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80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0. 크로스솔져 III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9.09 | 회차평점 0 |
Chapter 60. 크로스솔져 Ⅲ
문이 열리며 울린 종소리. 동시에 건장한 체격의 청년 한 무리가 식당 안에 들어왔다. 성한과 유진 부부는 여느 때처럼 밝은 모습으로 그들을 맞아주었다. 청년들은 존경심과 친애를 동시에 담아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이내 성한은 아이들의 낌새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유난히 다들 표정이 숙연하고 진중해 보였다. 마치 거사를 앞두고 결의라도 다지는 전사들 같았다. 곧 주방에 있다가 거실로 나온 신해가 동료들과 마주치자마자 눈빛을 교환하였다.
여기서 잠깐 그가 왜 거기서 나왔는지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윤혁이 자리를 비운 사이, 신해는 성한 부부네 집 근거리에서 숙취하며 부부를 친부모처럼 봉양하였다. 그리고 식당에서 일하면서 탁월한 요리 솜씨를 한껏 발휘하여 손님들의 칭찬까지 끌어모아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종종 크로스솔져들이 성한네를 방문할 때마다 팀원 간의 정보 교류를 돕는 중재자 역할도 맡아왔다. 말하자면 파트 타임 하우스 키퍼 겸 전략적 중심 축인 셈.
“아저씨, 잠시만 중요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무디가 대표로 총대를 매고 나서 성한에게 말했다.
“어머님께는 죄송하지만……, 공적인 일인지라 아저씨만 따로 봬야 할 것만 같습니다. 아무래도 상급자들과의 계약이 포함된 일이라서요.”
아도니람이 정중하게 성한과의 독대를 요청했다.
“여보, 이건 왜냐하면…….”
“괜찮아요. 뭔가 위중한 일인 거죠? 잠시 다녀오세요.”
유진은 말 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선뜻 성한에게 비밀 회담을 허락했다. 성한은 다소 수심 어린 표정으로 끄덕였다. 크로스솔져 열두 팀의 리더들이 전부 한 자리에 찾아온 모양새를 보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 뻔했다. 성한은 식당을 나서서 그들과 함께 비밀 아지트로 이동했다.
“저기, 임무라면 굳이 내가 너희들을 도울 일은 없을 텐데? 알다시피 나는 아무런 지위나 권한조차 없는 일반인의 몸이잖니.”
성한은 이해하지 못했음을 피알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했다. 크로스솔져들은 엄한 일에 아저씨를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에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그럼에도 이번만큼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죄송합니다. 아저씨를 이용하려는 마음은 맹세코 절대 없었지만 불가피하게 이런 모양새가 됐네요.”
크로스비는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양해를 구했다.
“음, 그나저나 최근에는 임무가 끝나서 다들 쉬는 중 아니었니?”
“일단 이번 냉전이 얼마 전에 종료되었기에 그렇긴 합니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문제로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웨슬리는 신중히 그들이 자리에 모인 본 목적을 드러냈다.
“여태껏 수비 전에만 몰두했다면 이제는 선제공격을 할 차례입니다.”
“선제공격이라고? 누구에게?”
과격한 용어에 성한이 당황한 나머지 되물었다.
“신수(神獸). 인간이 제작한 이종족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가짜 영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자 악령과 접촉할 수 있는 인공생명체들입니다.”
상대적으로 첨단 과학의 산물에 대한 지식이 덜 해박한 성한인지라 청년들은 한참 동안 신수라는 존재들에 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어려운 과학적 용어 때문에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성한도 대강은 현 실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 위협적인 일들이 있었을 줄이야.”
놀랍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무력만으로 그것들을 막을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합니다. 현 세상이 하나님께 대적하여 쌓고 있는 수많은 바벨탑을 우리의 힘으로는 철폐할 수 없겠죠. 애초에 주님께서도 그런 방식의 승리는 원치 않으실 테고요. 게다가 일일이 깨부수기에는 너무 많고 견고합니다. 하지만…….”
웨슬리는 잠시 말을 머뭇거린 뒤 결의의 어조로 대답을 이었다.
“이번에는 저희가 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생겼습니다. 아저씨네 아드님이 머나먼 식민지 지역으로 선교하러 떠났듯, 우리도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맡아야 할 임무를 발견했습니다.”
보충설명을 위해 크로스솔져 5팀의 리더인 폴리캅이 나섰다.
“신수 족……, 그들이 아마 지구 시민들에게 영적 간섭을 일으키는 매개체로 이용당하는 중인 것으로 의심됩니다. 여타 기계나 이종족과는 달리 유독 그놈들만큼은 이곳 지역 사람들의 영혼에 강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는 추측의 영역을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최근 몇 년의 역사 기록 데이터들을 통해서. 과연 지지난번 냉전 당시 신수들이 지구에 강림하면서 사람들의 돌변 현상이 맞물려 나타난 일이 직간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 시점 즈음 지구에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사람들에게서는 병적인 혐오감과 공포감이 나타났다. 단순한 무관심이 아닌, 비이성적인 과민 반응이었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보고 사항이었다.
“특히 신수 강림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더욱 뚜렷해집니다. 특별히 고위 신수가 강림할 때마다 그런 변화가 극명히 증폭되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저희도 주님을 몰랐기에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신해 군이 미리 기록해놓은 데이터베이스를 되짚어보니 과연 눈과 귀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뒤이어 무디도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는 이 현상이 초자연의 간섭에서 비롯되었다고 감히 추측 중입니다.”
크로스솔져들의 결론을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문장이었다.
“초자연이라고 한다면 역시나…….”
“인류연합 측에선 보통 그렇게 칭하지만, 우리 말로는 영적 세계, 곧 천사와 악마들의 세계를 칭하는 용어죠. 틀림없이 이 모든 일이 악한 영들이 벌인 만행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심각하고 강렬한 경고에 성한의 얼굴은 긴장하여 뻣뻣이 굳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라일라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마음껏 농락당하고 휘둘렸던 시절 이후로 이런 짙고 불편한 긴장감은 처음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불쾌감이었다.
“너희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청년들이 택할 길이 염려되기 시작한 아저씨.
“물론 내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성한의 질문에 이제 신해가 팀원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신수들이 이런 영적 매개 행위를 두 번 다시 하지 못하도록 척결할 생각이에요. 물론 무력으로 퇴치하기란 불가능하겠죠. 그래서 아예 증거물을 제출해 인류연합 상부층가 신수왕의 군대를 영원히 봉인하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대화에 응할까?”
“지구 시민들의 영혼을 타천사들로부터 보호하는 문제는 우리만의 관심사이니 그걸 이유로 내세우긴 어렵겠죠. 대신 윗분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문젯거리를 제시해주면 됩니다. 예컨대 거짓 영성에 내포된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서 말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성한이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내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는 거니?”
사실 대답은 간단했고 성한 자신도 예측하고 있었다. 표현하기가 힘들 뿐.
“상부 관리자와 대화를 나눌 때, 우리 목소리에 중량을 달아줄 추가 필요해요. 저희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해줄 강력한 보험도요. 아저씨가 곁을 보조해주신다면 저들도 아예 무시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성한이 이 시점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동시에 가장 감당하기 불편한 과업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허공에서 워프 반응이 발생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이런, 감히 제법이군.”
괘씸한 애송이 영웅들이 핵심 열쇠를 상대로 로비의 의도를 드러내자마자 목표물 중 하나인 문제의 그 상급자가 곧바로 개입에 나섰다.
*
잠시 일주일 전 시점.
올해의 냉전도 종료되었다. 성운은 앞으로의 새로운 계획들을 구상하는데 몰두하였다. 어차피 히어로즈란 기획도 잠깐 거쳐 가는 유희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리 정을 두지도 집착하지 않았다.
조만간 히어로 시스템도 더 거대한 군사 시스템에 흡수될 것이다. 일라이저의 블라인드-워치메이커들도 카이젤의 오픈아이드-워치메이커에 흡수되었듯, 히어로 시스템도 휴먼 솔져와 바이오닉 솔져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밀알로써 썩어질 것이다.
성운의 관심은 이제 그쪽에서 떠났다. 그보다는 장차 대규모 전면 개방이 이루어질 일과 그 이후를 대비해야 했다. 수십 개의 초은하단 속의 무수한 외계행성들과 1조 개의 하늘도시를 망라하여 세워질 인류연합 시민 사회, 그 거대한 체제에 맞게 경제 운영 규칙을 재편성하려면 유능한 경영자가 필요하다.
물론 대부분 위버멘쉬가 시스템들의 수종을 받아 알아서 잘 수행하겠지만,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 개체, 정확히는 최상위 초인 중에서도 보조자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다. 카이젤은 성운을 그 적임자로 여겼다.
‘지금보다 업무량이 많아지겠군. 눈코 뜰 새조차 없겠어.’
그는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휴식이 될지도 모르는 황금기를 만끽하며 온천물에 몸을 맡겼다. 피로는 해소되었으나 머릿속은 도리어 장래의 걱정, 특히 우주 규모의 사업 계획으로 복잡해졌다.
어떻게 하면 무한에 가까운 자원을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배분할 수 있을까? 기업 시스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얼마만큼을 무인 시스템에게 배당해야 할까? 인간의 이기심이 낳을 폐해를 제거하려면?
여러 경우의 수의 유사 시장(市場) 이론 시나리오들이 그의 뇌리에서 번쩍거리며 지나갔다. 도전욕을 불러일으키는 난제들 앞에 서자 본능에 가까운 지적 호기심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이는 곧 강렬한 희열이었다. 보통 초인들이 그러하듯 성운에게도 열정적인 흥분과 지적인 탐구는 하나로 얽힌 것이었다.
“하.”
끓는 열기를 통제하기 위해 그는 몸을 일으켰다. 냉각수의 도움이라도 받아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만의 사색에 잠긴 도중 그는 멈칫하였다. 세쌍둥이의 시선을 발견한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녀석들이랑 같이 왔었지.’
장난꾸러기 청년들은 큰형님을 감탄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는 중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초인의 신체, 머리부터 발끝까지 뿜어져 나오는 우월한 존재감, 그새 그 위압감에 시선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받아서 익숙한 시선이었지만, 지금처럼 허술하게 있는 차림이로 그런 시선을 받자니 다소 어색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보스도 참 이상하군.’
형제끼리 허울없이 온천에 같이 같다? 이런 식으로 하면 서먹서먹한 사이도 금세 친해진다고? 글쎄? 20년 이상을 동생들과 같이 자라난 나도 민망하기만 할 뿐인데? 다 큰 성인이 되어서 만난 그 둘이? 어이가 없었다.
의복이란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상징하며 동시에 자신을 감추는 가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의복이 사라질 때 신분적인 격차도 잠시나마 떼어질 수 있다. 그러면 서로의 깊은 속내를 부담 없이 드러낼 수 있다. 카이젤은 종종 자신만의 견해를 내비치며 그렇게 주장했었다. 말 그대로 개인적인 주장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성운과 같은 사고방식의 소유자에게는 별로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 사실 그는 기질 상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질 수 없었다. 도리어 자신을 솔직하게 열기보다는 타인에게마저 자신의 색채를 덧입히는 데 능했다. 혹은 타인의 색채를 모방해서 자신의 새로운 특성으로 걸치는 데도. 히어로즈를 창작한 일, 크로스솔져의 데이터를 추출했던 행동도 모두 이 같은 그의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현아.”
“네, 형님.”
성운은 한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막내 곁에 걸터앉아 말을 걸었다.
“너는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까?”
“……네?”
지현은 형이 대뜸 던진 질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마치 그 녀석들처럼.’
크로스솔져들은 영웅이라는 명성 대신 종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방종과 자만심 대신에 복종을 택한 덕에 세상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실제로 이미 그들은 성운의 통제에서부터 벗어나지 오래였다. 과연 그들은 카이젤이라는 막강한 괴수 앞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일은 초인들조차도 불가능했거늘 일개 크로스솔져들이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심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터.
‘왠지 억울한 기분이군.’
한편, 지현은 당황한 채로 침묵했다. 항상 큰 위압감을 자아내던 형이 왠지 모르게 오늘은 힘빠진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내성적인 지현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찾지 못했다. 침묵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지현은 깊은 상념에 잠긴 큰형이 혼자 고뇌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다음 회차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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