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87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1. 땅 끝으로 (3)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9.25 | 회차평점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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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주 인류의 세계들이 기틀을 형성하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광활한 우주를 정복하여 인간들에게 헌정하는 문제에 관하여, 두 사람은 같은 비전을 두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논의하였다. 그들은 여러 가지를 의논하였는데 특별히 인류의 활동 무대가 확대되었을 때 벌어질 필연적인 분열들에 대해 각자의 논리를 들고 정면으로 맞섰다.
장차 만들어질 세계 속에서는 지금보다 배는 더 거대한 전쟁들이 벌어질 수 있다. 그것을 원천적으로 예방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그것을 하나의 불가피한 필연으로 바라 보고 건강한 방향으로 수용해야 하겠는가? 왕과 마녀의 사상은 우주의 별들처럼 수백만 광년 이상 동떨어져 있었기에 쉬이 만나지는 못했다. 사실 굳이 만나야 할 당위성도 없었고.
다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류라는 종족 내부에서 통일성의 끈이 존재해야 함을 역설한다는 점에서는 둘 사이에도 교차점이 있었다.
마녀에게는 ‘신앙 체계’라는 옵션이 있었다. 설령 인류가 정치적으로는 분열된다고 할지라도 각 세력을 총괄하는 하나의 정신적 연합력이 존재한다면 충분하다. 그것이 꼭 어떤 제도적인 종교의 형태가 될 필요는 없다. 정치, 문화, 경제 등을 아우르는 강력한 지배력의 신앙 체계가 보편화된다면, 설령 정부의 개수가 여럿이 되고 통치자들의 수가 무수히 늘어난다고 해도 인류는 공통 분모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패왕은 이를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겼고 속으로 대단히 거북하게 생각했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종교라는 변수의 위력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것 위에 어떤 가치나 의의를 두지는 않았다. 억지로 억압할 필요도 없으며 장려하거나 권장할 필요도 없고, 그저 물 흘러가듯 알아서 쇠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 존재. 그에게 있어서 신앙 체계들이란 딱 그 수준,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초자연계는 존재하지. 그 계의 왕도 존재할 수 있어. 하지만 설령 그런다 한들 그가 인간 따위의 알량한 종교 체계를 신경쓰기라도 할까?’
그는 몹시 회의적인 관점이었다. 오만했던 왕은 자신이야말로 어리석은 이 땅의 종교인들보다 초자연계의 절대적 존재에 대해 훨씬 더 정확히 이해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땅의 어리석은 유산에 붙들린 자들을 존대하지도, 경멸하지도, 멸시하지도, 심지어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녀의 속셈에 대해서는 그도 적잖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가 보기에 유일하게 위협이 될 변수가 있다면 마녀의 사상이었다. 다른 친구들이야 우주로 나아가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또한 나머지 종교들은 그의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마녀 개인이 추종하는 종교 사상은 달랐다. 그것은 독버섯이었다. 인간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파괴력을 충분히 갖춘, 끔찍한 힘. 제때 없애지 못한 그 독버섯이 마녀의 힘을 얻는 바람에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녀를 조기에 진압하지 못하고 불씨를 남겨둘 가능성들을 대비해 나름의 대응 방책을 강구해두었다. 설령 그녀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씨앗들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다면, 패왕이 키워나갈 장래의 인류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진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괴이 종교’가 인간계를 침식하는 시나리오에 대한 대비책은 필요했다.
그는 이 프로토콜을 동지들과 제자들과 후세에 합류할 부하들에게도 그대로 인계하였다. 이것이 현 인류연합 및 U-society 소속 구성원들이 소유한 가이드라인 핸드북에 어떠한 특정 ‘코드 레드’ 상황에 써 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비상 응용책들이 탑재된 배경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들이 이 프로토콜들을 자의적으로,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원래 저격하려 했던 마녀의 사상이 아닌,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그 칼날을 휘두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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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급작스레 마련된 회의의 장에 불려나온 진. 그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대량의 정보가 텔레파시를 통해 전송되었다. 얼추 상황을 파악한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설득이 개시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하지.”
칼리드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다소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나오자 진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애초에 먼저 저쪽에서 직접 자신에게 대면을 요청해온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이거 네게는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닌가 보네.”
진은 잠잠히 속에 캥기는 부분을 감추고 시치미를 뗐다.
“네가 강윤혁, 아니 숙부님과 손잡은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칼리드는 에두르지 않고 핵심부를 향해 곧장 직진하였다. 진 같은 거물을 자신 뜻대로 회유하기 위해서는 능통한 심리전 능력과 정치 감각이 동시에 요구되었다. 다행히 칼리드에게는 두 조건 모두가 갖춰져있었다.
“하지만 나와 네가 힘을 합쳐도 그런 목적 정도는 충분히 이룰 수 있지 않겠나. 네 목표가 무엇이건 내가 돕도록 하지. 설령 네가 추구하는 바가 ‘방종에 가까운 자유’라 할지라도 말이야.”
의문의 당혹감에 잠긴 진의 푸른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 안광을 발하였다. 분명히 진은 언제나 우주 인류가 자유로움을 획득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윤혁이 소망하는 자유, 곧 진리 안에서의 자유와는 의미가 달랐다.
진은 개개인이 아무 속박도 없이 각자의 삶과 행동과 도덕과 철학을 향유하고 설계하는 자유를 추구했다. 나아가 무엇이든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행동할 수 있으면서도 부작용은 전혀 따르지 않는, 그런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원했다. 만일 윤혁이 그런 진의 생각을 읽었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라고 정의했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진의 정의하는 자유를 이룩하려면 카이젤과 같은 불패의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개인마다 원하는 것을 마음껏 부어주되 혹시나 발생할 통제 불능의 카오스를 원천봉쇄해줄, 강력한 힘과 지혜를 발휘할 지도자, 곧 자유의 바운더리를 보장해줄 인류의 지배자가 필요했다. 칼리드가 바라는 아버지상이 전제군주라면 진이 그려낸 아버지상은 대중의 사랑을 독점하되 모두를 뒷바라지하는 지도자였다.
지금까지는 진도 강윤혁과 행동노선을 공유했다. 하지만 막상 그를 실컷 이용한 뒤 결과를 확인해보니 영 탐탁지 않았다. 일정 부분 진의 뜻도 이뤄졌지만,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끝내 정치적, 정신적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진이 등한시하는 ‘영적 자유’만 성취되었고 그것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심지어 인류연합의 이상과 합치되지 않는 방향의 자유였다.
“그럼 내가 뭘 하길 원하지, 칼리드?”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선홍색의 불꽃 모양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네가 지금까지 숙부의 뒤치다꺼리를 맡아준 것을 내가 몇 차례나 알고도 묵인했었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네가 아예 개입조차 삼가줬으면 좋겠군. 아니지, 이왕이면 예측불허의 변수, 그러니까 갈트론 같은 놈들도 차단해줬으면 좋겠어.”
칼리드는 이미 만반의 계획을 세워두었다. 전면개방이 시작되기 직전, 마지막 한 번의 기회가 남아있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타이밍. 그 기회를 다른 변수가 망치지만 않아도 충분했다.
사실 인류연합 측에는 전면개방을 시행하기 앞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몇 가지 정책 개편 임무가 있었다. 그 일들을 수행하는 모종의 과도기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칼리드의 권한이 증대된다. 필연적인 계엄권 강화였다.
‘아버지는 과도기에 발생할 미연의 위기를 대비해 내게 계엄령 수행권을 부여해주셨지.’
그 일을 빌미로 무려 현자의 눈의 최면 레벨을 세 단계나 올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상황이었다. 절호의 찬스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함이 없겠지.
만약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는 기회가 없으리라. 전면개방 이후에는 원치 않더라도 모든 식민지 주민에게 준-시민권이 부여된다. 표식의 스위치도 이전보다는 완만한 형태로 개편될 것이다. 다시 말해 카이젤 외의 초인들은 식민지를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앞으로 은하계를 넘어서 가시 우주 전역으로 인류 서식지가 확장될 테니 초인들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차츰 축소되겠지. 아무리 뛰어난 초인이라도 아버지가 아닌 이상에야 물리적으로 통치 가능한 범위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요약하자면 전면개방 직전의 짧은 시기는 그야말로 돌아오지 않을 천재일우였다. 게다가 때마침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찬스 카드인 ‘궁극의 군단’도 가동 채비를 마쳤다. 아마 이 군단도 지금 이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유효성을 낳지 못하리라.
“칼리드 너 설마……, 셀레스티언들을 움직일 생각이냐?”
진은 형제의 기획안을 직감하고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 철인왕들 넷이서 지휘권을 공유하기로 한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래서 부탁한 거다. 이미 유리스와 에르샤는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 듣더니 허락해주었어. 네게도 충분한 보상을 지불해주지. 더불어 앞으로는 네가 추구하는 이상과 내가 추구하는 이상을 하나로 조화시켜 보겠다.”
칼리드는 진 앞에서 구미가 당길만한 제안을 무수히 내보였다. 진 입장에서는 결단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너무 달콤한 제안이라 오히려 칼리드가 왜 저렇게까지 낮은 자세로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에녹 부대표님은 어쩌고? 셀레스티언은 그분 프로젝트잖아.”
“셀레스티언 전체를 움직일 생각은 없어. 극소수 정예부대만 뽑아서 사용할 생각이다. 그 정도의 자율 지휘 권한은 우리에게도 부여되지. 너만 허락한다면 말이야. 게다가 부대표는 극도로 분주한 상황이다. 전면개방 문제 때문에 처리해야 할 행정 문제가 잔뜩 쌓여있을 테지.”
게다가 이런 타이밍에 Quasar-II 제작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과제가 생겨버리는 바람에 인류연합의 모든 프로젝트를 책임질 카이젤도 다음 한 주간 지구를, 아니 우리 은하를 떠나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다. 자연히 그의 업무 공백은 에녹이 메우게 될 것이다. 칼리드가 거사를 치를 즈음에는 에녹은 꼼짝없이 과도한 업무에 묶이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칼리드가 마음 놓고 행동하기 위한 발판은 다 마련되었다.
“이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다.”
“흠, 네 생각대로 흘러갈지, 아니면 반대로 흘러갈지는 잘 모르겠군.”
진은 솔직히 이 문제가 이미 한참 전에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다고 믿었다. 문제의 초자연적 판데믹이 그토록 손쉽게 발생한 것만 봐도 자명했다. 이런 마당에 칼리드의 저항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동시에 칼리드가 제안한 방안도 검토해보고 싶었다.
‘이 계획에 동참한다면?’
그러면 강윤혁은 과연 어떻게 될까?
고민도 스쳤지만 계산은 그보다 더 빨랐다.
“……손익 점수만 고려해보면 네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낫겠지.”
“잘 생각했다.”
아름다우면서도 냉혹한 칼리드의 화려한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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