언에 불확정성을 더해줄 수만 있다면, 무슨 기도건 못 하겠는가.

   <<끝없이 강해져서 한계를 뛰어넘어라. 넌 이 정도에서 머물러서는 안 돼. 고작 인류 정도로, 고작 우주 정도로 만족해서는 곤란하지. 나와 너는 보다 위대한 선을 이룩하기 위해 태어난, 모든 것들 위의 특이점이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성취와 야욕은 정당하고 올바른 것이느니라. 너의 찬탈은 창조와도 동등하다. 암흑의 목소리는 속삭이고 또 속삭이며 허공 위로 자신의 탐심을 쏟아내었다.

   <<자, 남자여, 네 입을 더 크게 벌려라! 신을 향해서, 우주를 향해서, 그리고 내게도! 모두로부터 갈취하고 쟁취하고 뜯어내. 그가 창조한 모든 것도, 내가 지은 새로운 패권 질서도, 전부 다 네 입으로 먹어치워. 이 몸마저도 삼킬 정도로 자라야지. 끝없이 탐하거라. 내가 입을 채워주마.>>

   모든 조건이 기대치 이상으로 충족되는 것이 선히 보였다.

   <<어서 빨리 사상 최강의 존재로, 피조계를 초월하여 그 너머의 역량으로 성장해. 그래야 이 나의 본체는 물론이고 영의 세계 전체와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고도 남을 거대한 그릇이 될 테니까.>>

   이토록 훌륭하게 예비된 위대한 그릇이라면 모든 수모와 노고들을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의 유익을 가져다주겠지. 어쩌면 예정과 저주의 틀마저도 깨트릴 놀라운 반전의 승리를 보여줄지도 모르지. 매번 예상을 뛰어넘는 흥미를 가져다주는 이 귀중한 보배가 탐욕 가득 섞인 지옥의 희열을 맹렬히 끓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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