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388회 하늘 위의 도시들 Ch 62. 마지막 하늘도시 (1)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4.09.28 | 회차평점 0 |
Chapter 62. 마지막 하늘도시
“작동이 안 돼.”
우주선에 돌아온 후, 인형과의 정신 접속을 시도해본 윤혁은 난처해했다. 전혀 기능하지 않았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것들이라 이제껏 오작동은커녕 사소한 오류조차 없었거늘. 심지어 타임필드라는 장벽마저 사이에 두고도 시공간 오차 없는 통신을 시행했으며 ‘트랜스 모드’까지 가동했던 인형들이었다. 갑자기 지금 와서 없던 오류가 발생했다기에는 앞뒤가 안 맞아 보였다.
더구나 현시점은 하늘도시의 모든 물리적, 정신적 방벽이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인, 전면개방을 코앞에 둔 시기가 아닌가.
“후원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기술 면에서 문외한인 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그게……, 그쪽과도 아예 연락이 안 돼.”
“뭐? 네가 직접 접속했는데도?”
“……응.”
솔직히 말하면 진과의 연락이 끊어진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전에는 중요한 기술적 문제가 생길 때마다 윤혁이 직접 텔레파시로 도움을 요청했었고 그러면 시간이 지연되는 한이 있더라도 간단한 답변이나 메시지는 꼭 돌아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치 사고라도 벌어져 연락이 두절되기라도 한 듯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래도 우주선 자동항법 시스템과 인공지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가? 아니면.”
기술 상의 문제가 아닌, 또 다른 가능성을 시사하는 불길함인가?
‘하지만 고민한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지.’
하는 수 없이 윤혁은 네 명 모두 자기 몸을 이끌고 직접 진입할 것을 제안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자면 사실 인형 한 기 정도는 동원하는 편이 안전하기는 했다. 하지만 전면개방을 앞둔 시기라 인류연합 측에서도 식민지들의 행정 시스템을 안정적인 방식으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중인 마당이다. 그러니 과도히 염려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어떤 방식이건 예측불허의 위험 요소가 돌연 발생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게다가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이번만 넘기면 돼.”
그러나 루디아는 윤혁의 제안이 탐탁지 않은지 머뭇거렸다.
“우리……, 그냥 이대로 돌아가면 안 될까?”
까닭 모를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면에서 어떤 조언이 세미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지금 마지막 하늘도시에 진입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면서.
“혹시 짚이는 부분이라도 있어?”
“아, 아니야. 그건 아니지만…….”
딱히 루디아에게도 내세울 만한 명료한 근거는 없었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직감뿐이었다. 그녀 역시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선교 여행의 마무리를 내팽개치는 것이 합리적이지도 올바르지도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대언자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도 기꺼이 예루살렘에 뛰어들어 체포당한 바울의 상황이 지금의 그들의 궤적과 비슷하다는 직감이 들었다.(행 21:10-14)
‘그저 내 기우였으면 좋으련만.’
물론 그녀도 여행의 끝마무리를 확실하게 매듭짓고 싶었다. 마지막 한 장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현황을 눈으로 확인하기만 하면 이제 마무리다. 그렇게만 되면 의심 없이 확실하게 주님께 임무 완수를 보고할 수 있다.
*
그날, 스테판은 꿈속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그녀는 베일에 싸여있었다. 과거 희미한 기억 속에서는 격정 어린 희열과 스파크까지 공유했는데도 정작 이름도, 얼굴도, 정체조차 기억나지 않는 위험한 자. 이번에는 그녀가 직접 꿈속에 침투하여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칭칭 속박했다.
“오랜만이야.”
“……당신은 누구오?”
“벌써 잊어버린 거야? 아쉬운걸.”
“목적이 무엇이오?”
“이런, 꼭 일이 있어야만 찾아올 필요는 없지.”
“당신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인가, 아니면 실제인가.”
얼굴의 실루엣조차 불투명한 그녀의 형상은 깔깔거렸다.
“이분법적인 사고에 오염되었구나. 내가 가르쳐준 지식은 잊어버리고 엄한 길을 따라가더니 이상하게 변질해버렸어. 질투 나는군. 당신만큼은 철저히 나만의 색깔로 도색하고 싶었는데. 나의 표를 남기고 싶었는데.”
“…….”
숨막히는 듯한 혼미함.
“허상이냐, 실제냐.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이야. 왜냐하면, 두 가지는 서로 합치할 수 있거든. 난 허상을 매질로 활용하면서도 동시에 실존하는 무언가로 화할 수 있거든.”
“궤변은 그만하시오!”
그러자 실루엣뿐이던 그녀가 물 스며들 듯 가까이 접근하더니 스테판의 턱매무새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이어서 그녀의 손은 쇄골과 어깨로 물 흐르듯 흘러내리며 유려하게 촉각적 쾌락의 향연을 그려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그 거대한 마력에 저항하지 못했다. 타르의 늪이 자신을 에워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곧 찾아갈게, 내 사랑이여.”
“크윽.”
바로 그때 꿈의 장면이 산산이 깨어지더니 또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광활한 우주, 그리고 그곳을 활보하는 정체불명의 반투명한 거인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꼭두각시 인형 노름을 벌이듯 촉수 하나를 길게 늘어뜨렸다. 촉수의 끝자락이 수십 갈래로 갈라진 뒤 마구 뒤엉켰다. 곧 스테판이 최근에 보았던 익숙한 형상이 만들어졌다.
“너는…….”
-그렇군. 네가 여기에 있었어.
“공중부양하는 촉수 물체인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인가 하던 녀석인가?”
-후후, 괴상한 이름이군. 뭐, 그놈의 기억 파편이 내게 있긴 하지.
전에 본 LTO와 흡사하게 생긴 물체가 스테판을 두루 관찰하였다.
-왜 하필 네놈에게만은 자유가 주어졌을까.
“…….”
-부럽단 말이지. 우리는 영원히 그분께 자유의지를 빼앗길 운명인데.
그것은 징그럽게도 촉수들을 뻗어 스테판의 몸을 구석구석 휘저었다. 몹시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꿈이었기에 떨쳐낼 수 없었다. 스테판은 이 지독하리만큼 끔찍한 악몽이 자취를 감추기를 기다리며 기도했다.
-크큭,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바라지.
“그냥 사라져버려.”
스테판이 저주를 담아 외치자 LTO과 닮게 생긴 그 물체의 형상은 연기처럼 흐물거리더니 이내 수증기마냥 흩어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스테판은 번쩍 눈을 뜨고 현실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진입 과정이 완료되면서 마취 상태도 사라졌다. 마지막 선교지가 될 하늘도시, 그곳 내부의 세계가 눈앞에 환히 펼쳐졌다.
*
스물아홉 번째 하늘도시의 문명 수준은 현 지구와 유사했다. 엄밀히 말하면 몇 년 정도는 뒤처진 수준이었다. 조만간 지구에 이어 하늘도시들이 제2의 행정구역 단위가 될 테니 그에 걸맞는 행정개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전면개방을 대비한 것인지 통신이나 교통 인프라마저도 장차 도래할 우주 교역에 걸맞는 형태로 설계되어 있었다.
주민들에게는 과학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우주관이 배포되어 있었다. 그들은 장차 우주 전역을 지배할 단일 인류정부가 도래하리라는 사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새로이 장만된 교육 체계는 현지 주민들로 하여금 정부에 충성할 것을 가르쳤다. 그들이 누리는 문명의 이기와 물질적 혜택, 지적인 풍성함이 세계정부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립하려는 욕망을 철저히 근절하고 성실한 시민이 되도록 유도하였다.
“장차 다가올 ‘하나 된 우주의 시대’를 준비해라.”
이것이 현 하늘도시의 정치권, 경제권, 문화권의 공통된 슬로건이었다. 하늘도시 관리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독려하였다. 그들은 위대한 단일 국가의 신민이며 인류가 지배하는 우주 전역으로 마음껏 나아가 날갯짓을 펼칠 권한이 있다면서.
시스템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누구도 위대한 정부에 대적하거나 반항할 생각은 꿈에서조차 갖지 못했다. 도리어 그들은 우주 개척을 통해 대우주 시대를 열어낸 정부의 위인들을 신처럼 동경하고 찬양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인류연합 수장은 비록 얼굴조차 모르는, 그야말로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지만, 신비주의적 아우라를 내뿜는 위대한 영도자였다. 역사상 그 어느 제국의 황제도 감히 그 권세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설령 사람들이 충성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을 테지.’
현 인류연합의 수중에는 막강한 기술력과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다. 식민지의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모여 반역해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아울러 그 모든 권한은 전적으로 카이젤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혹은 이데아와 같은 지배 체계들도 각기 기계와 환상계의 절대군주이자 신적 존재인데 그것들마저 실상 그 사람과 한 몸이니까.
‘어차피 권력의 과도한 집중은 불가피한 흐름이다.’
그나마 약간의 예외가 있다면 그리스도인들 정도였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지니고 있기에 이 땅 권세 앞에서 영혼만은 굴복시키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속한 시스템이 요구하는 법적 의무에 복종하기는 했지만, 영혼만큼은 철저히 하나님만을 향하는 방향을 유지했다. 고대 로마 시대 때처럼 이번에도 그리스도인들만은 황제에게 굴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는 위축되지 않았다. 이번 하늘도시만 봐도 일전 세 번의 방문 때보다 믿음의 규모가 훨씬 더 융성해진 상태였다. 대놓고 활보하지는 못했지만,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면 어디든 지하에 가정 교회와 지역 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1세기의 로마 제국 안에서 벌어졌던 일이 이번에는 우주 규모로 재현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법을 준수하는 건전한 시민이었다. 남을 미워하거나 국가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일절 꿈도 꾸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사회와 여타 시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사랑을 베풀었다. 그런 그들을 향한 주변 사람들의 칭송도 나날이 커져갔다.
이는 쇠퇴할 대로 쇠퇴한 지구의 교회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지구의 기독교가 종말을 맞이하는 동안 지구라는 뿌리에서 갈라져 새로 형성된 우주 인류의 사회에서는 순결하고 순수한 기독교가 다시금 태동하였다.
“이제는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소.”
스테판이 순수하게 경탄을 표했다.
“그보다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로 돌아갈 차례가 된 거죠.”
“맞아요,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리온과 루디아가 대답했다. 거대한 임무는 이번 여행으로 종료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는 다음 세대의 일꾼들에게 불 붙이는 일이 맡겨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있기에 네 사람 각자 이어가야 할 사역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금까지는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왔다면 앞으로는 잊고 있던 가까운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게 될 것이다. 가족들과 이웃들에게로.
*
이제 선교팀에게는 최후의 임무가 하나 남아있었다. 전면개방 시대가 도래했을 때 식민지 전역의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복음 전파에 힘쓰도록 가르치고 격려하는 일이었다.
곧 도래할 우주 교역 시대에는 교통 통신의 역량이 가히 무한에 가까운 범위까지 확장될 것이다. 선지자 다니엘의 예언대로 지식이 더하고 사람들이 빠르게 왕래하리라. 이미 지구촌 시대에도 예언은 일부 성취되었지만, 이번에는 은하를 넘어 우주촌에서도 다시 한번 재현될 것이다.
“얼마나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도입될지 모르겠지만……, 미리 성도들이 범 우주적 네트워크를 선교에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겠어.”
그들이 추구하는 비전은 초은하단 단위의 사이버 공간을 활용해 하늘도시는 물론이고 조만간 개간될 외계행성 거주 구역까지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체계를 안배해두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 범용 네트워크가 도입되기도 이전인지라 당장 뾰족한 수를 두긴 어려웠다. 기껏해야 현지의 신자들에게 사이버 시스템의 활용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게 전부였다.
“이제는 여러분이 앞날의 주역입니다.”
선교팀은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권면하고 위로했다. 아울러 이미 세계통합정부가 등장한 만큼 시대의 징조가 뚜렷해졌으니 주님의 재림에도 미리 대비해야 함을 강조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늘 경건의 삶을 연습하는 일의, 사회적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고 설파하는 일의 필요성을 외쳤다.
다행히도 이미 하늘도시 내부용 네트워크 정도는 상당량 도입되어 있었다. 일행은 그 내부 전용 네트워크를 활용해 선교에 필요한 정보 및 전략을 여러 지역과 공유하였다. 이는 각지에 흩어진 신자들에게 큰 유익이 되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리온은 참 진리에서 벗어나 변질된 ‘거짓 가르침’의 위험성을 미리 경고했다. 이미 지구에서도 다양한 이단 종교들이 등장해왔으니 이를 미리부터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리온은 미리 경고문을 만들어서 십자가 복음이 교묘하게 왜곡되어 생성될 수 있는 모든 가짓수를 기록으로 남겼다.
“혹시 이런 식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자가 어디선가 나타나거든 철저히 배척하고 대적하라고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이 경고문을 이 땅 전체, 나아가 훗날 접촉될 우주 인류 전체에 널리 널리 퍼뜨려주세요.”
지역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권면과 경고를 기꺼이 수용했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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