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81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0. 크로스솔져 III (2)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9.11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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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현재.
“오랜만입니다. 강성한 씨.”
“유성운 회장님.”
워프로 당도하자마자 성운은 한껏 사무적인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는 크로스솔져를 흘깃 쳐다보더니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초인 특유의 오만한 기색이 흘러나왔다. 성한을 향하는 태도와 자신들을 향하는 태도의 온도 차이를 감지한 크로스솔져 리더들은 긴장감에 표정이 굳었다.
“용건을 듣도록 하죠. 나를 직접 부를 만큼의 가치는 있어야 할 겁니다.”
성운은 차가운 어투로 크로스솔져들에게 말했다. 갈색 눈동자에서 고요하면서도 섬뜩한 기운이 진동했다. 크로스솔져들의 무장과 슈트는 보이지 않는 어떤 작용에 의해 일제히 억눌러졌다. 당신들이 지닌 무력은 내가 준 것이니 언제든지 내가 조종할 수 있다. 이런 협박의 의미가 담긴 성운의 의지가 비언어적 표현으로 은연중 대기 가운데 흩뿌려져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죠. 아쉽지는 않을 겁니다.”
신해는 용기를 내어 대표로 나섰다. 그는 문제가 될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펼쳐 보였다. 그것은 지난 냉전 기간 내내 크로스솔져들이 신수들을 사냥하면서 틈틈이 획득한 증거물들의 집합이었다. 즉 신수의 뇌에서 추출해낸 부위들이었다.
“냉전은 이미 끝났는데……, 일라이저의 계획에는 훼방을 놓고 싶다?”
성운은 대강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중얼거렸다.
“당신에게도 통쾌한 일 아닙니까? 복수도 시행할 겸.”
“이런, 한심하군. 착각도 유분수야. 나는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거든. 한낱 스포츠 경기 한 번에 일희일비하는 소인배는 아니지. 게다가 일라이저는 엄연히 나와 길을 함께하는 U-society 출신 동료이자 인류연합 간부. 굳이 내가 그를 훼방할 이유는 없지.”
하대하는 어투로 바뀐 그의 목소리에서 한층 더 권위적이고 거만한 느낌이 물씬 묻어나왔다.
“스포츠 경기라. 역시 당신들에게는 그 정도 의미에 불과했군.”
무디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덤덤히 말했다. 히어로들은 자신들이 마치 인류를 지켜내는 위대한 역할의 존재인 양 여기며 인기와 칭송을 즐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결국, 그 모든 싸움판이 높으신 분들께는 단지 여흥 거리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 사실을 진작에 알았던 크로스솔져들은 어리석은 영웅 심리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의를 자축하며 자신의 영광을 취하기를 단호히 거절했다. 무릇 영웅이란 칭호는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영웅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높으신 나리들의 사정이야 저희가 알 바 아니지요. 우리는 그저 인류연합 상부 측에서 꽤 관심을 가질만한 자료를 제출해드리려 합니다.”
신해가 바통을 넘겨받아 본론을 말했다.
“들어보지.”
“신수왕의 발명품들인 신수들은 초자연적 실체와 접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에게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당신이라면 이것이 시사하는 바를 아시겠죠?”
신해는 직설적 화법으로 성운을 도발함으로써 조사를 요청했다.
“흐음.”
“이젠 좀 흥미가 가십니까?”
“뭐, 좋아. 그런데 어째서 너희들만 그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 분명 다른 영웅들도 신수와 맞섰을 텐데 그들은 왜 아무도 초자연적 현상을 관찰하지 못했을까? 이건 마치 너희에게 어떤 특수한 초자연적 요소라도 있어서 너희와 마주친 신수들에게서 초자연 현상이 유도되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그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신수들은, 정확히는 그것들을 이용했던 타천사들은 항상 크로스솔져에 깃든 거룩한 영체를 보고는 두려움에 떨며 과민한 반응을 일으켜왔다. 새로 태어난 영을 소유한 인간이 아니면 결코 유발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제아무리 성운처럼 영민한 최상위 초인이라 해도 그러한 초자연적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지는 못했기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노코멘트.”
더 휘둘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신해는 단호하게 대답을 거절했다. 그 순간 크로스솔져들은 성운이 분노라도 터뜨릴까 두려워 긴장했다. 다행히도 우려했던 일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너희들이 원하는 게 뭐지?”
성운은 흔쾌히 그들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경청했다.
“더욱 확실한 증거의 확보입니다.”
“그 뒤에는?”
“당신이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인류연합 수장에게 이 사안의 심각성을 직접 설득시켜주셨으면 합니다. 더는 신수들이 지구에 초자연 현상을 유발하는 매개체가 되지 못하도록요.”
사실상 오컬트 현상의 매개물이자 가증한 우상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그 괴이 인조물들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해체해버리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바였다. 신수왕을 직접 상대하지는 못할 테니 더 높은 권위자를 이용하는 것. 현재로서는 이것이 최선책이었다.
“흠, 증거라. 그러려면 현재 지구에서 활보 중인 신수중에서 최소한 ‘전설급’ 이상은 사냥해야 할 텐데 말이지. 지금 지구에는 레비아탄, 베헤모스, 지즈, 크라켄, 자라탄, 이 다섯 마리가 활보 중이지.”
물론 본체는 지구가 아닌 우주 어딘가에 상주하는 중이었다.
“원래 본체의 0.1% 내지 0.2%짜리 분신에 불과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일 가능성이 높아. 물론 그만큼 증거물로서의 가치도 충분하겠지.”
크로스솔져들도 전설급 신수의 악명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잘 알았다. 그들이 현역 솔져였던 시절부터 활동했던 괴수들이니까. 특히 방금 언급된 다섯 신수는 제 자신의 육체를 보완 및 복구하면서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성장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전설급 중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는 개체들이었다.
“공식 허가만 내려주신다면 우리가 그들을 사냥하겠습니다.”
크로스비가 용기를 내어 선언했다.
“하하, 당신들이?”
바로 그 순간, 성운의 입에서 나오는 어휘와 언어가 반전되었다.
“용기는 가상합니다만, 자기 객관화가 부족하군요.”
성운은 공용어 대신 2세대 초인들이 만든 오리지널 언어 중 가장 유명한 ‘라일라의 퀜타빌레’를 활용해 상대를 비웃었다. 카이젤이 하늘도시 시스템을 창작해낸 이후로 줄곧 이 언어는 우주 인류 사이에서는 공용어 바로 다음의 제1 외국어로 통용되었다.
크로스솔져들도 한때 휴먼 솔져 출신이었기에 그 의미를 알아듣고는 조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번뜩 긴장했다. 사실 저 제1 외국어는 가혹하기로 유명한 솔져 훈련 프로그램에서 가장 자주 쓰이던 언어였다. 개들도 자신을 학대할 때 조건화된 신호에 공포감을 느끼듯, 인류연합의 개들 또한 신분이 바뀐 지금도 그때의 감각을 잊지 못했다.
“열두 팀 전원이 완전 무장에 인형까지 동반해 덤벼도 레비아탄 한 마리조차 상대하기 어려울 텐데요? 물론 본체 말고 지구에 주둔 중인 분신 말입니다.”
상대를 깔아뭉개는 언사가 쏟아졌으나 크로스솔져들은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은 채 의연했다. 애초에 그들은 인간의 무력을 의지하지 않았기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아가는 골리앗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싸우는 다윗과 같은 부류의 용사들에게나 허락된 담력이었다.
“상관없습니다.”
성운은 부나방처럼 뛰어들려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안위 또한 신경쓰지 않았기에 더는 시비를 놓을 필요성을 찾지 못했다.
“보스를 설득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문제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신해는 성한을 가리켰다. 성운은 흘깃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오, 비공식적인 경로의 영향력이라, 흥미롭군요.”
최상위 초인과 전직 솔져들의 불꽃 튀는 신경전을 구경하는 와중에 성한은 피가 마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왜 하필 또 이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단 말인가. 더욱이 유 회장이 그 라일라의 창작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으니 더욱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때의 불쾌한 추억이 떠올라 골치가 아팠다.
그때.
촤아아악.
갑자기 섬광이 번쩍이더니 크로스솔져들이 한껏 모아온 증거물이 스펀지 속으로 빨려드는 수분마냥 허공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놀랐지만, 성운만은 상대가 누구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회담 전 이곳에 성운 자신이 설치해둔 결계를 원격으로 손쉽게 해체할 실력자는 단 한 명뿐. 과연 예상대로 무거운 텔레파시 음성이 그 자리의 일행 모두에게 임했다.
“유성운.”
“네, 보스.”
“그들의 제안을 허락한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동자가 부르르 떨리는 성운.
“조금 전 그 증거물들의 해체와 분석을 모두 마쳤다.”
회수된 지 5초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 말도 안 되는 듯한 언급이 스쳐 지나갔으나 성운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주변에서 듣던 다른 일행은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스, 이곳 일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를 포함한 스물네 명은 항상 나의 감찰 대상임을 잊지 않았겠지. 어디로 향하든 너는 내 관측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참고로 그의 감찰 대상 중에는 생물학적 부친인 성한도 포함되었다. 혹시나 해를 입지 않도록 지켜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민간인인 부친이 가뜩이나 위험한 초인이나 솔져와 마주치는 데 감시를 두지 않을 리는 없었다.
“내 직속 권한으로 명한다. 저자들이 지구에 주둔 중인 레비아탄의 분신을 사냥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리겠다. 일라이저에게는 내가 따로 다른 임무를 맡겨서 일시적으로 지구에서의 신수 운용을 제한하도록 하겠다.”
이에 성운은 한 치의 토도 달지 않고 순순히 응답했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이행하겠습니다.”
한편 성한은 큰아들의 목소리에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자, 잘 지냈니?”
“따뜻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더 좋겠군요.”
“아……, 그래, 재혁아.”
“감사합니다. 혹시 저 인간이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습니까?”
맥락상 유성운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날카로웠다.
“아니다, 별일 없었단다.”
“아버지는 여전히 너그러우시군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쪽이 바뀌었다. 크로스솔져들이 아닌 성운쪽으로.
“제가 뻔히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대화를 다 들었거늘…….”
그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내려놓고 얌전히 보스의 처분을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재혁은 가벼운 해명을 들은 후 취조를 마무리했다.
“초인이란 족속은 대부분 오만한 작자들이니 양해해주십시오.”
그렇게 짧은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뭐, 축하드립니다.”
성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덤덤하게 크로스솔져들을 향해 말했다. 조금 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빈정대거나 무시하는 어투는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지금부터 당신들은 히어로즈 소속이 아닌 별개의 독립된 팀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히어로즈가 해체된 이후로도 유효하게 유지되겠죠. 그리고 또한…….”
그는 크로스솔져들의 무장과 슈트를 압박하던 자신의 염동력을 완화했다.
“이제부터 당신들의 상급자는 나도 크리슈나 씨도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이 말에 가장 놀랐다.
“비록 비공식적인 지휘 체계지만, 이 시간부로 크로스솔져 열두 팀은 초인들의 왕이자 인류연합의 대표이신 카이젤 א 라흐블뤼크, 그분께서 직접 자신의 뜻에 따라 운용할 것입니다.”
청년들은 물론 성한까지도 갑작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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